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그녀의 음모 (1)
그녀의 음모 (1)
낮 동안 잠실에 있는 L쇼핑몰에서 쇼핑을 하고 온 나루사와 자매,
저녁이 되자 골프와 운동 레슨을 받으러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이제 레슨은 민재와 아이의 것을 다 합쳐 모두 10회 남아 있는 상황, 민재는 레슨을 후딱 종료하고 혜인과의 계약을 끝내고 싶었다.
그 때 아이의 레깅스와 운동복을 빌려 입고 거실로 나오는 유키나를 보고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유키나?”
“네, 형부!”
“유키나는 일본에서 운동 배우고 있는 거 있어요?”
“아뇨, 없어요. 배우고 싶긴 한데 학교 주변에 딱히 할 만한 것도 없구요.”
“그럼 한국에 있는 동안 언니와 함께 골프도 배우고 운동도 배워볼래요?”
그의 제안에 유키나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네, 좋아요! 혼자서 러닝머신 뛰는 것보다 오네짱이랑 같이 운동 배우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물론 그 센세, 온나 헨타이 (여자 변태) 같아 조금 싫기는 하지만.”
혜인이 아이와 야한 얘기 나누는 것 때문에 그녀가 꺼려지는 모양이다.
하긴, 그녀가 꺼려지는 건 민재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같이 운동하다가 강사님이 언니나 유키나에게 야한 말, 이상한 말하면 잘 듣고 얘기해줘요. 내가 따져 줄 테니.”
“네, 와카리마시타 (알겠습니다)~!”
아이도 남은 횟수의 절반을 유키나에게 양도하는 것에 동의를 했다. 민재가 혜인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녀도 이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와 유키나가 운동을 하기 위해 대치동 그의 건물로 나간 지 얼마 후,
민재의 핸드폰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전부터 등촌동 재개발 구역에서 알고 지내던 건물주이자 이기봉과 재개발 조합장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인물, 조광수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 사장님도 잘 지내고 계시오? 등촌동 건물 매각하고 다른 건물 찾는 일은 잘 되 가오?]
“지금 매물로 나온 것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며칠 후 건물 몇 군데를 직접 실사하러 갈 예정이구요.”
[그렇구려. 마침 내가 송파 장지 쪽에 매물 하나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강 사장 생각이 나서 전화 걸었어. 혹시 지금 시간 좀 되나?]
이 사람이 만나자는 걸 보니 둘 중 하나겠군, 투자 아니면 조합 관련 이야기.
이런 얘기는 대치동 건물에서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지금 그곳에 아이, 유키나는 물론 혜인까지 있으니. 게다가 혜인은 이기봉의 딸이기도 하니 그 곳에서 그와 만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민재는 삼성역 인근 PH 호텔 라운지에서 잠시 후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 * *
삼성동 A아파트에서 지하철 2호선 PH호텔까지는 걸어서 10분, 15분 정도.
가까운 거리니 만큼 차를 가져가지 않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어이구, 강 사장~!”
라운지에 도착해보니 이미 조광수가 먼저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재가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강 사장 얼굴이 조금 탔네? 여름에 어디 많이 놀러 다녔나봐?”
“여름이다 보니 수영장도 다니고, 부산이랑 전주에 다녀왔습니다.”
“여름에 부산 좋지! 그런데 외국은 안 나가고?”
“외국은 이제 겨울쯤에 가려구요.”
주문한 차가 서빙 되고, 조광수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민재가 예상한대로, 그가 꺼낸 이야기는 등촌동 재개발 구역 조합장 재신임 투표에 대한 것이었다.
“......이기봉이 고용했던 용역 회사 대표가 단가 문제로 사이가 틀어져서 떨어져 나갔어. 그러면서 나한테 와서 이기봉에 대한 이야기들을 몇 가지 해주었는데 말이야, 강 사장이 토스트집 이주 문제로 이기봉하고 말다툼을 했을 때 그 사람 골프 선수 딸내미 스폰서 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던데...... 이번 재개발 사업 후보 업체인 D 그룹이 이기봉 딸내미 후원한 건 우리도 나중에 인터넷 기사 보고 알게 되긴 했지만, 강 사장은 어떻게 그 사실을 먼저 알았던 거야?”
민재는 감출 것 없이 자신의 건물을 매각하러 조합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보고 들었던 사실을 조광수에게 모두 털어 놓았다.
“......그 때 비서가 조합장에게 D 그룹 담장자 한테서 연락 왔다는 말을 했을 때, 이기봉이 제 앞에서 그 놈들이 제일 먼저 꼬랑지 살살 흔들 줄 알았지! 라고 기뻐하면서 말했었죠. 그 말은, 다른 재개발 사업 후보 업체들에게도 동일하게 자신의 딸에게 후원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조광수가 무릎을 탁 쳤다.
“역시! 자기 딸 후원해주면 나중 재개발 사업자 선정할 때 내가 뒤에서 잘 봐 주겠다면서 그렇게 찔러봤겠지! 이러면서 딸 스폰서 명목으로 중간에서 낼름 돈 받아먹겠다는 꿍꿍이였을 거고! 이 사실 하나면 이기봉 그 놈 재신임은 끝난 일이야! 하하하!”
“제 말이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일단 강 사장이 해준 말을 토대로 조합원들에게 자료 만들어서 뿌릴 거야. 조합원들도 자리를 이용해서 착복이나 일삼으려는 조합장을 절대 신임하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 문제가 되면 강 사장이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줘. 그 때 내가 교통비하고 식비도 넉넉하게 줄 테니 꼭 시간 내주고.”
조광수는 제대로 한 건 잡았다는 듯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는 민재와 마신 찻값을 자신이 모두 계산하는 한편,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그를 코엑스 옆 H백화점으로 끌고 가 한우 선물 세트, 굴비 선물 세트를 사서 손에 들려주고 나서야 그를 보내주었다.
‘저 사람도 재개발 조합장 자리에 엄청 탐을 내고 있는 모양이군. 이렇게 이기봉 밀어내고 조합장 되고 나면 조합원들 돈 해쳐먹지나 말아야 할 텐테...... 아무튼 한우와 굴비 세트 가져가면 아이랑 유키나가 엄청 좋아하겠군.’
그는 양손에 선물 세트를 하나씩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섰다.
* * *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와 유키나는 민재가 받아 온 한우와 굴비 세트를 보고 엄청 흥분한 얼굴로 좋아했다.
“오늘 저녁은 한우 투뿔(투 플러스) 구워 먹어요!”
“한국 소고기 좋아요!”
아이는 곧장 식탁에 저녁상을 차리고, 창고에서 고기판을 꺼내와 한우를 굽기 시작했다.
잘 구워진 한우 채끝살 한 점을 기름장에 찍어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짓는 유키나,
“오이시 (맛있어)~!”
소고기 한 입에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오늘 가서 운동 배우니까 좋았어요?”
민재의 물음에 유키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골프도 되게 재미있었고, 운동도 너무 좋았어요! 오늘 배운 거 일본 가서도 열심히 하면 되게 좋을 거 같아요! 다이어트에 엄청 도움이 될 거 같아!”
“다행이네요. 참, 강사님이 잔여 횟수 유키나에게 양도한거 뭐라고 안 해요?”
하이라이트 앞에서 분홍 앞치마를 입고 고기를 굽던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양도하는 건 뭐라고 안 했는데, 이제 레슨 마치고 얼마간 운동 못할 거 같다고 하니까 확실히 혜인 언니도 많이 아쉬워하고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나 어학당도 다니고 유튜브 방송 일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돼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 달라고 잘 말해놨어요.”
“잘 했어요. 강사님도 지난 번 성적이 좋아서 여러 대회에서 초청 받았다면서요?”
“네, 맞아요.”
“그럼 본인도 앞으로 훈련에 더 집중해야 하겠군요.”
“네, 언니도 그런 말 하긴 했어요. 그런데 오빠, 혜인 언니가 레슨이 진행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 건물 와서 운동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던데, 그렇게 해도 좋을까요?”
민재가 살짝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별로...... 나중에 레슨 다시 시작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강사님이 찾아오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만약 아이가 얘기하기 힘들면 내가 강사님께 대신 얘기할게요.”
“아니에요, 오빠. 언니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민재의 말에 아이는 살짝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혜인과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보니, 민재의 이런 처사가 조금 못마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아무런 불평불만을 내색하지 않고 그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고 있었다.
아이돌 일을 할 때 야쿠자들의 부당한 한 대우와 요구에 반발해 잠적까지 했던 그녀였다. 만일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한 처사가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녀는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그만큼 민재를 믿고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로서의 혜인과의 관계도 중요했지만,
자신의 평생 연인이 될 민재와의 관계가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민재도 모를 리 없었다.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강사님이 계속 내 건물에 드나드는 걸 허락할 수 없어. 그녀가 내게 했던 말 때문에라도 말이야. 레슨 끝나는 대로 10층 출입문 비밀번호도 바꾸는 게 좋겠군.’
민재는 저녁 먹고 유키나가 호텔로 돌아간 후, 오늘 밤 그녀를 꼭 안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유키나는 이번 금요일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 역시 수강 신청 등 개강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민재는 주중에 나루사와 자매를 데리고 광진구에 있는 W호텔 수영장에 다녀왔다.
수영복을 가지고 오지 않은 유키나가 아이의 비키니를 빌려 입고 갔는데, 역시나 두 사람의 사이즈가 얼추 맞았다.
유키나도 언니 못지않은 글래머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W호텔에서 마지막 여름 물놀이를 즐기고 장충동에 있는 S면제점에서의 부모님 선물까지 잔뜩 산 (그 중에는 민재와 아이가 산 선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음) 유키나는 민재와 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형부, 한국 와서 너무 좋았어요. 내년에는 유학이나 교환 학생 돼서 꼭 다시 한국으로 올게요!”
“겨울 방학에도 놀러 와요. 한국에 아직 보여줄 데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유키나는 언니를 꼭 끌어안으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오네짱, 아리가또. 너무 고마웠어. 그동안 내가 못된 짓 못된 말 많이 해도 모두 이해해준 것도 너무 고맙고, 나 아껴준 것도 너무 고맙고. 나 오네짱 동생이란 거 너무 좋아.”
“나도 유키나짱이 내 동생이어서 너무 좋아! 유키나짱, 고국 돌아가서도 건강해야 해!”
“응, 오네짱! 일본 도착하면 연락할게!”
유키나는 출국 게이트 앞에서 한참 동안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 * *
이제 개강 기간이 되고, 아이도 다시 어학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동안 그녀는 민재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게 되었고, 이제는 그녀의 전용 차량이 되어버린 ‘라리’ (민재의 붉은색 페라리 F8 트리뷰토)를 등하교 때 이용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학당에 간 사이, 민재는 서재에 앉아 인터넷으로 마곡과 은평 등 새로운 곳에 건물을 매입할 곳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경제 뉴스 포탈에 등촌동 재개발 구역 관련 뉴스가 조그마하게 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등촌동 재개발 조합장 이기봉 씨 재신임 실패, 조만간 새 조합장 선출 선거 열기로...... 전 조합장 이기봉 씨, 재개발 사업 후보 업체에 골프 선수 딸의 후원을 요구하기도...... 결국 이렇게 다 드러난 모양이군.’
민재는 이기봉에 대한 뉴스 외에도 혜인에 대한 뉴스도 있는지 더 찾아보기로 했다.
역시나, 이번 사건이 불거지면서 D 그룹이 혜인에 대한 스폰서 후원을 철회하였으며, 몇몇 대회사 측에서도 그녀에게 했던 대회 초청을 반려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여럿 검색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혜인은 프로 선수로서의 이미지에 많은 손상을 입은 듯 했다. 뉴스 포털에서도 검색되었던 그녀의 사진들이 거의 삭제되었고, 그동안 추진되어오던 광고제의 및 대기업 후원 제의들 모두 끊겼다는 뉴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비의 욕심이 딸의 인생까지 망치는군. 돈 욕심에 스폰 제의만 안했으면 딸도 골프 선수로 어느 정도 잘 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은 일일 것이다.
민재는 이제 그들에 대한 관심을 모두 끄기로 하고, 인터넷을 통해 찾은 건물을 직접 보기 위해 집을 나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