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파라다이스에서의 크리스마스 (2)
파라다이스에서의 크리스마스 (2)
버틀러는 대리석으로 된 고급스러운 통로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천정에 매달린 샹들리에 하며, 중간 중간에 붉은색 비단 커튼들이 늘어뜨려진 모습은 마치 베르사유나 바로크, 로코코 시대 유럽의 휘황찬란한 왕궁의 복도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랜드 디럭스 풀빌라는 호텔 내부가 아닌 별채의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출입하는 문도 따로 있어서 호텔의 다른 투숙객들과 마주칠 일도 없었고,
심지어 민재가 발렛을 맡긴 차도 그랜드 디럭스 풀빌라에 투숙하는 고객들을 위한 전용 주차장으로 이동해 주차되어 있다고 했다.
예술품과 아름다운 장식들로 가득한 대리석 복도들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간 후, 다시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 코너를 두 번 돌고 나서야객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고객님이 기거하실 그랜드디럭스 풀빌라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라며,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를 호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버틀러들은 고객님을 위해 24시간 항상 대기하고 있답니다.”
“네, 감사합니다.”
민재는 이곳까지 짐을 옮겨 준 버틀러와 컨시어지들에게 5만원씩 팁을 쥐어주고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와... 여긴...! 호텔이 아니라 미술관 같아요...!”
그랜드 디럭스 풀빌라 안에는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조각들은 물론,
유명화가의 그림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데미안 허스트, 프랭크 스텔라, 데이비드 호크니...
거장들의 그림들이 사진이나 모사품이 아닌, 진품이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거 되게 유명한 작품인데... 리히텐슈타인 작품 맞죠?”
“네, 아마 Roommate 라는 작품일거예요.”
“이거 그림 질감도 그렇고 밑에 사인된 거 보면 진품이 확실해 보이는데... 호텔에 이런 미술품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저도 여기 예약하면서 미술품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작품들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두 사람은 짐을 놓고 함께 손을 잡은 채 객실 안을 돌아다녀 보았다.
객실, 이라기보다는 아주 넓은 집에 들어온 느낌,
아닌게아니라 이곳 그랜드 디럭스 풀빌라의 면적은 무려 284평에 달한다고 한다!(복도와 풀장이 있는 발코니를 포함한 면적)
이 안에 거실과 홈바, 다이닝룸이 있고,
(민재의 집에 있는 것보다는 작지만)드레싱룸까지 갖춰진 침실 2개, 욕실 2개, 화장실 3개,
게다가 발코니에 풀장이 2개나 있었다!
“와, 스고이(대단하다)...! 여기는 정말... 상상 이상의 호텔이네요...! 왜 1박에 2천만원이 넘는지 알 것 같아요!”
내부를 돌아보며 놀라워하는 아이,
민재가 그녀의 허리를 사랑스럽게 껴안아 주며 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이렇게 멋진 곳이 어떻게 마음에 안들수가 있겠어요? 너무 멋있어서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에요...! 오빠... 너무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해줘서. 그럼 우리 여기서 즐겁게 지내다 가요.”
“네, 오빠!”
아이가 활짝 웃으며 민재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 * *
두 사람은 여행용 가방에 든 옷들부터 드레싱룸 안에 정리를 해두었다.
고급스러운 장의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짜여진 옷장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민재의 짐은 오른쪽에 아이의 짐은 왼쪽에 각각 넣어두기로 했다. (옷장의 공간이 아주 넉넉해서 짐을 다 넣고 여행용 가방까지 넣어도 충분히 남을 정도였다.)
아이는 짐정리를 마치자마자 곧장 발코니로 나가보았다.
풀빌라답게 발코니에는 상당히 넓은 풀장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ㄱ’ 자 형태의 메인 풀과 침실 앞에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서브 풀, 이렇게 두 곳이나 되었다.
풀장은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지만 아직 물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민재와 아이가 체크인 시간 전에 도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미처 물을 채워 넣지 못한 모양이었다.
메인 풀 옆에는 선베드와 의자, 테이블들도 여럿 놓여 있었고,
심지어 DJ 부스도 있어서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풀파티를 열어도 될 것 같았다.
“스바라시이(굉장하다, 스고이와 유사하게 쓰이지만 주로 감동, 감탄 등의 감정을 표현할 때 스바라시이를 더 많이 사용하는 듯)...! 오빠, 이런 곳은 어떻게 찾으셨어요?”
“인터넷에서 겨울에도 물놀이 할 수 있는 호텔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호텔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에는 저기 테마파크 너머에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서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수영장 겸 스파가 있다는 걸 알고 좀 더 검색을 해 봤는데, 이렇게 좋은 풀빌라도 있다는 걸 알고는 바로 예약 전화 걸었죠. 그리고 또 하나...”
민재가 테마파크 옆에 있는 사각형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클럽 VIP 룸도 하루 예약했어요. 아이가 대치동 건물에서 춤 연습할 때면 매번 다른 층에 소음 피해 갈까봐 늘 음악 조그마하게 틀어 놓고 춤추곤 했었잖아요? 오늘은 눈치 볼 필요 없이 마음껏 즐겨 봐요.”
“아, 오빠...!”
아이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고마워요... 오빠는 어떻게 제 마음을 이리도 잘 아세요?”
“아직 결혼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몇 달을 함께 살았는데, 당연히 아이가 어떤 걸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죠.”
“아...!”
“그래도 아직 아이 마음을 전부 아는 건 아니니까, 내가 혹시 실수 하거나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으면 언제든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요. 항상 아이 말에 귀 기울이도록 노력할게요.”
그러면서 아이의 어깨를 살포시 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평생 동안, 꼭 그렇게 할게요.”
“아, 오빠...!”
아이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 * *
우선 점심을 룸서비스로 해결하기로 한 두 사람.
전담 버틀러가 민재가 주문한 음식들이 담긴 트롤리(룸서비스 음식 등을 나르는 바퀴가 달린 운반용 수레)를 직원 출입구 앞에 가져다 놓은 후 문을 노크하고 돌아갔다.
이 곳 그랜드 디럭스풀빌라는 투숙객이 드나드는 문과 직원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만일 투숙객이 요청할 경우 버틀러 등 직원들은 그들만의 통로를 통해 투숙객이 요청한 물건들을 문 앞에 놔두고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민재역시 직접 호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버틀러와 직원들이 객실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 달라 요청했던 것이다.
“자, 이제 점심부터 먹을까요?”
민재가 주문한 음식이 담긴 트롤리를 끌고 거실로 가지고 왔다.
거실은 민재의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정사각형 모양의 대리석 테이블을 중심으로 길고 푹신한 소파와 여러 개의 안락한 의자들이 둘러져 있었고,
벽에는 가스를 이용한 벽난로도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 내부는 훈훈하니 딱히춥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이 벽난로를 무척 신기하게 여겨서 한번 켜 보았다.
벽난로의 유리 안으로 환한 불길이 타오르고, 벽난로의 불빛에 겨울의 운치가 더욱 멋을 더하는 듯 했다. (물론 벽난로를 켰다고 해서 실내 온도가 갑자기 올라가지는 않았다. 역시 장식 효과를 위한 벽난로인 듯)
거실에는 UHD TV와 홈시어터 기능도 있었는데,
두 사람은 마치 집에서 밥을 먹을 때처럼 (원래는 주방 식탁에서 밥을 먹었지만 거실에 코타츠를 설치한 후로는 거실로 밥을 가져와 먹곤 하니까)TV를 틀어 놓은 채로 주문한 룸서비스 음식들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음식들은 특선 생선회와 우동, 후식으로 먹을 치즈케이크와 과일이었다.
민재는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홈바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아까 버틀러가 놓고 간 트롤리를 가지고 온 곳도 바로 홈바 뒤편이었는데,
그 쪽에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버틀러 등 직원들이 오고 가는 문과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이 문을열고 나가자 취사를 할 수 있는 주방과 냉장고, 수건, 타올, 가운, 슬리퍼 등이 깔끔하게 정리 보관되어 있는 수납장이 나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 생수는 물론 탄산수, 탄산음료와 쥬스, 수입 맥주까지 구비가 되어 있었다.
보통 호텔에서 생수를 제외한 냉장고에 있는 음료들은 모두 유료다. 나중 체크 아웃할 때 먹은 음료에 대한 금액을 추가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 그랜드 디럭스 풀빌라에서는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료는 무료로 제공되었다. 뿐만 아니라 홈바에 있는 과자와 간식, 일부 주류도 모두 무료였다.(하긴, 1박에 2천만원이나 하는데 이 정도는 무료 서비스 해줘도 되겠지?)
민재는 냉장고에서 생수와 탄산수를 꺼내 들은 후,
홈바에 있는 와인셀러에서 화이트 와인도 한 병 꺼내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아이하고 일본식 회를 먹는 건 처음이죠?”
민재가 네모난 나무 식기 위에 참다랑어, 강담돔, 긴꼬리벵에돔, 방어, 광어 등을 정갈하게 썰어낸 특선 생선회를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요. 오빠랑 부산 갔을 때 태종대에서 조개구이랑 해산물은 먹었어도 이런 사시미를 같이 먹는 건 처음이에요.”
“아무래도 아이가 일본인이다보니까, 회나 한국에서 파는 일본음식을 먹으러 가자 하기가 조금은 부담되더라구요. 그래도 아까 버틀러 분에게 여쭤보니까, 오늘 룸서비스 중 생선 재료들이 가장 좋은 게 들어왔다고 해서 한번 주문해 봤어요.”
그가 아이의 와인잔에 화이트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가 가지고 온 와인은 얄룸바 리슬링(Yalumba The Y Series Riesling),
호주산 와인으로 마트에서도 구입이 가능한 가성비 좋은 화이트 와인이면서,
그랜드 디럭스 풀빌라의 투숙객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 중 하나였다.
금세 와인에서 나는 화사한 꽃향기와 싱그럽고 달콤한 복숭아 과즙향이 거실에 두루 퍼지는 듯 했다.
“자, 그럼 건배할까요?”
“네, 건배해요, 우리!”
두 사람은 와인잔을 짠, 하고 부딪치고 한 모금 마신 뒤,
젓가락으로 회를 집어 서로에게 먹여주었다.
민재는 고추냉이 섞은 간장에 회를 찍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고,
아이는 초고추장을 찍은 회를 민재에게 먹여주었다.
“음... 역시 사시미를 먹을 때 화이트 와인도 좋지만... 저번에 부산 태종대에서 먹었던 것처럼 소주랑 먹는 게 더 좋은 거 같은데요?”
아이의 말에 민재는 웃음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아이, 이제 정말 한국사람 다 된 거 같아요. 한국 사람들은 회 먹을 때 소주 없으면 느끼해서 못 먹겠다는 사람들 많거든요.”
“헤헤, 이 화이트 와인도 달콤하고 맛있기는 하지만, 역시 사시미에는 씁쓸하고 뒷말 달달한 한국 소주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해요.”
“그럼 버틀러한테 소주 한 병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지금요? 괜찮을까요?”
“뭐, 이런 서비스 누리려고 돈 투자한 거니까, 바로 소주 한 병 가져다 달라고 할게요.”
“오빠, 잠깐... 한 병이면 모자랄 수 있으니까 두 병 가져다 달라고 해요, 우리!”
“하하하, 알았어요.”
민재가 인터폰으로 연락하자 버틀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 분도 안 되어 주문한 소주와 소주잔을 홈바 뒤쪽 문 앞에 놔두고 노크를 하고 돌아갔다.
노크 소리를 들은 민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 오셨나보네?”
“와, 진짜 빨리도 가지고 오셨네요?”
민재가 금방 소주와소주잔을 가지고 거실로 돌아오고,
두 사람은 다시 회와 함께 소주를 나누었다.
“이제 겨우 점심이니까 딱 1병씩만 마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이따 물놀이도 할 거니까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을 거 같아요.”
“네, 딱 한 병씩 좋아요! 원래 이런 상황을 보고 한국 사람들은 각1병 한다, 라고하지 않나요? 흐흐흥~”
“아, 맞아요! 각1병! 이야~ 그 말 대학 때 이후로 진짜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아이는 어떻게 각1병이라는 말 알게 되었어요?”
“어학당 친구들도 가끔 쓰는 말이에요. 수업 끝나고 돌아갈 때, ‘야, 오늘 무리하지 말고 각1병씩만 하고 갈래?’ 외국애들도 이런 말 하고 그러거든요.”
원래 표준어보다 이런 말들이 더 입에 짝짝 달라붙는 법이지. 그래서 외국사람들도 이런 말을 더 쉽게 배우는 편이고.
예전에 민재가 대학 다닐 때 교환학생으로 온 미국인 친구가 그에게 톡으로
‘하이염~ 오늘 뭐하셈?’
하고 보냈을 때 그걸 보고 진짜 자지러지게 웃었던 기억이 났다.
아이가 다소곳이 두 손으로 민재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며 물었다.
“그럼 점심 먹고 우리 뭐할까요?”
“우선 앞에 있는 쇼핑몰 좀 돌아보고 오도록 하죠. 우리 나가 있는 동안 버틀러 분께 부탁해서 풀장에 따뜻한 물 채우고 물놀이 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하고.”
“아, 그게 좋겠어요! 겨울에 하는 물놀이라, 진짜 기대되요!”
두 사람은 소주잔을 가볍게 건배하고는 원샷으로 마무리하고,
또 한 번 서로의 입에 회를 넣어주기도 하고,
통통한 면발이 살아 있는 우동도 함께 먹으면서 (역시 룸서비스라 그런지, 우동도 한 그릇에 3만원씩이나 한다.)
알콩달콩 식사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