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아이의 한국 여행 - 유키나짱과 전주로 (2)
아이의 한국 여행 - 유키나짱과 전주로 (2)
세 사람이 전주 R 호텔에 도착한건 오후 3시가 조금 안되었을 때였다.
그들은 로비에서 키를 받아 각자의 객실로 올라갔다.
민재가 예약한 방은 프리미어 스위트.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형태였는데, 지금까지 가본 호텔 중 ‘스위트 룸 기준으로는’ 다소 작은 느낌이었다.
아이는 금세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얇고 화사한 하얀색 원피스 위에 민트색 가디건을 걸치고 웨이브 진 긴 머리도 뒤로 예쁘게 묶었다.
“오빠, 나 머리 묶은 거 어때요?”
아이의 머리 묶은 모습을 본 민재가 환하게 웃었다.
머릿결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목선과 어깨의 새하얀 살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민재는 그녀의 어깨를 안고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이는 뭘 해도 다 예뻐요.”
“정말요? 그럼 나 머리 묶은 모습도 좋아요?”
“네, 머리 묶어도 정말 예쁜데요?”
“아아, 욧카타 (다행이다.)......! 전 오빠가 저 머리 푼 모습만 좋아하는 줄 알아서 그동안 머리 안 묶었는데, 오늘 나갈 때 더울 거 같아서 오랜만에 머리 묶어 본 거거든요. 그래도 오빠가 좋다니 다행이에요!”
“종종 그렇게 머리 묶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오히려 단정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여요.”
아이는 민재와 손을 잡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유키나는 아직 짐 정리가 덜 끝났는지 아직 내려오지 않은 상황.
아이가 민재의 손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오늘은 어디 어디 갈 거예요?”
“자만 마을이라고 벽화로 유명한 곳을 가 볼 거구요, 그 다음에는 막걸리 골목에서 저녁 먹고, 남부 야시장이란 곳 둘러보고 오는 코스로 준비했어요.”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막걸리 골목? 막걸리면 한국 술? 그럼 거기는 술만 파는 곳이에요?”
“하하, 아니에요. 막걸리 한 주전자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술안주들을 푸짐하게 내놓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 곳이래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라구요.......? 오오....... 거기 빨리 가보고 싶어요~!”
민재와 아이가 신나게 전주 막걸리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내 유키나가 로비로 내려왔다.
그녀는 아까 입고 있었던 청반바지와 파란색 끈나시, 여성용 밀짚모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래도 밖에 나갈 때 가슴골을 내보이는 건 민망했던지, 끈나시 안에 하얀색 티셔츠를 덧입은 상태였다.
“형부, 오네짱, 많이 기다렸죠?”
내려오자마자 민재 옆으로 달려와 팔짱을 끼는 유키나,
아이가 그런 여동생의 허리를 끌고 자기 쪽을 당겨 오고는, 강제로 그녀의 팔짱을 껴버린다.
“너, 오빠하고 팔짱 금지야.”
“왜~?! 형부한테 팔짱도 못 껴?”
“응, 내 허락 없이는 안 돼. 그리고 아까 우리 사진 함부로 찍을라고 해서 더 안 돼.”
“흥! 그냥 팔짱만 끼는 건데 뭐가 어떻다고 이런데?”
“그렇게 팔짱 끼고 싶으면 너도 얼른 남친 만들어. 아니면 나랑 계속 팔짱 끼고 있던가.”
아이는 유키나의 팔짱을 꼭 잡고 민재 옆으로 가는 걸 철저하게 차단해 버렸다.
* * *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자만 벽화마을에 도착했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막걸리집에서 술을 먹고 갈 거라 아예 차를 호텔에 놔두고 온 것.
자만 벽화마을은 그 이름 그대로 작고 허름한 옛날 집 벽과 담장에 아름다운 벽화를 가득 그려 놓은 곳이었다.
“여기 쿵푸팬더도 있네요! 저쪽엔 도라에몽하고 토토로 그림도 있고! 친숙한 그림들이 많은 거 같아요!”
유키나의 팔짱을 꼭 기고 다니던 아이는 벽화가 나올 때마다 유키나와 함께 그림 앞으로 달려가 사진 찍기에 바빴다. 자매의 사진은 민재가 찍어주고, 민재와 아이의 사진은 유키나가 찍어주고.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즐겁게 벽화마을 길을 따라 산책했다.
“여기는 부산에서 봤던 감천마을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물론 여기가 감천마을보다 조금 작긴 하지만, 그래도 건물 모습이나 벽화들 있는 거는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원래 이런 벽화로 가장 유명했던 마을은 서울에 있는 이화마을이었데요. 예전에 TV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에서 이승기가 이화마을에 있는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방송된 후부터 이화 마을을 찾는 사람이 엄청 늘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러면서 전국에 이화마을 같은 벽화를 그려 놓은 곳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고 하네요. 이곳도 그중 하나라고 해요.”
“아레? 저 그거 예전에 본 거 같아요! 천사 날개가 그려진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 찍었던 거기 말이죠?”
“네, 맞아요. 1박 2일 이후로 그와 같은 천사 날개 그림은 벽화가 그려지는 곳이라면 꼭 들어가야 하는 필수템이 되어 버리더라구요.”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한국을 나쁘게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가끔 한국의 광광지는 어딜 가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다른 곳을 따라하려거나 비슷하게 만들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있는 건 좋지만, 관광지에 보고 즐길 만한 것보다 먹을 게 더 많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물론 먹거리도 좋은 관광 아이템 중 하나겠지만,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유한 먹거리들은 그리 많지 않은 거 같아요. 밝고 활기차고 재미있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특색이 없다고나 할까요?”
“맞아요. 아무래도 자신만의 색을 갖기 위해 모험을 하기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보편적이고 안전한 모습을 갖추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먹거리도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새로운 메뉴보다 이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찾던 음식을 내놓는 것이 더 잘 팔릴 가능성이 높다보니, 후자 쪽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지요.”
민재가 손으로 전주 시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전주는 먹거리에서만큼은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먹거리 여행에 들어갈 텐데, 한 번 기대해 봐요, 우리.”
아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전주에 맛있는 집들 많이 찾아다녀보고, 진짜 맛있는 제 찾으면 나중에 유튜브 찍으러 꼭 다시 와요!”
“응? 그럼 아이, 이제 유튜버 하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네, 오빠가 말한 거 생각해 봤는데요, 나도 이제 한국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오빠한테만 신세지지 않고 저도 돈을 계속 벌고 싶어요. 덕환이 오빠 유튜브에 출연하는 것도 계속 할 거지만은 저도 제 채널 만들어서 활동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랬구나, 그럼 내가 덕환이한테 아이 유튜브 채널 만드는 거에 도움 좀 달라고 말해 놓을게요. 아이는 어떤 컨텐츠를 할 생각이에요?”
“일상 블로그? 제가 요리 만드는 거랑 맛집 다니는 거랑 운동하고 K-POP 커버댄스 위주로 하고 싶어요.”
민재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튜버를 하면 연예 활동 다시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럼 나랑 사귀는 거, 남자친구 있다는 거 비밀로 할 거예요?”
아이는 고개를 크게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저 남자친구 있다고, 오빠랑 사귀고 있다고 다 밝히고 유튜브 할 거예요! 물론 유튜브 타이틀에 남친 있는 여자, 곧 결혼할 여자, 이렇게 써놓지는 않겠지만 누가 물어보면 언제든 사랑하는 남친도 있고 곧 결혼도 할 거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유튜브 할 거예요!”
“하하,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요?”
“가끔 인터넷 방송 보니까 그렇게 솔직하게 오픈하고 방송하는 분들도 상당히 많더라구요. 저도 인기 때문에 남친 없는 척 숨기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두 다 말하면서 유튜브 할 거예요!”
아이는 민재의 손을 꼭 잡고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어깨를 기대었다.
한 시간쯤 걸으니 금방 마을을 한 바퀴 다 돌게 되었다.
유키나가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민재에게 물었다.
“형부! 저 밑에 한국 옛날 집들이 보여요! 저기가 전주 한옥 마을이에요?”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기는 내일 갈 거예요.”
“와, 그럼 한복 입는 건 내일 할 수 있겠네요! 그럼 우리 이제 어디 가요?”
“이제 저녁 먹고 술 마시러 가요. 한국 전통술 막거리하고, 전통 안주들 있는 곳으로 가 볼 거예요.”
세 사람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막걸리 골목으로 출발 했다.
* * *
택시를 타고 전주 삼천동 막걸리 골목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민재는 택시 기사님이 추천해 준 막걸리집 ㅇ식당으로 자매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식당 밖은 물론 내부에도 맛집으로 방송에 나왔던 이력들이 자랑처럼 벽에 걸려 있었고,
하얀 벽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이들의 낙서와 사인, 방명록들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조금 이른 저녁이었는데도 식당 안에는 손님들이 제법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민재와 아이, 유키나 세 사람도 얼른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아 가족 한상차림과 맑은 막걸리를 주문했다.
“오빠, 맑은 막걸리는 뭐예요?”
“원래 막걸리는 쌀로 빚은 술이라 침전물이 있어서 색이 탁한 우유빛이거든요? 그런데 맑은 막걸리는 그 침전물들을 모두 걸러서 담아낸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원래 막걸리보다 색이 맑아진 거죠. 또 일반 막걸리보다 다음 날 숙취도 없데요.”
“어머, 그럼 막걸리가 원래 숙취가 심한 술이에요?”
“다들 그렇게 말하기는 하는데, 내가 대학 다닐 때나 군대에 있을 때 막걸리 마셨을 때에는 숙취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야기를 듣던 유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 나 그거 얘기 들은 거 있어! 한국 남자 군대 얘기! 한국 남자들은 모두 2년 가까이 군대 가서 기숙사 같은 데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한다면서요? 군대 가면 술도 못 먹고 쉬는 것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던데. 그런데 군대에서도 막걸리를 먹을 수 있어요?”
민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니구요. 군대에서 훈련을 하게 되면 행군이라고 해서, 늘 먼 거리를 걸어서 부대로 돌아오는 훈련을 해요. 행군이 여러 가지 훈련들 중에 가장 힘든 훈련인데요, 짧게는 20km, 길면 7, 80km 까지 걷는 연습을 하게 되죠. 그렇게 몇 시간을 힘들게 걷고 돌아오면 부대 간부들이 막걸리하고 두부김치를 만들어서 행군한 사람들 고생했다고 그걸 먹여요. 그래서 그 때 막걸리를 두세 잔 정도 먹게 되죠. 그 때 먹었던 두부 김치랑 막걸리는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맛있게 드셨다면서, 저하고는 한 번도 막걸리랑 두부김치 같이 안 드셨잖아요?”
“흠, 행군 마치고 부대 돌아와 먹을 때만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는 거지, 그 막걸리랑 두부김치가 특별하게 맛있는 건 아니거든요. 혹시 도로묵이라는 생선 알아요? 옛날에 어떤 임금이 전쟁이 나서 정신없이 피난을 먹을 게 다 떨어졌는데, 어떤 어민이 묵이라는 생선을 잡아서 임금에게 진생을 했데요. 어민이 바친 생선을 먹은 임금이 그걸 먹어보고 너무 맛있으니까 신하들한테 이 생선 이름이 뭐냐고 물었죠. 그래서 신하들이 묵, 이라고 이름을 가르쳐 주니까 이렇게 맛있는 생선에게 붙여진 이름치고는 너무 초라하다고, 이제부터 은어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라 했데요.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임금이 궁궐로 돌아왔을 때 피난 가며 먹었던 은어가 생각나 수라상에 올리라 직접 명을 내렸는데, 그 은어를 다시 먹어보니 다른 생선들에 비해 맛도 별로 가시도 많이 먹기도 불편했데요. 피난 가던 때는 하도 사정이 곤궁하고 배가 고프다보니 맛있게 느껴졌던 거지만, 안정을 되찾으니 실제로 별 맛이 없던 생선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임금은 은어의 이름을 도로 묵, 이라 부르게 하라고 명을 했데요. 그래서 도로묵이라는 말이 생겨난 거죠. 나한테는 막걸리랑 두부김치가 딱 도로묵 같은 존재에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금방 풍성한 음식들이 테이블에 차려지기 시작했다.
단호박에 마요네즈 샐러드, 찐 새우에 잡채, 해파리 냉채와 고등어 조림, 오징어 숙회와 도토리묵, 부침개 지지미와 편육, 매운 탕과 오이 당근 등 야채, 그리고 민재가 말한 두부김치까지......
테이블은 금세 음식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