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1차 사랑 전쟁 (2)
1차 사랑 전쟁 (2)
저녁이 되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10명의 여성 모델들이 피아X의 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 각종 주얼리들을 착용하고 파티에 초대된 VIP 들 앞에서 이를 보여주며 워킹을 하는 것으로 피아X의 VIP 파티가 시작되었다.
민재가 주욱 둘러보니 초대된 VIP 중에는 낯익은 정계, 재계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얼마 전 주주 총회에서 본 적 있는 모 기업 임원도 눈에 띄었고, 국회의원을 지낸 유명인 부부도 보였다. 주식계의 대부라 불리는 중년의 남자도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동행한 여자가 그보다 30살이나 더 어려보이는 것을 미루어보아, 정식 부인은 아니고 애인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이미 민재로부터 반지 선물을 받아서인지, 모델들에게 다가가 주얼리들을 구경하지 않고 민재와 함께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우와, 저 모델들 너무 날씬하고 예뻐요...... 진짜 부럽다.”
“아이도 날씬한데요, 뭘.”
“아니에요, 저 모델들에 비하면 난 돼지 같은데......?”
“하하하. 돼지 아니에요. 아이가 저 모델들만큼 마르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수백 배는 더 예뻐요.”
민재는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안아주며 볼에 살짝 키스를 해 주었다.
모델들이 쇼를 마치고 내려가고, 이번에는 민재도 TV에서 얼굴을 본 적 있는 유명 마술사가 들어와 여러 가지 마술을 보여주며 파티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아이도 그의 마술이 신기했던지, 사람들과 함께 마술이 펼쳐지는 무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흥미롭게 쇼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가 마술 구경에 빠져 있는 동안, 민재는 뒤편 테이블에 몸을 기대고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그 야쿠자들이 한국에 와서 아이를 찾아다닐 텐데...... 아무래도 경호원은 있어야 할 거 같아. 아파트에 경비가 있더라도 그들만으로는 부족할 테니까.’
고민 어린 표정으로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강민재 고객님 맞으시지요?”
민재가 돌아보니 포멀한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그에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는 오늘 파티를 개최한 피아X 한국 지사장 리처드 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저희 파티에 참석해주시고 주얼리도 구매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처드 김은 민재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명함 한 장으로 건네주었다.
“멋진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여자 친구에게 좋은 선물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별 말씀을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런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고객님께서 어떤 사업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부동산과 주식, 기타 여러 가지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어쩐지 고객님은 자수성가한 20대 청년에게서 느낄 수 있는 프레쉬한 에너지가 물씬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된 거랍니다.”
리처드 김과 민재는 함께 샴페인을 마시며 주얼리에 대해, 그리고 사업과 투자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민재가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다른 하이엔드 브랜드 (명품) 이벤트에 몇 번 가봤지만, 이곳은 다른 곳보다 가드들이 상당히 많군요.”
“아무래도 워낙 고가의 스톡들이 많다보니 보안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요. 혹시 가드들 때문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가드들은 모두 피아X에 소속된 가드들인가요?”
“아니랍니다. 저희 모 회사라 할 수 있는 리치XX 그룹 보안 담당자가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일반 보안업체들을 컨택해 가드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지요. 여기서 일하는 서버들처럼 이벤트 때마다 고용하는 일용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민재는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샴페인을 들이켰다.
“고객님, 혹시 가드나 경호원이 필요하셔서 찾으시던 중인가요?”
“네, 저는 아니고, 누군가의 신변보호를 맡길 만한 경호원이 필요한 중이거든요.”
“일반적인 에스코트 (수행)가 아니라 정말 위험한 상황에서 보호가 필요하신 건가요?”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리처드 김은 고개를 흔들며 조용한 말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경호원들을 고용하셔도 별 효과는 없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저도 여러 행사를 준비하며 현장 관계자들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눠 봤는데, 우리나라 경호원들 중 실제 신변보호 자격을 갖추었거나 대단한 실력을 지닌 무술 고수이거나 한 사람들은 상당히 소수라 하더군요. 대부분 소싯적 운동 좀 하고 덩치가 있는 사람들일 뿐이지, 실제 상황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대처를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모두 프리랜서,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서, 클라이언트 (의뢰인)를 보호하다 다치게 되더라도 정규직 직장인들처럼 4대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싸우다가 상대를 다치게 만들면 폭행 등 법적 소송에 휘말려 골치 아파지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그래서 신변보호가 필요할 때에는 차라리 경찰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나을 거 같습니다만.”
경호원들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던 민재에게 그의 말은 충격적으로 와 닿았다.
‘그럼 경호원을 고용해도, 야쿠자 놈들을 막지 못할 수도 있다고?’
민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술사의 쇼가 끝나고, 이어서 재즈 가수의 공연이 이어졌다.
아이는 여전히 무대 앞에서 계속 쇼를 보는데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리처드 김이 떠난 뒤, 민재는 아이를 어떻게 보호할 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 맞아! 이런 문제라면 그 분께 상담하는 게 좋겠어!’
복잡한 문제에 해결책을 찾은 듯, 그의 가슴 속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재즈 가수의 공연과 함께 파티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기 시작하고, 파티에 참여한 VIP 고객들이 파트너와 함께 음악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빠, 우리도 나가서 같이 춤 춰요! 어서요!”
아이가 활짝 웃는 얼굴로 민재에게로 달려와 그의 손을 잡고 무대 쪽으로 이끌었다.
민재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무대 앞으로 나갔다.
* * *
다음날, 아이가 종강한 후 첫 번째 주말이었다.
민재는 오늘 만큼은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바로 그가 어릴 적부터 수련했던 무에타이 체육관의 관장, 강운예를 만나러 간 것이다.
강운예 관장은 그를 어렸을 때부터 지도해 온 무에타이 스승이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처럼 돌봐 준 은인이기도 했다.
같은 강씨인데다가 얼굴도 약간 닮은 데가 많아, 어려서 대회에 나갔을 때는 민재를 보고 강운예 관장의 아들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민재가 무에타이를 계속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제의 정을 이어나가고 있는 두 사람.
민재는 부자가 된 이후부터 강운예 관장의 체육관을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있었고, 심지어 강운예 관장이 개최하는 중소 규모의 격투기 대회에도 후원자로 나서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민재는 매년 대학교 교수님들, 중고등학교 담임선생님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있었는데, 강운예 관장을 위한 식사 자리 역시 매년 마련해 오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보통 연말에 그런 자리를 마련했기에, 민재의 초대를 받은 강운예 관장도 이 녀석이 뭔가 할 말이 있구나, 하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민재가 강운예 관장과 만난 것은 토요일 점심, 강남에 있는 S한정식 집이었다.
“관장님,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오늘 제가 대리 불러드릴 테니 한 잔 받으시지요.”
음식상이 나오고, 민재가 전통주를 관장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설마 점심부터 술 엄청 먹이려는 건 아니지? 요새 와이프가 술 좀 적게 마시라고 구박해서 조심하는 중이거든.”
민재는 공손히 강운예 관장과 잔을 부딪친 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술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민재야.”
“네, 관장님.”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강운예 관장은 이미 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 인자한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나한테 부탁할게 있겠냐만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속 시원히 해봐. 내가 들어 줄 테니.”
민재는 그에게 아이를 쫓아다니는 야쿠자 문제에 대해 솔직히 모두 털어놓았다.
“......일본에서 한국까지 찾아왔다면 보통 독한 놈들이 아니겠구나. 그런 놈들이라면 납치를 하든 해코지를 하든 뭔가 일을 칠게 분명할거 같고.”
“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어학당까지 쫓아가 그 난리를 쳤다면 당연한 아니겠니?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좋겠니?”
“사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관장님께 여쭙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내 생각을 듣고 싶다고?”
“네.”
“허허허, 내 스타일 알지 않니? 결혼 전에 내 와이프 건드리려고 한 녀석들, 내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너도 들어서 알 텐데?”
“아...... 저는 그 얘기에 대해 정확히 들은 게 없습니다, 관장님......”
강운예 관장의 와이프는 그보다 15살 연하.
맞다. 이 사람도 결혼할 때 도둑놈 소리 엄청 들었다.
두 사람이 결혼 전 한창 연애하고 있을 때 이야기인데,
강운예 관장의 와이프 역시 대단한 미인이라 동네에 그녀를 마음에 품고 따라다니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나쁜 놈 몇 놈이 그녀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강운예 관장이 달려와 그 놈들 모두를 거의 죽기 직전 상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는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를 돕기 위해 변호사 일을 하는 그의 체육관 회원이 경찰서를 찾아갔었다.
그 때, 강운예 관장이 체육관을 열기 전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모두 밝혀지게 되었다.
그는 체육관을 하기 전, 국군정보사, 흔히 HID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현재는 명칭이 바뀌었다.)라 불리는 특수부대에서 10년간 복무한 적 있는 인간 병기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주변인들은 물론 체육관 회원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 사람이 아직도 국가정보원에서 관리를 받고 있고, 중국 등 일부 나라에서는 아예 입국을 불허당할 정도로 과거 엄청난 일을 많이 하고 다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의 영화 ‘아저씨’ 에 나오는 차태식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실제로 강운예 관장은 무에타이 뿐 아니라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차태식처럼 칼리아르니스, 크라브마가 같은 무술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는데, 가끔 회원들에게도 그런 기술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민재가 나만의 헬스장에 목인장을 설치하고 지금도 혼자서 칼리 아르니스, 영춘권 동작들을 수련하는 건 이 때 그에게 받은 영향이 때문이었다.
당시 회원들은 그에게 새로운 기술들을 배우며 ‘아, 우리 관장님이 여러 무술을 알고 계신 거구나.’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칼리아르니스와 크라브마가 기술 모두 국군정보사에 있을 때부터 그가 해왔던 무술들이었다는 것.
심지어 군정보사 요원들은 물론 일부 특수부대 군인들에게도 그 무술들을 직접 교육하는 교관 역할도 한 적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외모하며 평상시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 평범한 동네 아저씨인데, 쉽게 보고 잘 못 건드렸다가는 정말 좆 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그 놈들이 경찰에 체포될 수 있게 하는 거겠지.”
“그러려면 그 야쿠자 녀석들이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던지 무슨 짓을 저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놈들이 아무 짓도 안했는데 경찰들이 먼저 나서서 체포할 리도 없구요. 전 되도록 아이가 알기 전에 그 놈들을 아무 짓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습니다.”
“그럼 방법은 이것뿐이겠군. 1번, 그 야쿠자 놈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 2번, 찾아간다. 3번, 깨끗이 모가지를 따던지, 다시는 네 여자 친구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 너 혹시, 내가 1번, 2번, 3번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니?”
“솔직히...... 그렇습니다.”
강운예 관장은 웃는 얼굴로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민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히 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술잔을 받은 강운예 관장이 민재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두 사람이 한잔 주욱 들이킨 후,
강운예 관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데리고 있던 애들 중에 최근에 전역한 애들이 있어. 일단 내일 너네 집으로 보낼 테니까 네 여자 친구 신변보호는 걔네들한테 맡겨.”
“네, 알겠습니다, 관장님.”
“그리고 그 야쿠자 놈에 대한 자료 전부다 나한테 보내고. 참, 그 놈들이 어학당에서 행패부린 거, 경찰도 사건 접수했다고 했지?”
“네, 맞습니다.”
“의외로 찾기 쉬울 수도 있겠네. 그럼 일 진행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마지막 3번, 네가 원하는 게 그 놈들을 깨끗하게 모가지를 따는 거냐, 아니면 다시는 네 여자 친구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거냐?”
민재가 몸을 기울여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강운예 관장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아주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