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60)

폭우가 오던 그 날,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만난 그날부터는, 비가 오질 않았다.

"...아아, 정말이지. 자네 덕분에 간신히 살았어."

나이가 지긋한 노년의 신사가 내 손을 붙잡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노신사에게 마주 웃으며 붙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별 말씀을요."

적당히 겸양을 떨며 미소를 짓자 노신사도 마주 웃으며 품에서 종이 한 장과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잔뜩 나는 것을 보면 아마 금화일 가능성이 컸다.

백작의 딸을 구해줬으니 어쩌면 당연한 보상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는 많았지만.

"영주 님이 자네 덕에 근심을 덜었다고 아주 좋아하시더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눈앞의 남자는 백작가의 집사장을 맡고 있었다.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가듯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으면서 자신이 꺼낸 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영주님이 직접 작성하신 친필 보증서라네. 자네를 1급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증명서지. 그리고 이쪽 주머니에는 금화 50개가 들어 있다네."

50골드라, 적어도 몇 년은 가게를 닫고 놀고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역시 귀족다운 씀씀이였다.

나는 굳이 빼지 않고 주머니와 증명서를 서랍에 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영주 님께도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불러 달라고 전해주십시오."

"걱정 말게. 영주 님도 자네가 마음에 들었는지 앞으로 백작가에서 취급하는 포션은 모두 자네에게 구매하라고 지시하셨으니 말이야."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친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5년 넘게 드러누워 있었다고 했던가. 반쯤 포기할 정도였다고 했으니 백작 입장에게선 그야말로 천운이었겠지.

문득 연초가 땡겼다.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게 안에서 연초를 태웠겠지만 지금 눈앞에는 집사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그는 계속해서 쓸데없는 잡담을 해대고 있었고, 나는 적당히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집사장은 한참 동안 떠들고 나서야 시계를 확인하더니 호들갑을 떨며 어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안녕히 가시라고 말했다.

집사장이 타고 온 마차에 타기 위해 가게 문을 연 순간 작은 신음을 터뜨렸다.

"앗."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방울이 떨어진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이거. 슬슬 비가 올 모양이로군. 그럼 잘 있게. 다음에 또 오겠네."

"안녕히 가십시오."

고개를 살짝 숙여 배웅하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빙긋 웃고는 그대로 나갔다.

집사장이 문을 열고 바깥에 대기해둔 마차를 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품속에 넣어뒀던 연초를 입에 물었다. 짙은 테로닌 잎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한 번 내뱉자 짙은 회색빛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아지랑이처럼 눈앞에서 일렁이더니 천천히 흩어졌다.

고개를 돌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감상하다 보니 문득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생에는, 약간의 자극과 긴장감이 필요하다고.

나는 지금 그 말에 절실히 동감하고 있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방황하며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이제 와서 마을에 정착했더니 좀이 쑤셨다.

매일같이 평화로운 일상과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만을 상대하다 보니 지루함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예전에 나와 함께 돌아다니던 녀석은 이런 감정을 '외로움'이라고 불렀다.

혼자여서 지루하고, 힘든 거라고. 함께 있는 사람이나 존재가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 같은 놈을 좋아할 법한 여자는 당연히 없으니 연인은 꿈도 꿀 수 없고, 애완동물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별수 없이 애완동물로 키울만한 것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싶은 마음에 끝부분만 남은 연초를 잘근잘근 씹었다. 재가 되어 바닥에 떨어진 불씨들을 발로 짓밟은 다음 적당히 빗자루로 쓸어 쓰레기통에 담았다.

모든 걸 태우고 재가 된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딱 이 꼴 같다고 실소하며 옷을 챙겼다. 답답한 기분에 어디라도 나가서 숨을 돌리고 싶었다.

벽에 걸어놨던 재킷을 꺼내 걸치고 거울에 비친 머리를 가볍게 정돈했다. 이대로 나갈까 싶었지만, 혹시 몰라 조금 전 집사장이 건넨 주머니를 재킷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금화가 두둑이 담긴 주머니의 감촉이 그대로 가슴팍에 전해졌다.

문 옆에 비치해뒀던 우산을 하나 꺼내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방금 전만 해도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는 어느새 굵어져 있었다. 거센 빗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폭우에 나는 조금이나마 답답한 기분이 풀렸다.

쏟아지는 폭우에서 나는 비 냄새를 맡으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서둘러 상품을 안으로 들여놓는 점주들과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다가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는 상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욕하며 물건을 정리하는 사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천천히 길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몇 분이나 걸었을까, 길 구석에 있는 작은 천막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천막을 살짝 벌리고 들어가자 안에서는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상인들을 포함한 모여 있었다. 내게서 포션을 주로 납품받는 상인 곁에 슬쩍 다가가니 그는 놀란 듯이 입을 벌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작게 소곤거렸다.

"그냥 바람이나 쐴 겸 걷고 있는데 꽤 소란스럽길래 흥미가 생겨서 말입니다."

내 말에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흐흐,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죠. 물건이 물건인지라."

그런 그의 대답에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무슨 물건이길래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린 것일까. 고작 해봐야 제도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백작의 영지일 뿐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 나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벼운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상품의 정체를 알게 되자 나는 주변에 모인 이들의 의도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침 제일 앞에 지난번 저희가 공수해왔던 엘프 노예를 사가신 레드몬드 씨가 계시는군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흠."

그의 말에 제일 앞에 앉은 한 남자가 고개를 몇 번인가 깊게 끄덕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기분 좋았는지 사회자가 웃으며 상회에 대한 자랑을 곁들였다.

"흐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희 리키 상회는 늘 최고급의 노예만을 취급합니다. 이번에 준비해온 노예 역시도 비록 엘프는 아니지만 엘프에 버금가는 외모를 가진 소녀입니다."

밖의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목청이 좋은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우며 천을 덮어놓은 상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천을 완전히 벗겨버렸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천이 벗겨졌다. 그곳에는 철창이 둘러져 있는 소형 감옥 안에 갇힌 소녀가 있었다.

"바로 이 소녀입니다! 경매 시작은 3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금화 한 닢이면 4인 가족이 일 년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는 금액이니 시작가부터 상당히 세게 나온 편이었다.

일반적인 노예는 남자 노예가 금화 한 닢에서 두 닢, 여자 노예는 미모에 따라 다르지만 두 닢에서 네 닢 정도에 거래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시작가부터 3골드라는 것은 어쩌면 여섯 닢 정도는 가볍게 넘기는 가격이 나올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감옥 안의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흔치 않은 보랏빛 머리카락. 뚜렷한 이목구비와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눈 코 입.

대략 열두세 살쯤 되었을까.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앙상하게 마른 팔과 다리임에도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가슴팍과 허벅지에서는 묘한 색기가 흘렀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의 몸을 훑어보다 위화감을 찾아낸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텅 빈 듯한 공허한 눈.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루함에 연초를 태워대던 조금 전의 나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소녀의 몸값은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었다.

"3골드40실버."

"3골드55실버."

"3골드80실버."

어느새 4골드를 향해 쭉쭉 올라가던 소녀의 몸값은 5골드를 조금 넘긴 시점에서 조금씩 정체되기 시작했다.

"5골드 25실버 나왔습니다!! 후후, 이제 올라가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으니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이 소녀는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습니다. 처녀성의 가치를 아시는 분들은 다시 한번 경매에 참여해주시길."

사회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덧붙이자 주변에 있는 몇몇 기분 나쁜 돼지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처녀 페티쉬라도 있는 건가.

"5골드 60실버."

"5골드75실버."

"6골드."

어느새 6골드를 넘어 7골드를 향해 가자 사회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몇몇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이 광란의 열기에 심취했고, 몇몇은 애초부터 경매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해서 추잡한 시선으로 소녀의 허벅지와 가슴팍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 다른 부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등, 그리고 옆구리를 훑어본 나는 그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가 어쩌다 이런 노예 시장에 출품됐는지는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행운이었다.

"10골드."

내 옆에 있는 남자가 6골드 40실버를 외친 직후, 내 목소리가 천막 안에 울려퍼졌다. 방금 전에 나온 가격만 해도 일반 여자 노예를 두 명은 살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갑작스레 튀어나온 10골드가 경매의 흥을 깨버렸다.

"...10! 10골드 나왔습니다! 더 하실 분 안 계십니까?"

사회자가 부추겨봤지만 이미 흥이 깨진 경매장에서 더 부르려고 하는 손님은 없었다. 그저 나를 힐끔거리며 내가 누군지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올 뿐.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사회자에게 다가갔다. 내 앞에 있던 상인들은 나를 훑어보며 천천히 길을 비켜주었다. 사회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지원하지 않자 사회자가 낙찰되었음을 알렸다.

"그, 그럼 10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람들이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상인들이 완전히 빠져나가자 나는 품에 있던 주머니에서 금화를 열 닢 꺼내 사회자에게 건넸다.

그런 내 행동이 사회자에게는 미심쩍어 보였는지 그는 금화를 살짝 깨물어보았다.

잇자국이 남으며 파인 금화를 보며 사회자는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살짝 숙여 사과했다.

"하하...죄송합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별의별 일을 다 겪다보니. 그건 그렇고 처음 뵙는 분이 노예를 낙찰해 가시는건 되게 오랜만이네요."

"평소에도 이런 가격에 팔립니까?"

"그럴리가요. 지난번에는 엘프라는 특수성이 작용해서 17골드까지 올라갔지만 일반적인 인간 여자 노예는 5골드 전후에서 거래됩니다. 가끔 처녀의 유무에 따라 1~2골드 정도는 프리미엄이 붙기도 하죠."

확실히 경매 도중 처녀라는 말을 듣고 눈이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 놈들이 몇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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