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그녀의 음모 (5)
그녀의 음모 (5)
민재는 며칠 간 어학당 강의를 청강하며 아이의 곁을 지켰다.
다행히 마크와 데릭 두 명의 외국인 남자는 그 뒤로 두 번 다시 아이의 주변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어학당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
민재가 ‘라리 (페라리 F8 트리뷰토)’의 핸들을 잡고 아이를 옆에 태운 채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강변북로를 따라 영동대교 방향으로 차를 몰고 있을 때, 조수석에 앉은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오빠, 어학당에서 공부해 본 소감이 어때요?”
“음, 최고급 한국어 과정이란 거....... 한국인인 나에게도 엄청 어렵더군요!”
“흐흐흥, 그쵸? 한국어는 절대 쉬운 말이 아니라구요.”
“맞아요, 우리말을 잘 쓰고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잘 못 사용하고 있던 말이 한두 개가 아닐 정도였으니까.”
아이가 턱을 치켜들고 한껏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보였다.
“어때요, 그렇게 어려운 한국말까지 잘하는 나, 정말 대단한 거 같지 않아요?”
“그래요, 아이, 사이코 (최고)! 스고이데스네 (굉장합니다)!”
“헤헤, 오빠, 아리가토~! 오빠, 이참에 계속 최고급 한국어 과정 나랑 같이 계속 공부하면 안 돼요?”
생애 마지막 국어 공부는 군대 시절 국방일보 낱말퍼즐 풀어보던 게 마지막이라고 여겼건만,
운전대를 잡고 있는 민재의 관자놀이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음...... 한국어 공부도 좋지만, 이제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오빠 자리요?”
“네, 돈 벌러 가야죠.”
민재는 아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 * *
다음 날 민재는 충남 아산으로 향했다.
혹시 아산에 있는 건물을 보러 가는 거냐구?
부동산 보러 가는 건 맞는데, 이번엔 건물이 아닌 땅이었다.
신도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충남 아산에 땅을 사서 가까운 미래에 큰 차익을 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오늘 보기로 한 땅은 아산시 남동에 있는 1,000평가량의 논이었다.
이제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베어 낸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황금빛 볏단들이 사방 가득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데 네모반듯한 논 뒤로 1980년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집 하나가 보였다.
이 논의 주인이 살던 집이었다.
“여기 논 주인이 아직 농사를 짓고 있나 보군요?”
민재의 물음에 이 논을 소개해 준 부동산 중계인이 고개를 저었다.
“직접 농사를 짓는 건 아니고 동네 영농회사에 농사를 맡기고 있어요. 원래 저 집에 할머니 혼자 사셨는데,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럼 지금 논 주인은 그 가족들이겠군요?”
“네, 소유권을 그 집 며느리하고 손자 손녀가 나눠 갖고 있어요. 손녀는 여기서 가까운 데에서 살고 있고 며느리하고 손자는 외지에 멀리 살고 있는데, 가끔 와서 집 주변 텃밭도 가꾸고 하면서 전원주택처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논만 파는 것도 아니고 집까지 다 팔려고 한다구요?”
“네, 다 합쳐서 팔려고 내놓았어요.”
“그 분들도 이 집에 추억도 많으실 거고, 집 앞에 텃밭도 가꾸고 하신다면서 왜 집까지 파신데요?”
“이 집이 워낙 오래전에 지어져서 등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답니다. 본인들도 이 집을 리모델링해서 전원주택으로 계속 쓸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러려면 등기도 다시 내야 되고 다른 논들 가운데 있는 집이라 길도 새로 내야 되고, 또 옆에 있는 논 주인도 땅 팔려고 내놓은 상황이고...... 여러모로 복잡해서 같이 팔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민재도 땅을 사게 된다면 나중에 되팔 때 면적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끔 네모반듯한 논만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저 집이 있는 부분까지 사게 된다면 나중 필요에 따라 집을 철거하는 비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논과 집을 모두 합친 면적에 대한 매매가는 10억 원.
이 가격이라면 지난 번 주식 매도 후 차익을 통해 얻은 재원만으로 충분히 매입이 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등촌동 건물 팔고 남은 금액은 다른 곳에 투자할 수도 있었다.
‘당장의 이득은 없을지 몰라도 서울에 어지간한 건물 하나 사는 것보다는 많이 저렴하잖아? 게다가 이곳도 몇 년 후면 신도시 개발 구역 안에 포함될 텐데, 그럼 최소 두 세배 차익도 올릴 수 있고...... 그때 생각하고 그냥 묵혀 두는 것도 괜찮을 듯? 아니면 땅 사 놓고 영농회사에 계속 농사 맡기고 내 땅에서 키운 내 쌀 받아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이 땅을 사면 분명 좋을 것 같다는 그만의 Feel 이 느껴지고 있고.
집을 껴서 사도 나중 손해 보게 되거나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민재가 부동산 중계인에게 말했다.
“땅 주인분들께 제가 이 땅 사겠다고 전해주세요. 선금, 중도금, 이런 거 없이 10억 한 번에 내어드린다고 하구요.”
그 말에 부동산 중계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이고~ 좋은 결정하셨습니다~! 바로 땅 주인 가족들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아주 좋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땅주인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통 9억 원 이상의 부동산 매매시 부동산 중계 수수료는 매매가격의 9/1,000 이다.
즉, 민재가 10억 원에 이 땅을 사게 되면 부동산 중계업자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양쪽으로부터 수수료로 9,000,000워씩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까 우리나라에 부동산 중계인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
민재는 아산에 내려온 김에 땅주인과 계약까지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 * *
아이는 민재의 보호 속에 어학당을 다니며 학업과 유튜브 활동을 열심히 병행했다.
그녀의 첫 번째 컨텐츠인 ‘아이의 미소시루 만들기’ 영상은 일주일 만에 조회수가 10만회에 달했고,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도 순식간에 3만 명으로 불어났다.
처음 치고는 아주 괜찮은 스타트였다.
그녀가 야심차게 준비한 두 번째 영상, ‘아이의 스테이크 만들기’ 가 공개되던 날,
갑자기 댓글창에 이상한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이하고 덕환튜브에 같이 나오는 민재하고 사귄다며]
[다른데 커뮤니티 게시판에 돌아다니던데, 공유 닮은 존잘남이랑 동거하는 거 사실임?]
[그 남자 졸라 부자라 아이가 꼬신 거라 함]
[어학당에서 아이가 그 남자랑 같이 다니고 강의실에서 뽀뽀도 한 거 본 사람도 있다는뎁]
[나이도 어린 게 발랑 까져가지고 벌써부터 동거야?]
[존잘남 졸라 부럽, 아이랑 동거하면 저런 음식 매일 먹는 거임?]
서재에서 아이와 함께 유튜브 댓글들을 모니터링하던 민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우리가 사귀는 거 어학당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알 수는 있어도, 함께 사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이 순간 심증이 가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생각났다.
민재와 아이가 사귀는 것도 알고 같이 동거하는 것까지 알고 있는데,
이를 대놓고 소문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혜인이었다.
“아놔, 이런 ㅆ......”
간만에 민재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올 뻔 했다.
그는 옆에 함께 있는 아이를 보고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이런 소문 낼만한 사람, 단 한명 밖에 없을 거 같은데요?”
아이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인 언니 밖에 없죠...... 오빠?”
“네.”
“저 내일 바로 영상 찍어서 재 채널에 올릴게요. 댓글 내용대로 나 오빠랑 결혼 준비하며 함께 살고 있는 거 맞다고, 당당하게 다 말할게요!”
아이가 민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나 지금까지 남자 친구 없는 척, 사귀는 사람 없는 척 거짓말 한 적 없잖아요? 어차피 곧 결혼할 생각으로 함께 있는 건데!”
“그래요, 애초부터 나중 누가 그런 질문 받으면 솔직하게 다 말하려고 했잖아요? 우리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필요하면 그 영상, 나도 함께 찍을게요!”
민재는 아이를 따스하게 안아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영상 찍는 건 찍는 거고. 혜인 그 여자 가만 두면 안 될 거 같은데요?”
“오빠, 어떻게 하시려구요?”
“가만있는 사람 잘못 건들었다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줘야겠죠.”
그는 서재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스승, 강운예 관장이었다.
* * *
민재의 부탁을 받은 강운예 관장은 곧바로 자신의 직원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운예 관장은 체육관과 경호 보안 업체 뿐 아니라 사설탐정 사업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물론 그의 직원들 중에서도 전직 국군 정보사 요원 출신이나 국정원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들의 특별한 정보 수집 능력 때문에 일부 대기업들이 그에게 거액을 주고 정보 수집을 의뢰할 정도였다.
강운예 관장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민재와 아이는 강운예 관장의 사무실이 있는 체육관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강운예 관장이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민재, 어서 오너라. 나루사와 씨도 오래간만이에요.”
두 사람은 강운예 관장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그와 마주보고 앉았다.
강운예 관장이 프린트물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일단 네가 의뢰한 이혜인이라는 골프 선수 한 번 캐봤는데 일단 남자관계가...... 보통이 아니더라.”
여자인 아이가 함께 있어서인지, 그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생활을 폭로했다가는 100% 성범죄와 연결될 수 있어서 오히려 위험해. 이 외에 너와 나루사와 씨의 관계에 대해 폭로한 점에 있어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정도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최초 소문이 유포된 글의 IP 주소 추적해보니 이혜인과 관계없는 곳의 IP였어. 그 여자가 다른 사람을 이용해 그 글을 올리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걸로 그 여자를 엿 먹이기는 힘들다는 말이지.”
“그럼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방법? 물론 있지.”
강운예 관장이 A4 용지에 프린트 된 사진 한 장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혜인의 아버지, 이기봉의 사진이었다.
“자식 교육을 똑바로 못 시켰으면, 응당 그 책임은 부모에게 있는 거지.”
“이기봉이요? 이 사람을 이용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굳이 이용할 필요도 없는 것이, 이 사람도 털어보니 몸에 묻은 먼지가 텍사스 회전초 (서부영화에 흔히 나오는 굴러다니는 풀 덩이들) 만큼 나오더라구.”
“그럼......?”
민재의 말에 강운예 관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비가 당하는 거 보면, 그 딸내미도 눈치 채지 않을까? 갑자기 자신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 * *
등촌동 재개발 조합장에서 미끄러진 뒤, 이기봉은 자신이 입당해 있는 OO당 당사를 거의 매일 기웃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꿈꿔오던 데로 돌아오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나서기 위해 당의 공천을 받으려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합장 자리를 내려놓으며 자신을 당에 어필할 수 있는 면이 많이 깎여 버렸고, 재개발 사업권을 미끼로 D 그룹에 혜인의 후원을 요청했던 것 역시 언론에 알려지게 되며 당에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이런 위기 상황을 어떻게든 돌파하기 위해 OO당의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갖은 로비를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도 선물 보따리를 몇 개 싸들고 당사에 들어갔는데,
“죄송합니다만, 오늘부터 당사 출입이 금지되셨습니다.”
당사 건물의 보안을 맡고 있는 경비원들이 그를 막아 세웠다.
“무슨 소리야? 나도 우리 당의 당원인데, 당원인 내가 왜 당사로 못 들어가?”
“선생님께서는 금일부터 당적에서 제적되셨습니다.”
“뭐, 뭐라고?”
이기봉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당 상임위로부터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연락? 무슨 연락?”
“당 상임위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의 탈세 혐의부터 성추행으로 벌금형의 받으신 이력까지 말입니다...... 당 상임위 위원분들께서 금일 선생님을 당에서 출당시키기로 결정하셨으니 더 이상 소란 일으키지 마시고 조용히 귀가하시지요.”
“아, 아니. 이 무슨.......! 타, 탈세는 무슨 얼어 죽을 소리야? 나 세금 꼬박꼬박 낼 거 다 냈는데?”
“국가를 속이고 세금을 줄여서 신고한 것 또한 탈세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국가를 속인 돈이 어디 한두 푼이었어야죠? 게다가 성추행으로 벌금형을 받으신 것도 선생님 사무실에서 알바 하는 대학생을 상대로 저지르신 일 때문에 받으신 거 아닙니까? 더 이상 우리 당은 선생님과 함께 갈 수 없으니 돌아가 주십시오!”
“대체 그런 말을 한 게 누구야? 누가 그런 말로 날 모함해? 아니, 당 상임위면 다야? 이런 거짓말로 음해하는 말이 있으면, 적어도 내가 해명할 기회라도 줘야할 거 아냐?”
시뻘게진 얼굴로 길길이 날뛰던 이기봉은 결국 경비원들에 의해 당사 밖으로 내쫓겨지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꿈이었던 정치 입문은 완전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그와 함께 그의 집안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