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일본에서 온 그녀 (24) (41/140)



〈 41화 〉일본에서 온 그녀 (24)

일본에서 온 그녀 (24)




“음~ 역시 병원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가? 건물에서 병원 냄새가 나는 거 같아요.”



민재는 이곳에 자주 와서 잘 몰랐는데, 오늘 그의 건물에 처음 방문한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왔는데도 밑에 병원들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가 살짝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리니 계단으로 나가는 비상구와 평범한 방화문 하나가 나왔다.




주변에 간판이나 문패 같은 것이 전혀 없다보니, 그냥 밖에서 보면 일반 창고 공간으로 보이기도 했다.

민재가 방화문 손잡이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모던한 디자인의 소파들과 테이블, 창가에 자그마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공간이 나왔다. 이곳에는 가구들 외에도 여러 음료수가 들어있는 캐주얼한 느낌의 미니 냉장고와 정수기, 전자레인지, 각종 컵과 잔, 커피와 차가 정리되어 놓여있는 선반도 있었다.



“우와~! 여기는 사무실인가요?”


“사무실은 아니고, 가끔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때 미팅을 갖는 장소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에요. 일로 만나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기도 좀 그렇고, 카페나 공적인 공간에서는 업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제한될 수도 있다 보니 이런 공간을 만든 거죠. 하지만 그런 용도보다는, 운동하다 앉아서 쉬고 싶을 때 들어와서 차나 음료를 마시는 휴게실로  자주 쓰이게 되는 거 같아요.”



민재는 아이의 손을 잡고 문 없이 넓게 트인 곳을 통해 ‘나만의 헬스장’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이곳을 보자마자 감탄한  소리를 질렀다.

“스고이......! 진짜 넓다.......!”




10층 전체 면적만 따져봤을 때 대략 300평 가량,

이렇게 넓고 탁 트인 공간은


휴게실 바로 옆에 있는 탈의실  화장실 / 샤워실,

주짓수나 유도 도장에 깔린 것과 같은 바닥 매트가 깔린 격투기 수련 공간,



일반 헬스장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소음방지 / 충격흡수 고무패드가 깔린 웨이트 트레이닝 공간, 이렇게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쪽 창가의 격투기 수련 공간에는 다양한 형태의 샌드백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2m 길이의 두껍고 무거운 헤비백, 태국의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많이 사용하는 항아리형 샌드백과 타이어 샌드백, 어퍼컷과 훅을 연습하기 좋은 ‘ㄱ’자 모양의  샌드백, 복싱 훈련할 때 주로 쓰이는 라운드볼과 스피드볼이 차례대로 설치되어 있었고, 심지어 영화 ‘엽문’에서 나오는 영춘권 수련 도구인 목인장도 하나 놓여 있었다.



샌드백 주변에 있는 선반에는 여러 종류의 글러브와 핸드랩, 미트 (코치가 팔이나 몸에 착용하고 수련자의 타격 훈련을 받아 주는 도구), 줄넘기, 헤드기어와 신가드 (정강이 보호대) 등 여러 보호장구류들, 레슬링이나 주짓수를  때 사용하는 여러 형태의 더미들이 놓여 있었다.



 옆에 북쪽 창가는 모두 벽으로 막아 놓았는데, 그곳에는 벽면 전체에 전신 거울이 붙어 있었다.



이 너머 동쪽 창가의 웨이트 트레이닝 공간은 여느 헬스장들과는 달리 다양한 머신들 대신 바벨, 덤벨, 케틀벨, 짐로프, 불가리안백, 타이어와 해머, 클럽벨, 짐플랫폼 (짐박스), 메디신볼, 보수볼 등 크로스핏이나 바디 웨이트를 위한 도구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체스트 프레스 머신, 렛풀다운, 버터플라이, 레그컬과 같은 머신들은 없지만 대신 상당히 특별한 기구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미국 H사가 만든 모션 케이지라는 놀이터 정글짐처럼 생긴 운동 기구가 웨이트 트레이닝 공간 중앙에 딱,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션 케이지라는 운동기구는 다른 일반 머신들 가격의 대여섯 배에 달하는 고가의 장비였는데,



 하나의 기구 안에 몽키 바 (정글짐처럼 생긴 사다리를 잡고 친업 / 풀업을 하거나 이동하는 운동 도구), 클리이밍  (인도어 클라이밍 체육관에 있는 것과 같은 인조 돌벽), 딥 스테이션 (딥스를   있는 공간), 점프 플랫폼, 리바운더 스테이션 (주로 짐볼을 던지고 잡는 훈련을 할 때 사용하는 작은 트렘폴린 형태의 도구), 타겟 스테이션 (리바운더 스테이션과 같은 용도), 여러 가지 스트랩과 밴드 / 짐로프를 달  있는 파트들은 물론 바벨과 중량원판을 놓고 벤치 프레스와와 바벨 스쿼트를 할  있는 스쿼트 랙, 다양한 형태의 운동을 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 머신과 같은 기능의 듀얼 하이-로 스테이션까지 하나에 다 달려 있는 다용도 운동 기구였다.


원래는 여기에 샌드백을  수도 있었지만, 이미 격투기 수련 공간에 샌드백이 많이 달려 있기에 그 옵션은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

민재는 이 모션 케이지 하나와 다른 소도구들만 있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운동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외의 머신들은 들여 놓지 않았다. 이것들 외에  있는 거라야 벤치 몇 개와 스텝박스, 큼지막한 짐볼, 트레드밀 (러닝머신), 스텝밀 (계단 오르기 머신) 정도였다.

“여기 정말 넓어서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전 오빠가 나만의 헬스장이라고 해서 다른 헬스장처럼 운동기구들이 빼곡히 놓여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넓으니까 저 아이돌 할  자주 갔던 연습실  기분이에요!”



“나만의 헬스장이니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을 위한 도구들만 가져다 놓았어요. 이 공간을 만들며 생각해보니까 헬스장에 있는 머신들은 별로 필요 없을  같더라구요. 아무튼 아이도 여기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앞에 전신거울도 있고 핸드폰하고 블루투스로 연결할  있는 스피커도 있으니까, 여기서 음악 틀어놓고 댄스 연습해도 좋을 거예요.”

“정말요? 저 그럼 여기 좀만 더 둘러보고 오랜만에 춤 연습 할래요!”



아이는 들뜬 표정으로 안에 여러 운동 도구들을 하나씩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스텝밀 머신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빠, 이거 계단 달린 거는 무슨 운동 기구에요?”


“스텝밀이라고, 말 그대로 계단 오르는 운동 하는 기구에요. 유산소 운동, 하체 근력 운동하는 데 이만한 운동기구도 없죠. 제가 다른 머신들은 별로 들여놓고 싶지 않았지만, 이 스텝밀 만큼은 꼭 가지고 싶어 했어요.”




“이거 그럼, 러닝머신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서 운동을 하는 건가요? 저 한  해봐도 되요?”

“네, 작동 방법 알려줄게요. 위로 올라가 봐요.”

민재는 아이에게 머신 작동 요령을 간단히 알려 주었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하지 말고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면서 해봐요. 심심하면 이 앞에 핸드폰 거치하고 유튜브 영상 보면서 해도 되구요, 아니면 옆에 러닝머신 위에 있는 테블릿도 인터넷 연결 되어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와서 보면서 운동해도 되요.”




“네, 고마워요, 오빠. 그럼 한  해볼게요.”

아이는 신난 표정으로 스텝밀을 작동시키고 계단 오르기 운동을 시작했다.



“와! 진짜 건물 계단 올라가는 것 같아요! 이거 많이 하면 허벅지살 많이 빠지겠죠?”


“하체에 근육이 생기면 신진대사량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살도 많이 빠지고 다른 부위들도 균형 잡힌 몸매로 발달할  있게 되죠. 스텝밀 많이 하면 여러 모로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될 거에요.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는 하지 말고, 조금 느린 속도로 15분에서 20분 정도만 하는  좋아요.”

아이가 스텝밀에서 계단 오르기를 하는 동안, 민재는 먼저 헬스장 안을 크게 원을 돌며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운동 전 워밍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달리기로 가볍게 몸에 열을  후 줄넘기를 잡아든 민재,


링벨을 3분, 휴식시간 30초로 세팅하고 줄넘기를 시작한다.



휘리릭, 휘리릭!

천천히 줄넘기를 하다가 2분 30초, 라운드의 마지막 30초를 남겨놓고 2단 뛰기를 하는 민재,


마지막 30초마다 스퍼트 (spurt, 끝판 힘내기, 막판 전력 질주)를 하는 것은 그가 무에타이를 처음 배울 때부터 해오던 습관이었다.



그렇게 3분 3라운드 줄넘기를 마친 민재는 그 자리에서 운동 전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기 전에는 관절과 가동부위, 근육들을 가볍게 돌리고 움직여 주는 동적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민재,



어느새 스텝밀에서 내려온 아이가 이런 민재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옆에서 함께 스트레칭을 따라하고 있었다.



“오빠, 몸 푸는  운동선수 같아 보여요. 오빠도 저에 운동 하셨던 거예요? 샌드백 달려 있는 거 보니까 이노우에 나오야 (2020년 12월 기준 20전 20승 17ko를 거두고 있는 일본 최고의 복싱 선수, 일본 현지에서는 매니 파퀴아오, 플로이드 메이웨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처럼 복싱 하신 거예요?”

“복싱이 아니라 무에타이 했어요.”



“무에타이면 키쿠복싱(킥복싱)?”




“뭐, 킥복싱이라고 해도 되긴 되는데....... 제가 한 건 무에타이예요.”

현재에 이르러 킥복싱과 무에타이는 거의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져 있는 상황이지만,



무에타이를 수련한 사람들은 여전히 다른 이들이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무술을 킥복싱이라고 부르면 살짝 언짢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킥복싱이 무에타이를 베껴 만든 무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재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렇다.

과거, ‘최배달’로 알려진 최영의의 극진가라데 제자들이 무사 수행을 하기위해 태국으로 가서 그의 스승 최영의가 그랬던 것처럼 무에타이 선수들에게 도전했는데,



대부분의 극진가라데 고수들이 현지 무에타이 선수들에게 무참하게 박살이 났던 것이다.


이 때 무에타이의 무서움을 실감한 어느 극진가라데 고수가 무에타이의 무릎, 팔굽 기술들과 복싱의 펀치 기술을 조합해 새로운 무술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 킥복싱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에타이 측에서 보면, 킥복싱은 자신들의 아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K-1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무에타이 선수들과 킥복싱 선수들이 한 대회에서 경기를 벌이는 일이 잦아지게 되면서  무술을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케이지에서 열리는 MMA 종합격투기와 달리  위에서 서서 싸우는 격투기를 모두 총칭해 ‘입식타격기’라 부르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에타이와 킥복싱을 같은 운동으로 알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민재의 마음속에는 무에타이는 무에타이지, 절대 킥복싱이라 부르면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곳 ‘나만의 헬스장’ 격투기 수련 공간에서 무에타이만 수련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까 이곳에 있는 장비들을 소개할  다들 추측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이곳에서 더미들을 가지고 레슬링이나 주짓수 훈련도 하고 있었고, 영춘권이나 절권도, 칼리 아르니스 기술들을 연습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민재가  무술들을 모두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수련한 무술은 태권도와 무에타이 정도, 나머지는 체육관을 찾아가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혼자서 수련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눈썰미가 대단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번 본 무술 동작들을 빠르게 캐치해서 그 원리까지 모두 파악할  있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유튜브 영상 등으로 무술 동작들을 한 번 보기만 해도 곧장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스스로 깨우치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천재적인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민재가 지금 딱히 운동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아니라서 이런 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그는 트레이너나 훈련파트너를 고용해 이  나만의 헬스장에서 함께 훈련을 하거나 스파링을 하곤 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인터넷 재능 마켓 사이트를 통해 연결이 되곤 하는데, 이곳을 통해 미트를 잡아주는 트레이너, 주짓수나 레슬링, 복싱이나 무에타이 스파링을 하는 훈련 파트너를 찾아 함께 꾸준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무에타이나 복싱 기술이야 원래 어렸을 때부터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해왔으니 어느 정도 숙달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번도 체육관을 찾아가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주짓수나 레슬링 기술마저도 함께 훈련하는 이 분야 고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솜씨를 뽐내곤 했다.



어떤 이는 그에게 동호인 대회 등에 출전해 보지 않겠냐고 강력히 권유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회 출전에 별로 관심이 없는 터라 이런 제의는 늘 거절하고 있었다.


“오빠, 그럼 저 무에타이 하는 거 보여주시면 안되요? 저 오빠가 하는 것 보고 싶어요!”

“하......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면 쑥스러워서 잘 못하는데...... 그럼 쉐도우 하는 것부터 샌드백 치는 것까지 원래 혼자 훈련할 때 하던  보여줄게요.”



민재는 몸을 모두 풀고 손에 핸드랩을 감으며 천천히 거울이 있는 곳 앞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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