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일본에서 온 그녀 (6)
일본에서 온 그녀 (6)
민재와 아이는 한복을 입고 즐겁게 경복궁을 돌아다녔다.
누가 봐도 빼박 커플이라 여길 정도로 둘이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말이다.
‘어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네......? 뭐, 나도 싫지는 않으니 일단 내버려두자.’
시은이 떠나간 빈자리 때문이었을까,
민재는 자신의 곁에 꼬옥 붙어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이 일본인 아가씨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고 있었다.
“경복궁은 참 신기한 거 같아요. 왕궁 같지 않게 화려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왠지, 음...... 센사이데 우츠쿠시? 섬세하고 예쁜 거 같아요.”
“조선이란 나라는 유학자들이 세운 나라였어요. 유학자들은 왕부터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과 청빈함을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왕이 사는 궁전도 그와 같은 생각을 담아 지었던 거죠.”
“그리고 약간...... 다른 나라 왕궁들보다는 작은 것 같아요. 왕이 사는 왕궁인데, 이보다는 더 크고 건물들도 많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원래는 지금 보다 훨씬 더 크고 건물들도 많았어요. 지금 저기 고궁 박물관 자리나 경복궁 북쪽에도 궁궐 건물들이 있었던 곳이지요.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구한말에 다시 지어졌는데, 그 후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합병하면서 궁궐의 일부를 허물어버려서 지금 있는 건물들만 남게 되었지요. 예전에는 광화문이 있던 자리에 일본제국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이가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아무리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런 이야기는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건데,
민재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일본이 한국에 한 일에 대해서 어학당에서 배운 적이 있어요. 일본인으로서 죄송하게 생각해요......”
“네......”
“서울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나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일본인들이 과거에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잘못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저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곳에 가서 참배 드리고 사죄드리고 싶어요.”
“사죄라니요, 아이짱은 잘 못한 게 없는데요.”
“얼마 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같은 여자로서 그 얘기 듣고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우리 선조들이 정말 한국 사람들과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었구나, 그런데 우리나라는 체면, 이라는 것 때문에 그동안 그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안 하고 있었구나, 이 생각에 몹시 부끄럽기도 했어요. 일본은 체면, 이라는 걸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만약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을 사과하면 그런 나쁜 일을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니까, 그것 때문에 일본이란 나라의 체면이 깎일까봐 일부러 사과 안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유감이라고, 돈이라도 조금 보상해 줬으니 이제 됐는데 왜 계속 말하는 거냐고, 이렇게 비겁하게 회피만 하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그분들께 사죄드리고 싶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본 총리나 천왕이 이제라도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을 하게 된다면 양국 간의 관계도 이전보다 더 좋아질 텐데 말이죠. 미안하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70년 넘게 기다리신 할머니들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이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다정하게 경복궁을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광화문 앞으로 나온 두 사람,
아이가 팔짱을 끼고 민재의 팔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오빠, 우리 이제 광장시장 가는 거예요?”
“네, 광장시장까지 걸어가기는 좀 머니까, 택시를 부를게요.”
두 사람은 택시를 잡기 위해 길 건너편으로 건너왔다.
이제 점점 해가 길어지고 있는지, 5시가 되었는데도 햇살이 제법 따사로웠다.
“오늘따라 햇볕이 강한데요? 택시 올 때까지 이거 쓰고 있어요. 얼굴 타면 안 되니까.”
민재는 자기 머리 위에 있던 갓을 벗어 아이의 머리 위에 살짝 얹어 주었다.
“와, 이거 쓰니까 얼굴에 그늘이 생겨요!”
아이는 갓을 쓰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 * *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이 광장시장으로 들어섰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시장 안에 사람들은 아주 많이 않아 보였다.
“아이짱, 혹시 육회 먹어 봤어요?”
“아뇨, 아직 못 먹어봤어요. 그런데 되게 맛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그럼 먼저 여기 광장 시장에 유명한 육회 식당부터 먼저 가볼까요? 거기 주말에 가면 번호표 끊고 한 시간은 기다려야 먹을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지금은 평일 오후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먼저 육회 식당부터 뿌시러 가요~!”
뿌시러 가자는 말도 어학당에서 가르쳐 주는 건지......?
아이는 머리에 쓴 갓을 살짝 앞으로 당겨쓰며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시장 안으로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한복 입은 자태가 너무 고왔거니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연예인 포스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와...... 저 여자, 연예인인가?”
“아직 덜 알려진 연예인 인가봐. 아니면 유튜브 나오는 사람이던가. 저런 얼굴이면 뜨는 건 금방이겠다~!”
시장 상인들도 그녀의 외모를 보고 감탄한 듯, 저마다 한 마디씩 하고 있었다.
민재의 예상대로, 광장 시장 내 유명 육회 식당인 고모네는 아직 사람들로 붐비기 전이었다.
두 사람은 얼른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이짱, 술 마실 수 있어요?”
“네, 조금이요.”
“그럼 소주는 너무 셀 거 같고, 청ㅎ라는 술이 있는데 같이 마셔볼래요?”
“청ㅎ? 그건 아직 못 먹어 봤는데, 그럼 오늘 오빠랑 그거 마셔 볼게요!”
“네, 그럼, 여기요~! 육회 2인분에 청하 1병 주세요~!”
홀에서 서빙하시는 분이 금세 국물과 함께 배 썬 것과 계란 노른자를 올린 육회 한 접시를 테이블로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청ㅎ와 잔도 금방 도착,
두 사람은 서로의 잔에 청ㅎ를 따라준 후 먼저 한 잔씩 쭉 들이켰다.
“와~ 이건 소주보다 엄청 순하네요?”
“네, 우리나라에서 만든 청주의 일종이에요. 사케하고는 또 다른 맛이죠?”
“네, 사케보다는 향과 맛이 많이 약한 것 같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이제 육회를 시식해 볼 시간,
민재가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육회와 잘 비벼 주었다.
“육회랑 배랑 같이 먹어봐요.”
민재가 가르쳐준 대로 육회와 배 조각을 함께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으로 가져가는 아이,
몇 번 씹더니 입 안 가득 미소가 번진다.
“오이시~! 너무 너무 맛있어요~! 육회가 이렇게 맛있는 건지 몰랐는데!”
“냉동된 고기를 쓰는 게 아니라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소고기로 만든 거라 더 맛있을 거에요.”
“원래 일본 사람들은 육회 많이 안 좋아하거든요? 옛날에 굉장히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 범인이 인육도 먹고 그랬다는 뉴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서 육회 같은 거 보면 그 때 그 사건 떠오른다고 많이 피하고 그랬어요. 저도 그래서 일본에 있을 때 육회 같은 거는 잘 안 먹었는데, 너무 선입관에 빠져 있었던 거 같아요. 여기 육회, 너무 맛있는 거 같아요!”
역시 일본인이라 그런지 젓가락질에 매우 능숙해 보인다.
아이는 육회 맛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쉬지 않고 냠냠 열심히 고기와 배 조각들을 집어 먹고 있었다.
“자, 한잔 하면서 천천히 드세요. 부족하시면 더 사드릴게요.”
민재가 아이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아이는 살짝 웃는 얼굴로 그와 건배를 나누었다.
“이거 먹고 또 다른데 가서 다른 음식들도 먹어야죠~! 아까 오다보니까 먹을 것들이 엄청 많던데요? 여기서는 한 접시만 먹고 일어날래요~!”
흠, 이 처자 정말, 오늘 광장시장 먹거리를 죄다 뿌시고 갈 모양이군.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모습이다.
아이가 청ㅎ를 쭉 들이키며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여기 다시 오면 사케를 한 병 사서 오는 게 낫겠어요. 아니면 여기서 육회 포장해서 집에 가서 사케랑 같이 먹던지. 육회랑 같이 사케를 마셨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요.”
청ㅎ, 넌 오늘부로 땡, 인가보다.
* * *
육회 식당 고모네를 나온 후에도 민재와 아이의 광장시장 먹거리 뿌시기는 계속 되었다.
떡튀순(떡볶이 + 튀김 + 순대)에, 우묵가사리, 어묵과 돼지껍데기를 해치운 후에도,
빈대떡과 고기완자를 시켜놓고 막걸리와 함께 먹는 두 사람.
아이는 보기보다 상당히 잘 먹는 것 같았다.
‘패션모델들처럼 마른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상당히 날씬한 편인데, 생각보다 잘 먹네~?’
게다가, 아까 청하 반병에 지금 막걸리 한 병, 그리 많이 마신 것은 아니지만 술을 마셨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그녀.
여전히 배가 고픈 듯 젓가락으로 빈대떡을 찢어 양념간장에 살짝 찍어서 너무나 복스럽게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사발에 담긴 막걸리를 시원하게 쭉 들이켠 아이가 민재를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나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나 아직 한국에서 가보고 싶은데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거든요? 그런데 전, 그것들을 저랑 같이 해줄 친구가 아직 없어요. 오빠가 남는 시간에 저 데리고 한국 구경 시켜 주시면 안 돼요?”
이렇게 말하며 그의 팔뚝을 슬며시 잡는 아이.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아이짱이 부탁하는 데, 안 되도 되게 해야지!!!
민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내가 이제부터 아이짱 한국 구경 많이 시켜줄게요.”
“정말요~? 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오빠~!”
아이는 민재의 손을 꼭 잡고 흔들며 너무나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민재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