〈 21화 〉일본에서 온 그녀 (4)
일본에서 온 그녀 (4)
민재는 아이의 집에서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눈 후 그녀의 원룸을 나왔다.
1층 공용현관으로 나와 보니 아까 그 뿔테 안경 학생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연예인이나 좋아하는 사람 쫓아다닐 수도 있긴 한데 집에까지 쫓아오는 건 좀 그렇지...... 어? 그런데 이건 뭐야?!’
민재가 주차해 놓은 자신의 페라리로 다가갔을 때, 누군가 못처럼 날카로운 물건으로 차 옆면을 긁어 놓은 자국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닌가?
‘안 봐도 누구 짓인지 알 것 같네. 이러고도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나?’
민재는 살짝 빡친 표정으로 차의 시동을 켜고 블랙박스를 확인해보았다.
차량 정면에 부착된 카메라에 아까 그 뿔테 안경 학생이 차로 다가오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차량 옆면에서 그가 차를 긁은 모습은 당연히 나올 리 없었다.
민재는 차 밖으로 나와 주변을 훑어보았다.
마침 가까운 곳에 자신의 페라리가 주차되어있는 방향을 찍고 있는 CCTV가 눈에 들어왔다.
민재는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김 변호사님? 저에요. 잘 지내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의뢰할 일이 생겨서요. 네, 누가 제 차를 긁었어요. 아뇨, 집이 아니라 신촌에서요. 네, 페라리요. 이거 경찰에 소장 접수해주시고 CCTV 확인 좀 해달라고 해주시겠어요? 여기 주소가요......”
* * *
민재는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이 건을 정식으로 경찰에 접수시키고 페라리도 수리를 맡기기로 했다.
다행히 페라리 서비스센터가 서울 성수동에도 있어서 굳이 해외로 차를 보낼 필요는 없었다. 견적도 ‘민재의 기준으로’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았고.
‘하지만 그 오따꾸 같이 생긴 녀석에게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똑똑히 가르쳐 줘야겠지. 이 비용은 모두 다 받아 내주마......!’
다음 날, 민재는 유튜브 채널 촬영 시간에 맞춰 덕환의 스튜디오가 있는 자신의 압구정 건물로 향했다.
페라리는 수리를 맡겼기에, 오늘은 은색 메르세데스 벤츠를 끌고 가야 했다.
그가 자신의 건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덕환와 아이, 스튜디오 직원들에게 줄 커피를 사서 캐리어에 담아들고 나왔을 때,
마침 아이가 건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민재씨!”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오는 아이,
이 모습에 민재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오세요?”
“네, 민재씨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네, 잘 들어갔어요. 그런데 오늘 나올 때는 어제 그 오따꾸 같이 생긴 친구는 안보였어요?”
아이의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아뇨, 오늘도 나올 때 앞에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가 택시 불러 타고 온 거에요.”
“이거 문제가 심각해 보이는데요? 경찰에 신고해 보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한국에서는 그런 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그래요? 그럼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민재씨가요?”
아이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민재가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김 변호사님. 아직 경찰서 안가셨지요? 그럼 어제 그 일 용의자하고 관련된 거로 추가로 소장 접수할 게 있는데, 혹시 압구정에 있는 제 건물로 오실 수 있으세요? 아뇨, 이 건은 저에 대한 건 아니고 제 지인이 피해를 입은 사항이에요. 네, 여자 분이구요, 어제 제 차 긁은 그 녀석이 제 지인을 스토킹하고 있어서요. 네, 집 앞에서 기다리고 만나달라고 난리치고 그러더라구요. 오늘 몇 시쯤 오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 때 뵐게요.”
민재가 전화를 끊자 아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그 사람이 민재씨 차도 긁었어요?”
“네, 나와 보니 그 녀석이 그래 놨더라구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피해를 보시게 되어서요.”
“아이짱 때문이라니요? 이건 모두 그 녀석 잘못이지 아이짱은 아무 잘못 없어요.”
“그래도......”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어차피 김 변호사님하고 경찰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 줄 일이니까. 이따가 김 변호사님 오시면 그 녀석이 언제 어디서 아이짱을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괴롭혔는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럼 김 변호사님이 이제 앞으로 그 오따꾸 녀석이 아이짱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알아서 잘 도와주실 거예요.”
“고맙습니다, 민재씨.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지요?”
“은혜는요, 무슨. 전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절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어떻게든 제가 보상을 해드리던지, 아니면 다른 대접이라도 해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죠.”
설마, 이번에도 어제처럼 ㅅ록차 타주려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일단 위로 올라가죠. 덕환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 그래요!”
아이는 민재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가 커피 캐리어를 들고 있는 민재의 팔을 살짝 잡으며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어제...... 그 이상한 사람한테서 저 도와주실 때요...... 그 때 제가 민재씨보고 남자친구인척 하려고 오빠, 라고 불렀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쁘시지는 않으셨어요? 그랬다면 사과드릴께요.......”
사과는 무슨, 네가 오빠라고 불러줘서 고마울 뿐이지.
“아뇨, 그럴 리가요? 선생님, 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오빠, 라고 불러주니까 확실히 더 기분 좋던데요?”
“그래요? 그러면은요...... 앞으로 민재씨라고 안 부르고 오빠, 라고 불러도 돼요? 어차피 민재씨하고 저 나이차면 제가 오빠, 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한데......”
“네,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오빠라고 부르세요.”
“네, 오빠~!”
역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다 똑같은가 보다.
이렇게 예쁜 애가 오빠, 라고 불러주니 민재도 좋아 죽을라고 하면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다.
아이가 단단한 근육이 잡힌 그의 팔뚝을 스윽 어루만지며 말했다.
“근데 오빠...... 사귀는 사람 있어요?”
순간, 시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지금 시은씨와의 관계를 사귀고 있다고 말을 해야 하나......?’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연락이 잘 안 되는 시은,
민재는 항상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지만, 이제 그녀가 먼저 그를 멀리 하려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상황......
민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 요캇타!”
하고 일본말로 외쳤다.
그 말에 눈이 똥그래지는 민재,
“네? 욕같다구요???”
“아뇨~! 욕같다는 게 아니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오~!”
아이는 얼굴이 발그레해지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 * *
덕환의 유튜브 채널 새 컨텐츠 이름은 ‘아이짱과 함께 하는 일본사’로 정했다고 한다.
‘아이짱과 함께 하는 일본사’ 첫 번째 영상 촬영이 끝났을 무렵, 민재의 개인 변호사인 김 변호사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김 변호사는 국내 유명 로펌인 K사에 소속된 변호사였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누가 봐도 믿음이 갈 만큼 올곧은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민재는 덕환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가 오따꾸 녀석에게 스토킹을 당했던 일에 대해 김 변호사에게 소상히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곁에서 대충 이야기를 들은 덕환도 놀라는 눈치였다.
“아이짱한테 그런 일이 있었데?”
“응, 어제도 그 오따구 녀석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구. 아이짱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못 들어가게 막아서서는 한 번만 만나달라고 때를 쓰면서 말이야.”
“아, 찌질한 새끼...... 싫다는 여자한테 그게 무슨 짓이냐, 진짜?”
“게다가 그 녀석이 내 차도 못으로 긁어 놨더라구.”
“네 차?! 페라리 그거?!”
“응, 그래서 서비스센터에 수리 맡겨 놨다.”
“와~ 그거 오따꾸에 완전 또라이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짓을 하고도 지한테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딱, 인.실.오 시전 해 줘야지. 인생은 애니가 아니라 실전이다, 오따꾸야.”
“야, 근데 오늘 경찰에 사건 접수해도 경찰들이 바로 조사하고 그러지는 않을 거 아냐? 경찰들 보내서 24시간 신변보호를 해줄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마 그렇겠지? 아, 너 전에 코엑스에서 했던 유튜버 행사 갔을 때 행사 보안 담당했던 경호회사 대표한테 명함 받은 거 있었지? 거기 연락처 나한테 보내줘 봐.”
“왜? 아이짱 경호원 붙여주게?”
“필요하다면 해 줘야지.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한국에서 혼자 살고 있는데 딱히 도와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당분간 우리랑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도와줘야지.”
“너 같이 돈 많은 애가 착하기까지 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런 녀석이 내 친구라니 든든하기도 하고. 잠깐만 있어봐, 경호회사 번호 확인해서 알려줄게.”
“응, 땡큐~”
민재는 덕환이 알려 준 경호회사 연락처를 핸드폰에 저장시킨 후, 아이가 김 변호사와의 대화가 모두 끝날 때까지 곁에서 이들을 지켜보았다.
대화가 끝난 후, 김변호사가 민재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용 정리 다 끝났으니, 일단 두 건 모두 경찰에 소장 접수하고 CCTV 기록 열람 신청해서 증거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님.”
김 변호사는 민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스튜디오를 나갔다.
덕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민재와 아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늘 가도 그 스토커 오따꾸 새끼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늘도 민재 네가 아이짱 집에 까지 바래다 드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 아이짱, 오늘도 제 차 타고 함께 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오빠~!”
얼굴 가득 예쁜 미소를 지으며 민재의 제의를 냉큼 수락하는 아이.
두 사람은 각자 짐을 챙겨 덕환의 스튜디오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