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아이의 반항 (12)
아이의 반항 (12)
세 사람은 L타워 81층에 있는 비채0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비채0 레스토랑은 어제 갔던 종로의 한식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과 비슷한 컨셉의 식당이었는데,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하나를 받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주중 점심인지라 식당 안에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들어가 식사를 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입구에 장식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자기들은 식당의 품격을 말해주는 것 같았고, 모던한 인테리어와 감각적인 디자인의 테이블과 의자들은 식당의 분위기를 더욱 밝게 해주고 있었다.
층고가 꽤나 높은데다가 창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창밖으로 서울의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일본어) 여기도 전망이 정말 좋구나.”
“(일본어) 아까 우리가 본 집보다 훨씬 위층이라 그런 거 같아요. 오늘따라 미세먼저도 적고 날씨도 쾌청해서 너무 좋네요. 우리 창가로 가요!”
세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런치 세트를 주문했다.
이 곳 런치 비용은 7만원 정도로 종로 암0서울보다 2만원 가량 저렴한 편이었다.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치고도 런치 가격이 매우 착한 편이라여겨졌는데,
메인 메뉴로 한우 등심 구이나 금태구이 말고 건조숙성 채끝 등심을 주문하게 되면 2만원이 추가된다고 한다.
“어머님, 메인 메뉴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일본어) 어제 한우 소고기는 충분히 맛을 보았으니 오늘은 생선 요리 금태구이로 하는 게 좋겠군요.”
“(일본어) 전 그래도 생선보다 고기가 더 좋으니까 이거, 건조 숙성 채끝 등심으로 할게요!”
이렇게 린코는 메인 메뉴로 금태구이를, 아이는 건조 숙성 채끝 등심, 민재는 한우 등심으로 주문하기로 했다.
식사가 시작되고,
애피타이저로 먼저 대게살과 성게절임을 곁들이고 진한 닭고기 육수와 들기름으로 간을 한 순두부,
잣육수에 전복과 문어, 대개, 능이버섯을 곁들인 잣수란,
살만 발라낸 대하(새우)에 건보리새우를 입혀 튀겨낸 새우강정이 나오고,
이어서 전복과 가리비, 버섯이 들어간 생복만두가서빙되었다.
린코가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해서 그런지, 순두부와 잣수란, 생복만두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일본어) 처음 애피타이저로 나온 순두부 요리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대게살와 해산물이 어우러진 짭쪼롬한 맛이 일품이더군요! 한국에는 이런 순두부 요리들이 많나요?”
“가장 대중적인 순두부요리는 역시 순두부찌개가 있습니다.”
“(일본어) 아아, 순두부찌개는 일본에서도 상당히 유명해요! 편의점에서도 바지락이 든 순두부찌개 간편식이 팔리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일본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싫어한다는 선입관이 있지만 의외로 순두부찌개, 불닭볶음라면 등 매운 한국 음식, 간편식들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일본어) 순두부 말고도 계란 노른자를 톡 터트려 먹는 수란의 느낌도 상당히 좋네요. 고소한 잣에 전복과 문어를 함께 먹는 식감도 아주 좋고... 아주 마음에 들어요.”
역시 미슐랭 가이드가 인정한 집은 실패 확률이 적다.
아무런 예상도 못하고 갑작스럽게 방문했는데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니 말이다.
조금 빠르게 메인메뉴와 식사가 들어왔다.
각자 주문한 한우등심구이와 금태(정식명칭은 눈볼대, 붉은 비늘에 큰 눈을 가진 심해어로 한 마리 당 우리나라 돈으로 2, 3만원을 호가할 정도로 비싼 어종이다)구이, 건조숙성 채끝 등심이 나오고,
갓 도정한(벼의 껍질을 갓 벗겨낸) 쌀밥과 백합육수로 우려낸 섭국(홍합국),
잘 익은 김치와 방금 담근 것 같은 겉절이,
그리고 북어껍질을 튀긴 부각이 함께 나왔다.
한우 등심과 채끝 등심은 네모난 스테이크를 도톰한 한 입 크기로 썰어 놓은 모양이었다. 한입 먹어보니 숙성한 한우를 간장 양념에 재워 육즙이 살아있게구워낸 것 같은데, 입안에서 은은하고 향긋하게 퍼지는 간장의 향기가 짜거나 쓰지 않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금태구이는 막걸리로 숙성한 두툼한 흰살 금태 한 토막을 양파구이 위에 올려놓았는데,
서빙하는 직원의말에 따르면,
“예전에 인도 총리께서이곳을 방문하신 적이 있는데, 국빈을 대접하는 요리로 이 금태구이가 준비되었습니다. 그 때인도 총리께서 드시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음식이라고 합니다.”
라고 했다.
하기야, 인도 총리라면 등심이나 채끝 같은 한우를 먹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인도의 대표 종교는 힌두교, 소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인도 사람들 중 대부분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셰프가 그런 점을 고려해 금태구이로 준비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코 역시 부드러운 생선살 위에 북어 소와 북어 보푸라기가 곁들여진 금태구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섭(홍합)이 가득 든 시원하고 깔끔한 맛의 섭국도 좋았는지, 어제 육개장을 먹었을 때처럼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깨끗하게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니 디저트로 살얼음이 든 석류 식혜, 말린감귤칩을 곁들인 구수한 돼지감자 빙과, 육포꿀을 넣어 만든 약과가 나왔다.
린코는 부드러우면서도 쫀쫀한 석류 식혜의 밥알을 숟가락을 떠먹으며 말했다.
“(일본어) 한국의 디저트는 달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상큼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있어 아주 좋군요.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딱인 거 같아요.”
세 사람은 디저트를 먹으며 함께 둘러본 S 레지던스에대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었다.
“(일본어) 호텔 같은 시설이나 조식 서비스, 입주민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은 분명 인상적이더군요. 특히 잠시 둘러봤던 입주민 헬스장, 상당히 널찍하고 프라이빗하게 운동하기는 안성맞춤인 거 같았어요. 나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몸 좋고 건장한 젊은이들로 바글바글한 헬스장에서 함께 운동하기가 눈치 보이기 마련인데, 그런 곳이라면 나도... 참, 그런데 강군은 어디서 운동을 하나요? 강군의 아파트에도 이 곳 같은 입주민 전용 헬스장이 있나요?”
“제가 사는 아파트에도 입주민 헬스장도 있고 장비와 시설도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만, 제가 원하는 운동 기구들은 많이 부족한 편이랍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대치동에 있는 제 소유의 빌딩에 저만을 위한 헬스장을 따로 만들었지요. 지금은 저만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 저와 아이를 위한 헬스장, 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건물에 헬스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린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본어) 헤에~? 강군이 가진 빌딩에 직접 헬스장을 만들었다구요?”
“네, 대치동에 있는 빌딩은 주로 병원들이 입주한 곳인데, 그곳 맨 꼭대기층 10층에 헬스장을 만들게 되었지요. 그곳에서 운동도 하고, 아이가 댄스 연습도 하고, 가끔 사업 투자 관련해서 손님들이 찾아올 때 차 한잔 마시며 만날 수 있는 장소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어) 호오... 하긴, 전에 유키나가 한국 다녀왔을 때 아이가 운동하고 춤 연습하는 곳도 있고 퍼스널 트레이너도 있다는 말을 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강군이 가진 빌딩들을 구경하지 못했지요? 이따가 구경시켜 줄 수 있나요? 물론 가까운 곳에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어머님. 여기 잠실에서 차로 10 ~ 15분 정도 걸리고, 집에서는 걸어서도 5 ~ 10분 정도 밖에 안 걸릴 정도로 가깝답니다.”
“(일본어) 오, 그거 잘 되었네요. 그런데 강군은 어떤... 특별한 운동이라도 한 건가요? 헬스장에 있는 일반적인 운동 기구로는 만족이 안 된다는 걸 보면?”
아이가 대신 나서서 설명을 해주었다.
“(일본어) 오빠, 고등학생 때까지 아마추어 무에타이 선수였어요! 대치동 우리 헬스장에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래서 그 안에 샌드백하고 무에타이, 격투기 할 때 쓰는 장비들이랑 처음 보는 신기한 운동 장비들이 엄청 많아요!”
“(일본어) 무에타이...? 킥복싱 말이니...? 아니, 강군... 생긴 것과 다르게 완전 거친 운동을 해왔던 거니...?”
린코는 완전 의외라는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어) 그럼 강군... 싸움도 잘 해?”
“(일본어) 네, 엄청 잘 해요. 전에 덩치 큰 야쿠자도 간단하게 박살내 버릴 정도였으니까요.”
“(일본어) 야쿠자를 박살냈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일본어) 아, 그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본어) 그럼 행여나... 강군이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거나 다혈질적인 모습 보이거나 그렇지는 않지? 원래 거친 운동 한 사람들이 성격을 종잡을 수 없다는데...”
“(일본어) 어머니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오빠 절대 그럴 사람 아니에요. 운동은 운동이고 생활은 생활로 딱 구분해서 잘하는 사람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왜, 오빠가 저 때리기라도 할까봐 걱정이신 거예요?”
“(일본어) 아니 그런 운동을 했다고 하니까... 그럼 평소에 거친 모습 같은 건 전혀 없는 거야? 너한테 화내거나 그런 적도 없고?”
“(일본어) 네, 전혀 없어요. 무에타이나 격투기 한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다 편견이더라구요. 오빠나 오빠 가르쳐주신 관장님, 그 분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분들이나 함께 일하는 분들도 모두 만나봤는데, 제대로 운동한 사람일수록 더 예의바르고 더 착하고 친절했어요. 운동도 제대로 안한 사람이 힘자랑하면서 건들거리는 거지, 진짜는 안 그렇더라구요. 오빠는 바로 그 '진짜'니까 걱정 안하셔도 되요.”
아이는 눈을 찡긋 하며 웃어 보였다.
* * *
식사 후 세 사람은 잠실에 있는 매물을 하나 더 살펴 본 후 삼성역 인근에 있는 민재의 대치동 건물로 향했다.
인근 코엑스, G호텔, H백화점 사이에 있는 그의 10층짜리 빌딩을 본 린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일본어) 전에 서울 테헤란로 주변 빌딩 시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데 이런 곳에 이 정도 규모의 빌딩이라면... 강군, 이거 순수 본인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거 맞지요?”
혹시 대출이나융자 껴있는 거 아니냐, 아니면 다른 이와 공동 명의로 된 빌딩 아니냐, 하는 물음을 이렇게 돌려서 물어본 듯 하다.
하기야, 요즘 시대에 타고난 금수저가 아니라면젊은 나이에 이 정도 빌딩 건물주 되기가 어디 쉽겠나.
민재는 가슴을 활짝 펴면서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히 제 소유의 빌딩입니다. 딱히 대출 같은 것도 없구요.”
“(일본어) 세상에... 보아하니 1층에 있는 카페 말고는 모두 병원들이 들어가 있는 것 같고 공실도 하나 없는 거 같은데...”
“맞습니다. 이 빌딩에 제게 있어 가장 확실한 캐시 카우(Cash cow, 현금창출원)이기도 하지요. 의사 선생님들은 절대 월세 밀리는 법이 없더라구요.”
민재는 호탕하게 웃으며 린코를 10층에 있는 나만의 헬스장, 이제는 ‘민재아 아이, 둘 만의 헬스장’이 된 곳으로 안내했다.
각종 샌드백부터 트레드밀, 스텝밀, 여러 가지 머신 등 운동기구들이 하나의 장비에 붙어있는 놀이터 정글짐 모양의 호0이스트 사의 모션 케이지, 스크린 골프 시설까지...
잘 꾸며진 두 사람의 운동 시설을 본 린코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일본어) 세상에... 어떤지 아이가 전에 모델 일 할 때보다 더 몸매가 예뻐졌다 싶더라니, 여기서 마음껏 운동해서 그런 거군요?”
아이가 그녀의 팔짱을 꼭 끼며 말했다.
“(일본어) 어머니, 오빠 덕분에 최근에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진짜 생각보다 운동 효과도 좋고 엄청 재미있어요! 어머니도 일본에서 골프 한 번 배워보지 않으실래요? 그래서 나중에 저희랑 골프장도 함께 다니시구요.”
“(일본어) 네 아버지는 동네 분들이랑 축구하는 거 좋아하시지, 아직 골프에 아무 관심도 없지 않니? 나 혼자 골프 배우기는 부끄러울 것 같구나.”
“(일본어) 어머니가 먼저 배우시면 아버지도 따라 배우시지 않으실까요? 아버지는 건강 때문에라도 축구 같이 격렬한 운동은 좀 자제하실 필요가 있어요. 더군다나 아버지 안 좋은 곳이 심장 쪽이잖아요? 이번 기회에 동네 축구계에서 은퇴하시고 새로운 취미로 골프를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지 권해 드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일본어) 글쎄, 네 말대로 심장 때문에라도 축구는 좀그만했으면 좋긴 한데... 내 돌아가면 아버지한테 축구 대신 골프 시작해보자고 말이나 한 번 해봐야겠다.”
린코는 민재와 아이, 두 사람의 헬스장을 부러운 눈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 * *
대치동 건물을 나설 때, 린코가 아이에게 말했다.
“(일본어) 여기 테헤란로는 정말 주택가라기보다 번화가라고 해야 할 거 같구나. 아무래도 이런 곳에는 시장 같은 건 없겠지? 여기 교무슈퍼(일본에 있는 대형 마트 체인)같은 대형 마트 같은 곳은 있니?”
“(일본어) 역삼이란 곳에 대형마트가 있어요. 차로 가면 10분 쯤 걸려요.”
“(일본어) 그래? 그럼 강군에게 그리로 가자고 하자.”
민재가 린코와 아이를 차에 태우며 물었다.
“어머님, 뭐 사실 물건이라도 있으세요?”
“(일본어) 지금까지 강군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대접을 너무 잘 받아서 오늘 저녁은 내가 두 사람에게 대접을 해 주고 싶어서요.”
민재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어머님! 당연히 저희가 모시면서 대접해 드리는 게 예의죠! 오늘 저녁도 저희가 준비해 드릴게요!”
“(일본어) 강군의 마음 고맙게 받을게요. 하지만 타국에 떨어져살던 내 딸에게, 그리고 새로 생긴 내 아들에게 맛있는밥 한끼 지어 먹이고 싶은 게 어미 된 사람의 마음 아니겠어요? 그러니 아무쪼록 사양하지 말아줘요.”
린코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