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그녀의 음모 (3)
그녀의 음모 (3)
아이가 귀가한 건 밤 11시가 조금 안 되었을 때였다.
“다녀왔습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그녀는 발그레 해진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재미있게 놀다 왔어요?”
민재도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물론 속마음은 살짝 부글부글 거리는 중이었지만.
“네, 재미있었어요.”
싱긋 웃어 보이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싱 룸으로 향하는 아이,
그녀의 말에 못내 기분이 상했다.
물론 재미있게 놀다 왔냐는 물음에 재미있었다고 직접적으로 대답한 것이긴 했지만,
지금 재미있게 놀다 왔느냐, 하는 질문의 취지는 ‘어떻게’ 가 아니라 ‘누구와’ 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가을이 되고 더위도 한풀 꺾였다. 에어컨은 켜지 않았고, 집에서 입는 옷도 조금은 도톰해졌다.
항상 돌핀 팬츠에 티셔츠, 아니면 민재가 준 빨간색 마이클 조던 유니폼을 원피스처럼 입고 있던 아이는 오늘따라 긴 수면바지와 긴팔 잠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오빠, 저녁 드시고 설거지까지 다 해놓으셨네요?”
아이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민재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기대며 앉았다.
“매번 아이가 밥도 해주고 집안일도 다 해주는데, 설거지 정도는 내가 해야죠.”
“내가 다녀와서 해도 되는데, 고마워요!”
민재의 볼에 입을 맞추는 아이,
그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오늘은 강사님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냥 매번 하던 이야기요.”
“야한 이야기?”
“아니요~! 그냥 이런저런 수다 떨었어요, 흐흐흥~”
아이는 혜인이 출전하기로 했던 대회들이 몇 개 취소되어서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다며 골프 레슨이나 퍼스널 트레이닝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는 것과, 최근에 신사역 부근에 새로 오픈한 클럽이 물이 너무 좋다며 나중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혜인 외에도 다른 남자들과 동석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압구정 OOOO 레스토랑이 이태원 라운지처럼 헌팅이나 즉석에서 합석이 이루어지는 곳도 아니고, 그 외국인 남자들은 대체 뭐야?’
아무래도 그 남자들은 미리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거나 혜인이 부른 이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입을 때기 힘들었다.
그런 거 잘못 물어봤다가는 자기 여친 못 믿어서 뒷조사나 하고 다니는 소인배로 보일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지난번 이태원 때에도, 물론 민재가 몰래 따라갔기에 그날 큰일을 당할 뻔한 걸 모면할 수 있었던 거지만, 본인도 아이에게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 않는가?
이번 일에 대해서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는 아이를 믿지 못해 스토킹 하듯 뒤를 캐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강사님, 아니 그 혜인이란 여자는 도저히 못 믿겠어! 아무래도 며칠 아이를 지켜보는 게 좋겠군.’
민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살짝 찡그린 얼굴로 TV에서 나오는 영화를 지켜보았다.
마침 TV에서는 옛 한국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가 나오는 중이었다.
* * *
아이가 어학당으로 간 후,
민재는 카셰어링 서비스로 차를 대여해 어학당으로 몰래 쫓아갔다.
혹시 아이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 눈치챌까봐 아예 차도 빌려 가지고 나온 것이다.
민재는 드레스 룸 옷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버버X 브랜드의 인버네스 케이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망토가 달린 외투)에 디어스타커 (명탐정 셜록 홈즈의 모자로도 유명한 사냥용 모자)를 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까지 가리고 아이가 있는 Y대 어학당 강의실로 찾아갔다.
문밖에서 창문을 통해 강의실 안을 엿보는 민재,
아이는 강의실 뒤편 한적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양옆에 흑인과 백인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제법 가까이 말이다.
민재는 핸드폰 인스타 앱으로 들어가 어제 본 사진을 다시 찾아보았다.
‘뭐야, 사진 속에 남자들이랑 같은 녀석들인데? 그럼 저 녀석들, 아이 어학당 친구들이었나?’
1학기 종강 전 아이를 집에서부터 태워다 주고 다시 픽업도 해주며 어학당을 오가는 동안 그녀의 친구들을 몇 명 보게 되었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아이 주변에 저런 남자들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뭐지? 그럼 어제 식당에 저 남자들을 부른 게 혜인이 아니라 아이였나?’
민재는 미심쩍은 눈으로 계속 아이와 양쪽에 앉아 있는 흑인, 백인 남자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 * *
강의가 끝난 후,
아이는 아까 강의실에서 함께 앉아 있던 남자들과 함께 교내 매점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남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 사람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했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지낸 친구들인 것처럼 말이다.
금발에 모델처럼 큰 키, 스무 살 중반으로 보이는 제법 잘생긴 얼굴의 백인 남자는 미국 동부 부유한 집 태생의 엘리트인 듯 행동 하나 하나에서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손짓 하나하나에도 여유가 느껴졌다.
머리를 짧게 민 흑인 남자 역시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해 보였다.
둘 다 어느 정도 한국말을 하는 듯, 아이와 유쾌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민재는 먼발치서 그들을 계속 지켜보는 중이었다. 거리도 멀거니와 매점 주변에 다른 학생들도 많이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아이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눌 뿐, 남자들에게 별다른 액션은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어학당 친구인데, 내가 너무 과민 반응한 걸까? 어제 식사 자리도 그냥 친구 불러 같이 먹은 거고? 그런데...... 왜 그럼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지?’
이런 생각이 들 때 쯤,
남자들이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백인 남자가 작별의 인사로 포옹을 하자는 듯, 아이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니, 저 자식이......!’
민재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로 다가기로 했다.
아무리 서양에서는 친구 사이라면 남녀지간에도 포옹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 하지만,
여기는 엄연히 서양이 아니라 한국이다.
게다가 아이는 서양인도 아니고 동양인이고!
심지어 임자도 있는 몸이고!
그 임자가 바로 나고!
그런데 저것들이 대체 뭔데 감히 내 아이를 안으려고 해?!
민재가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을 때,
아이가 백인 남자를 향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포옹은 하지 말고 악수로 인사를 대체하자는 뜻,
그것을 본 민재는 곧바로 발걸음을 멈추고 학생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어......? 역시......?!’
백인 남자와 흑인 남자는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녀와 악수를 하고 어디론가 떠났다.
아이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는, 자기 가방을 챙겨 다음 강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다행이다...... 역시, 내가 안본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어!’
민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이가 걸어오고 있는 방향이 지금 민재가 서 있는 쪽!
민재는 아이가 지신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자, 다급히 창가를 보고 뒤돌아 서 버렸다.
그 때, 바로 자신의 뒤에서 어학당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이제 어디가?”
“아, 제나! 나 이제 다음 강의 들으려 가려구!”
“나 어제 너 유튜브 방송 봤어! 너 진짜 예쁘게 나오더라.”
“정말? 고마워!”
아이가 어학당 여자 친구들과 만난 모양이다.
그것도 하필 자신의 등 뒤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재잘거렸다.
그동안 민재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창밖만 보고 서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창가 쪽에 있는 사람....... 우리 오빠 옷이랑 똑 같은 거 입고 있네.......?”
“어디, 저기 저쪽? 키 큰 사람? 너네 오빠 저거 버버X 옷이랑 똑같은 거 있어?”
“응, 저 옷이 유행하는 것도 아니라서 저런 옷 입고 다니는 사람 많지 않을 텐데......”
헉......!
가을 옷이라 그동안 드레싱 룸 옷장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어서 아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옷이 있는 건 언제 봤지?!?!?!
아이는 요리 외에도 시간 날 때마다 집안일을 돌보곤 했다.
기본적인 바닥 청소는 로봇청소기가 한다 해도 테이블이나 선반 등은 1주일에 한 두 번씩 직접 걸레질을 하며 청소를 하기도 했고,
빨래는 물론이고 드레싱 룸에 있는 자신의 옷, 민재의 옷을 주기적으로 꺼내 스타일러스나 다리미로 관리하곤 했다.
아마 지금 입고 있는 인버네스 케이프도 그때 보았던 모양이다.
‘아, 망한 건가?’
그의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입가의 마스크 속으로 주르륵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 강의 늦겠다! 나 이제 들어가 볼게!”
“어 그래, 씨유!”
“응, 씨유 투~!”
아이가 강의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고,
민재는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미션임파서블 찍는 줄 알았네.’
그는 망토 소매로 얼굴을 땀을 훔쳐내고는 일단 셰어링 해 온 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역시 아이는 의심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그런데 대체, 그 외국인 남자들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리고 어제 왜 아이하고 혜인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 했던 거고?’
민재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았다.
그 때,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오늘 주식 팔아야해!!!’
이제 주식 시장 마감할 때까지 몇 시간 남지 않은 상황,
민재는 가방에 챙겨온 노트를 꺼내 어제 자신이 매도하기로 했던 종목들을 다시 한 번 확인 한 후, 핸드폰 증권사 앱으로 들어가 매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앞으로 중장기 투자를 하기로 한 종목 외에 팔아야 할 것들을 다 팔고 나니 10억원 가까이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지난번 등촌동 건물 매각한 대금이랑 이거 합치면 다음 빌딩 매입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군. 그럼 이제 아이를 믿고 매입 후보 건물들이나 보러 갈까?’
민재는 가벼운 마음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10억 원의 돈을 벌어 마음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아이의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확인해서 마음이 가벼워진 것이다.
그는 오랜만에 차안에서 즐거운 음악을 틀어놓고 흥얼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민재가 여러 종목들의 주식을 정리해 팔고 차익을 얻은 지 얼마 후,
주식시장은 거짓말같이 금융장세가 막을 내리고 주가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그가 1시간만 늦었더라면 10억 원의 차익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강동구 쪽 건물들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온 후, 그는 급히 입고 있던 인버네스 케이프를 원래 자리에 잘 걸어 놓았다.
‘이거 걸어 놓았던 위치가 어디였지......? 위치가 달라지면 아이가 어학당에서 본 게 나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지도 몰라!’
그는 마치 인버네스 케이프를 오늘 입지 않은 것처럼 감쪽같이 원래 자리에 갖다 놓은 후, 일부러 다른 옷을 하나 꺼내 스타일러스 안에 집어넣어 놓았다. 오늘 외출할 때 이 옷을 입고 나간 것처럼 하려고 말이다.
아이는 어학당을 마치고 3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가 서재로 들어오며 물었다.
민재는 그 질문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 가, 강동구요. 건물 보러 다녀왔어요.”
“아아~ 강동구요~?”
살며시 미소 짓는 아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그녀의 표정이 오늘따라 상당히 미묘해 보인다.
‘설마, 내가 어학당 찾아온 걸 눈치 챈 걸까?’
민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오빠 나 부탁할 거 있어요.”
아이가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부탁이요? 어떤 부탁인데요?”
“나 이번 주 금요일 클럽 다녀와도 되요?”
“네?! 클럽이요?”
이제 춤추고 싶을 때면 대치동 건물에서 춤추면 되니까 클럽 같은 데는 다시는 안 가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또 클럽에 가겠다는 거야?!
그와 함께 그녀의 어깨 너머로 한 사람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펼쳐졌다.
바로 그 사람, 혜인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