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매운 맛 한 번 볼텨? (1)
매운 맛 한 번 볼텨? (1)
린코가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날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일단 아버지 요시노부는 아이가 한국에 머무는 것에 대해, 한국인인 민재와 사귀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한국인은 싫어해도 한국돈 10억원을 한 번에 땡겨 줄 수 있는 부자 사윗감까지 싫어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단,
자신의 승낙이 있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절대 결혼할 수 없으며,
두 사람이 만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 벌서 결혼하겠다는 건 너무 성급한 거 같다며, 조금 더 만남을 계속하며 결혼에 대해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한다.
린코는 넌지시 강군이 언제쯤 인사하러왔으면 좋겠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러자 요시노부는 오지 말라는 말은 못하고,
“(일본어) 그게... 지금보다는 내 건강이 나아지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라고 얼무버렸다고 한다.
이제 확실히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큰 고비는 무사히 넘어가게 된 것이다.
* * *
점점 겨울이 다가오는 듯 기온은 조금씩 내려가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다니는어학당의 종강도 몇 주 앞으로 다가오고,
그와 함께 필연적으로 시험 기간도 돌아오고 있었다.
그로인해 아이는요새 유튜브 컨텐츠 촬영도 미루고 시험공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시험공부는 대학 도서관이 아닌 집에서만 하는 중.
최근 유튜브 활동으로 인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 도서관에 가봐야 공부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집에서 공부하는 게 더 조용하고 편한데다가 좋아하는 간식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으며 할 수 있어서 집공(집에서 공부)을 더 선호했다.
전공 책을 볼 때면 자신의 공부방에서,
인터넷을 찾아 볼 게 있으면 민재의 서재에서 (자신의 노트북보다 커다란 모니터가 있는 민재의 데스크 탑을 더 선호하는 것),
간식을 먹으면서 공부할 때는 거실 소파에서 뒹굴 거리며 공부를 하는 것이다.
민재는 아이가 공부하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대치동 건물로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못해서 근손실이 온 느낌이야. 아이가 공부하는 동안 난 득근이나 해야겠다.’
그는 곧장 아이의 시험이끝날 때까지 무슨 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월요일은 가슴, 화요일은 등, 수요일은 어깨, 목요일을 하체, 금요일은 팔.
그리고 복부는 매일.
여기서 화요일은 가장 운동 시간이 긴데, 우선 데드리프트, 바벨 굿모닝, 케틀벨 스윙 등으로 등 하부부터 먼저 조지고(?),
이어서 풀업, 렛 풀 다운, 시티드 케이블 로우, 바벨 로우 등 여러 운동으로 등의 상부를 크고 두껍게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웨이트가 끝나면 거울 앞에서 가볍게 섀도우 파이팅을 한 뒤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3분 10라운드에서 15라운드까지 친다.
이렇게 운동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충 2시간에서 3시간 정도.
상당히 오랜 시간 운동을 하는 거지만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아이 공부하는데 방해될까봐서 말이다.
만약 운동 중이라도,
“오빠 어디에요? 나 오늘 공부 다 했으니 빨리 와요오~”
아이가 요로코롬 전화해 주면 그냥 씻지도 않고 바로 집으로 달려가는 거지만,
만약 아이가 공부에 열중하느라 전화를 안 주면,
그냥 땀에 젖은 운동복 차림으로 한강으로 나가 10km ~ 20km 정도 로드웍 (달리기)을 하면서 아이의 전화를 기다리곤 했다.
집이나 대치동 건물에서 탄천 주차장으로 나가 한강변 산책로를 따라 한강 수상 택시 승강장을 찍고 돌아오면 약 10km,
거기서 더 달려서 반포대교 근처 세빛섬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21km 마라톤 하프 코스쯤 되었다.
민재의 10km 기록은 평균 45분 ~ 50분 정도,
21km 하프 코스 기록은 1시간 50분 정도다.
이 정도면 선수 수준은 아니더라도 일반인이나 동호인 중 상위 10% 안에들 만한 기록이다.
민재가 한강으로 달리기를 하러 갈 때면 꼭 신는 신발이 하나 있는데,
나00 사에서 나온 ‘에어 줌 알파플라이 넥스트 - 엘리우드 킵초게’ 라는 너무 길어 외우기도 힘든 이름을 가진 런닝화였다.
이 신발은 인류 최초로 마라톤 2시간 벽을 허문 (비공인 마라톤 대회에서 거둔 기록이 1시간 59분 40초, 공인 대회에서 거둔 기록은 2시간 1분 39초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있다.) 케냐의 마라톤 선수 엘리우드 킵초게의 이름을 따서만든 신발인데,
마치 발에 스프링을 달고 통통 튀듯이 달릴 수 있어서 일반인이 신고뛰어도 엄청난 기록 향상을 얻을 수 있는 이른바 ‘기술 도핑’ 수준의 물건이었다.
과거 올림픽 수영에서 전신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이 말도 안 되는 신기록들을 수립하기 시작하자 국제수영협회에서 선수들의 전신수영복 착용을 금지시켰듯이. 세계마라톤협회에서도 이 신발의 너무 뛰어난 성능 때문에 선수들이 공식 대회에서 이 신발을 신는 것을 금지시켜 버렸다.
그로 인해 선수들은 이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되었지만 일반인들은 언제든 구입해 신을 수 있다.
단, 32만원을 넘는 비싼 가격 때문에 구입을 망설이게 되는 분들이 많겠지만(나00 사 회원 가입하면 10% 할인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하다.)
보유 자산만 몇 천억 원이 넘어가는 우리 민재에게 32만원이 큰돈이겠나?
그저 3~4명이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한 끼 식사 하는 값보다 저렴하다고 여길 뿐일 텐데.
어쨌든 아이의 전화를 기다리며 한강으로 나가 달리기를 시작하는 민재,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 어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확실히 저녁이 되자 날은 더 쌀쌀해져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운동복이 저녁 바람에 더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온몸이 운동으로 뜨거워진 탓에 추운 줄은 몰랐다.
한강을 옆에 끼고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으려니,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운동을 한 덕에 배도 고파졌거니와,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따뜻한게 먹고 싶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드는 또 하나의 생각,
‘어... 날씨 때문인지 맵고 얼큰한 게 땡기네?’
생각해보니 몇 달간 매운 음식, 얼큰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밖에서 외식을 할 때도,
아이가 만들어주는 것을 먹거나 아이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매운 음식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재도 역시 진성 한국인이라 그런지, 한국 음식 특유의 매운 맛이 자연스럽게 그리워지는 모양이었다.
‘배도 허하고 날도 추워서 그런가, 갑자기 돼지고기 가득 든 매운 김치찌개 생각이 간절해지네? 아니면 매운 짬뽕도 좋고, 매콤한 제육볶음도 괜찮고... 아, 그래, 제육볶음! 청양고추 넣어서 맵게 만든 체육볶음에 공기밥하고 소주 한 병만 있으면... 캬아~’
민재는 달리기를 하면서 핸드폰 지도 어플로 들어가 제육볶음 식당을 검색해보았다.
지금 민재가 있는 곳은 영동대교와 성수대교의 중간 쯤에 위치한 한강공운 산책로,
여기서 남쪽 압구정로데오역 쪽으로 내려가면 민재의 압구정 건물도 나오고, 그 주변에 맛있기로 소문난 제육볶음 가게도 몇 군데 있었다.
‘아직 아이한테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서는 열공모드에 빠져 있는 거 같은데... 그럼 혼자서 제육볶음에 소주 한 병 간단하게 먹고 들어갈까?’
민재는 달리기를 그만하고 압구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였다.
위이이이잉~
전화가 왔다. 덕환이었다.
“여보세요?”
[어디냐?]
“나 지금 한강.”
[한강?! 왜, 주식 망했어?!]
“응, 뭐가 망해??? 뭔 개소리야?!?!”
주식갤러리 주갤러들이 주식 폭망했을 때 하는 한강 드립이 아직도 유행하고 있나 보다.
비슷한 바리에이션으로 ‘지금 한강 수온 몇 도에요?’ 도 있지 아마...?
“뻘소리 그만 하고, 왜 전화했어?”
[왜 전화했긴, 얼굴 본지 오래 되서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전화했지.]
“밥?”
민재는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땀범벅이 된 운동복 입고 혼자서 제육볶음에 소주 하나 까는 모습, 누가 봐도 쫌 거시기 할 텐데,
그보다는 친구랑 둘이 같이 먹는 게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좋지! 너 지금 어디냐?”
[네 건물, 내 스튜디오.]
마침 덕환도 압구정에 있는 모양이다.
“그래, 나도 지금 압구정 가는 중이야. 지금 만나서 같이저녁 먹으면서 소주나 한 잔 하자!”
[좋지, 어디서 만날까?]
“야, 무조건 내가 사줄 테니까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되지?”
[어, 그럼 나야 좋지! 뭐, 봉골레, 까르보나라 뭐 그런 건 아니지?]
“남자들끼리 뭔 봉골레야? 너 죽을래? 닥치고 먹자골목에 있는 진0집으로 와.”
[진0집? 그 짜장면 2,500원 하는 중국집 맞은편에 있는 식당? 거기 좋지! 바로 갈께~!]
“오키~!”
역시 남자들의 통화는 언제나 짧고 간결하다.
* * *
민재와 덕환은 압구정 진0집에 들어가자마자 제육볶음 대짜에 공기밥, 소주 두병을 주문했다.
“이모오~! 제육볶음에 청양고추 듬뿍 넣어주시고, 엄청 매콤하게 해주세요~!”
“엄청 매콤하게? 알았어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방 이모님이 빠알갛게 양념된 돼지고기 위에 송송 썬 초록색 청양고추와 양파, 크기는 작아도 악랄하게 생긴 태국고추까지 몇 개 함께 넣고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서 신나게 후라이팬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기에도 화끈하게 붉은 빛으로 볶아진제육볶음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져 식탁으로 왔다.
민재는 제육볶음이 나오자마자 우선 덕환과 소주 한 잔부터 먼저 들이 재끼고는,큼직하고 두툼한 제육볶음 하나를 하얀 쌀밥위에 올려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모오~! 여기 공기밥 하나 추가요~!”
“으잉? 벌써 밥 한 공기를 다 먹었어요? 총각 엄청 빨리도 먹네...”
민재는 밥 한 공기를 후딱 다 비우고는 또 한 공기를 시켜 제육볶음과 함께 푹푹 퍼먹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덕환이 딱 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야, 짠 이나 하고 먹어. 한 잔만 마시고 말거야?”
“응? 으응~ ㅎㅎ”
민재는 입 안 가득 든 밥과 제육볶음을 우물거리며 덕환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덕환이 소주병을 받아 그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야, 요새 아이짱이 너굶기냐?”
“응? 굶기긴 뭘 굶겨? 너무 잘 먹여서 나 지금 살찐 거 안보이냐?”
“그런데 밥 먹는 게 사흘 굶은 사람 같은데...?”
“어...? 그래...?”
민재는 입가에 밥풀까지 묻어 있는지도 모르고 헤헤 웃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고, 마침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는데, 여기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게 되네?”
“매운 음식? 평소에 아이짱이 식사 다 만들어 준다며? 근데 매운 건 잘 안 만들어줘?”
“고추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거 가끔 만들어 주고 그러는데... 역시 우리 입맛이랑 조금 달라서 그런가, 엄청 맛있기는 한데 매운 맛은 많이... 부족해.”
“하긴, 일본 사람들이 짜고 단 음식은 많이 먹어도매운 음식은 많이 안 먹으니까... 본인 입에는 매워도 너나 우리 한국 사람들 입에는 간에 기별도 안가는 매운 맛일 수도 있겠다.”
“응, 그 말이 꼭 맞아. 나는 신라면 정도의 매운맛을 기대했는데 아이가 만들어 주는 건 진라면 순한맛 정도랄까? 그런데 아이가 요리를 잘해서 맛도 있고 좋으니까, 또 너무 매우면 아이가 못 먹으니까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주는 대로 먹었거든. 그런데 이제 겨울도 다가오고 날도 으슬으슬해지니까 나도모르게 매운 게 막 땡기더라고.”
두 사람은 다시 잔을 부딪치고 잔에 든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듣다보니 가슴이 찡해진다. 너 혹시 아이 없을 때 혼자서 밥에 고추장 비벼서 먹고 그러는 거 아냐?”
“어?! 어떻게 알았어? 전에 그렇게 먹은 적 몇 번 있는데...?!”
“진짜 밥에 고추장만 비벼서 밥 먹었다고? 외국 여행 나간 사람들이 현지 음식 입에 안 맞아서햇반에 고추장 비벼먹는 것처럼 말이야?”
민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그 정도로 불쌍하게 먹은 건 아니고, 무 쭐대기(무 줄기, 여기서 민재가 말하는 건 동치미에 든 무 끝에 달려 있는 무 줄기를 말한다.)랑 계란후라이랑 참치 통조림이랑 해서 참기름 넣고 고추장에 같이 비벼 먹었지.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렇게 드실 때 몇 번 같이 먹어본 후로 진짜 10여년 만에 그렇게 해서 먹었는데... 참기름하고 고추장에 비벼 먹으니까 진짜 맛있드라.”
“아, 그런 거 먹을 때 콩나물국이나 오이 냉채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는데!”
“야, 갑자기 네가 말하니까 그거 또 먹고 싶어지잖냐...”
민재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 일본 사람이랑 사귀어도 네가 한국 사람인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입맛까지 바꿀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렇지. 그런데 아이한테 이런것까지 나한테 맞춰달라고 하고 싶지 않아. 연인이나 부부라도 입맛은 다를 수 있는 거 아냐?”
“뭐, 그건 그렇지.”
“앞으로 매운 음식 땡기고 그럴 땐 너한테 연락할게. 그 때마다 신세 좀 지자.”
“응, 네가 음식값 다 내준다면야 같이 못 먹어줄 이유도 없지. 여기 근처에 있는 엄청 맵기로 유명한 라면집도 있는데 나중에 거기도 같이 갈까?”
“오, 그거 좋지!”
“가서너랑 나랑 먹방 컨텐츠도 찍고 말야. 어때 괜찮지?”
“야, 먹방이나 쿡방은 아이 컨텐츠고, 네 채널 컨텐츠는 그게 아니잖아~ 아이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할 생각하지 마~!”
두 남자는 웃으며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 * *
아이는 7시가 조금 넘어서야 민재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덕환과의 식사를 모두 마치고 소주까지 깔끔하게 비운 상황.
민재는 곧장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오빠, 어서 와요! 지금까지 운동하다 오신 거예요?”
민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이가 그의 품에 달려와 안겼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데...
“어? 소주 냄새! 그리고...?!”
아이가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침 그의 입술에 아까 먹던 매운 제육볶음의 양념이 살짝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빠?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신 거예요? 누구랑?”
순간, 민재의 뒷덜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