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골드. 이 돈이면 여자 노예를 다섯은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 돈을 고작해야 어린 여자 노예 한 명 사는데 썼다고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색한 졸부의 돈낭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흐릿하게나마 보였기 때문이다.
감옥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옆구리에 달려 있는 자그마한 보랏빛 날개가 말이다.
물론 날개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 사이에 파묻혀 있긴 하지만 자그마한 뿔도 두 개 솟아 있었다.
일반인들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마나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소녀의 정체를 파악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 당장 '물건'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 물론이죠. 그런데 그 전에 주인 인식 작업이 필요해서 그런데 손 좀 딸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노예들의 목에 채워진 구속구는 '주인'의 마나를 인식해서 반응한다. 노예들이 주인의 명령에 거부하지 못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사회자는 능숙하게 내 손을 따서 피 한 방울을 손수건에 적셔 철창 속에 있는 소녀의 구속구에 댔다. 구속구는 순간적으로 푸른 빛을 내더니 금새 꺼졌다.
"이걸로 인식 작업은 완료 되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어지간하면 구속구는 풀지 마시고요. 그럼, 즐겁게 즐기십시오."
사회자는 기분나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감옥의 문을 열고 소녀를 끌고 나왔다.
흐리멍텅한 눈과는 대비되게 그녀의 옆구리는 여전히 반짝이는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물론 나 말고는 볼 수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맞잡았다.
소녀는 잠시 움찔했지만 단지 그 뿐, 더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소녀의 태도가 불만족스러웠는지 사회자는 점짓 인상을 쓰며 그녀에게 다그쳤다. 적의가 담긴 그의 목소리에 소녀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
"네 새로운 주인님한테 태도가 그게 뭐냐. 빨리 똑바로 인사드려."
어깨죽지에 보랏빛 날개를 가진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특유의 미성은 감출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저는 아이린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주인님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드릴 것을 맹세드리니 부디 편하신대로 저를 사용해주십시오."
그제서야 사회자는 마음에 들었는지 실실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기본적인 지식은 저희 단원들이 모두 주입시켜놨으니 실수할 일도 없을겁니다. 안심하고 마음껏 즐기시면 됩니다."
처녀인 성노예라고 하더라도 기초적인 성교육이나 봉사를 위한 훈련은 받는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추잡한 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하며 나는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가냘프기 짝이 없는 손가락들이었다. 누군가에게 맞거나 긁힌듯한 붉은 흉터들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아이린은 넝마에 가까운 갈색 가죽 천조각만을 입고 있었기에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었다.
소란을 떨던 구경꾼들이 사라졌기에 밖의 거센 빗줄기가 천막을 두들기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물론이죠. 혹시 다음에도 노예를 구매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 리키 상회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몸을 90도로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하는 사회자의 배웅을 뒤로한 채 나는 들어오는 길에 꽂아놨던 우산통에 이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우산을 꺼냈다.
혼자서 쓰기에는 크고, 둘이서 쓰기에는 작은 우산이었지만 그럭저럭 비를 피할 정도는 되었다. 우산을 펴고 내 손을 잡은 아이린과 내 머리 위에 우산을 씌우자 내 왼쪽 어깨에 빗물이 튀겼다.
그래도 아직 작은 아이라 그런지 비로 젖는 부분은 적은 편이었다. 성인 두 명이 썼다간 완전히 생쥐꼴을 면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이린은 금세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
하지만 그녀는 연신 내 왼쪽 어깨를 힐끔거렸다. 본인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위에서 보면 다 보였다.
딱 봐도 몸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애가 이런 폭우까지 온 몸으로 맞았다가는 감기에 걸릴게 분명했다. 그녀의 몸으로는 감기조차도 제대로 버티기 힘들어 보였기에 적당히 선행을 베풀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연신 힐끔거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린은 내 어깨가 젖는 것이 신경쓰였는지 아무 말 없이 방금 전보다 거리를 좁혀서, 거의 내 허리에 딱 달라붙은 채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왼쪽 어깨도 거의 젖지 않을 수 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리를 한참 걷는 동안 아이린도, 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야기할만한게 없었다. 당장 오늘 만난 노예와 주인에게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육체의 대화라면 또 모를까.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상가들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빵가게, 음식점, 보석상, 과자 가게 등, 반 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며 몇 번이나 보거나 갔었던 곳들이었다.
문을 열고 있는 곳은 유일하게 음식점 뿐이었다. 식사 도중에 비가 왔는지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젊은 모험가 파티의 모습이 보였다.
연장자로서 꽤나 흐뭇한 풍경이었다. 아마 저 모험가 파티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한숨을 내쉬며 빗속을 뛰어 여관까지 달려갈 것이다. 왠지 모르게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즐거움과 행복은 아니지만,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그런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늘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날이었다. 매일같이 지루함이라는 허기에 굶주린 나였기에 이런 소소한 일들조차 몹시 즐거웠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살아있다'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내 피부에 맞닿은 사람의 온기가 있으며, 내 기억을 되짚으며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운이 꽤나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거세게 불어오는바람에 우산을 고쳐쓰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산을 쓰고 있다고는 해도 거센 바람과 폭우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옆의 소녀는 내 보폭에 뒤쳐지지 않고 제대로 따라와주었다.
가게로 돌아온 나는 잠궜던 문을 조심스레 열쇠로 열고 아이린을 먼저 들여보냈다. 우산을 접어 통에 꽂아놓고, 다시 문을 닫았다. 거센 바람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직 낮이었지만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서인지 가게 안에는 빛이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가게 위에 설치된 등을 키고 성냥으로 양초에 불을 붙이자 그제서야 좀 시야가 밝아졌다.
나는 아이린을 데리고 가게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굳이 가게와 집을 분리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가게의 안쪽에는 방 세 개와 창고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규모가 꽤나 커졌지만 이전에 활동할 때 꽤나 많이 모아뒀기에 딱히 돈에 쪼들린 적은 없었다. 나는 내가 쓰던 방에 여분으로 뒀던 이불을 꺼내 비어있던 방에 깔았다.
제대로 된 침대를 주문하려면 하루 이틀 정도는 걸리리라.
그리고 나는 아이린을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평범한 옷장과 침대, 탁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다소 삭막한 방이었지만 아이린은 그조차도 신기했는지 연신 방의 가구들을 힐끔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아이린에게도 손짓해 내 옆에 앉도록 했다. 사실 그녀를 구매한 것 역시 즉흥적인 것이라 그녀를 어떻게 다뤄야할지 고민됐다.
우선 그녀는 확실하게 서큐버스가 맞다. 과거 모험가로 활동할 때 그녀의 것과 같은 날개를 가진 존재와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린의 몸은 아직 다른 서큐버스들처럼 글래머스럽지도, 남자 여럿 잡아먹을 요물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제대로 보살핌 받으며 2~3년 정도만 성장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문제는 아이린에게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냐는 점이었다. 만약 그녀가 3년 정도만 시간이 있었다면 서큐버스의 힘을 본격적으로 사용해 이렇게 노예로 잡힐 일도 없었으리라.
꿈과 허상을 거니는 몽마가 인간이 만든 감옥에 갇힌다는 것이 애초부터 우스갯소리였다.
다만 그녀는 아직 제대로 마나를 다룰 줄도 모르고 서큐버스의 힘을 사용할 줄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냥 인간으로 착각한 노예상은 그녀를 냉큼 포획해서 이렇게 팔아치웠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굳이 내가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아이린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그녀의 목에는 노예의 구속구가 채워 있었기에 내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 일체 불가능했으며 내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약점을 잡을 필요도 없는 이상, 그녀에게 경계를 살 수 있는 발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아이린은 나를 그냥 돈이 조금 많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테니 말이었다. 이 정도가 적당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아이린을 쳐다보니 아이린은 어느새 내가 그녀에게 걸쳐줬던 재킷을 개어 침대 구석으로 밀어놓았고 넝마 같은 가죽옷을 반쯤 헐벗고 있었다.
비쩍마른 앙상한 팔과 허벅지였음에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색기가 흘렀다. 몸에 흉터가 남아있고, 저렇게 말랐는데 이 정도라면 대체 제대로 성장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내가 옷을 헐벗고 있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침대 시트에 머리를 조아렸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이지만 주인님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마저 옷을 벗으려는 아이린의 팔을 낚아챘다. 몸이 식었는지 차가운 팔뚝이 덜덜 떨리는게 그대로 전해져왔다. 두려움, 공포. 그런 감정들이 가득 담긴 눈동자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어린애를 탐하는 취미 따윈 없다."
내 말에 아이린의 표정이 일순 정지했다. 완전히 굳은 채 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아이린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럼 저를 구매하신건..."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홀로 생활하는게 쓸쓸해서겠지."
내 말에 아이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의 진위를 의심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향해 뻗었다.
아이린은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곧바로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감았다. 주인에게 말대꾸를 하는 노예라며 내가 뺨이라도 때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예상과 달라 유감이었겠지만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고는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손에 느껴지는 미열에 나는 그녀를 침대에 내버려 두고 가게의 진열장에 전시해뒀던 포션을 두 개 조합했다.
보라빛 포션과 녹빛 포션을 조합하자 옅은 회색빛 포션이 만들어졌다. 비주얼은 좀 그렇지만 감기에는 꽤나 효과가 좋을 것이었다.
"모두 마셔라."
아이린이 보기에도 포션의 비주얼은 좋지 않았는지 포션병을 보고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지 꼴깍거리며 포션을 모두 마셨다.
비주얼과 달리 맛은 꽤나 괜찮았는지 아이린은 신기하다는듯이 텅 빈 약병을 흔들었다. 그런 어린애 같은 행동에 나는 피식 웃으며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크기 조절 마법'이 걸려있는 옷이 몇 벌 걸려 있었기에 잠옷으로 입을 수 있을 법한 바지와 셔츠를 아이린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옷을 받고도 멀뚱거리며 서 있길래 나는 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명령하고 방에서 잠시 나왔다.
아직 어린 여자애의 옷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봐야 할 정도로 굶주리지는 않았다. 본다고 해봤자 별 감흥도 없겠지만 말이다.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그녀가 서큐버스라는걸 알고 있는 이상 그녀에게 느껴지는 색기는 내 감정이 아니라 모든 남성의 공통적인 욕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속옷도 새로 사야겠고... 할 게 많겠군.'
주변 이웃들에게는 아이린의 존재에 대해 뭐라고 변명해야할 지 역시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지금까지 내가 도시에서 쌓은 평판은 꽤나 괜찮은 편이었으니 아이린의 목에 찬 구속구만 안 보이게 한다면 적당히 둘러대도 다른 사람들은 믿어줄 것이었다.
"....저, 다 갈아 입었어요."
내가 준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린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는 아이린에게서 군데군데 구멍까지 뚫려 있는 가죽옷을 받아 쓰레기통에 던지고 품에 넣어뒀던 포션병과 면봉을 하나 꺼냈다.
방금 전에 조합했던 병과 달리 분홍빛을 띠는 포션병은 마개를 따자 향긋한 로즈마리 향기가 방 안을 가득채웠다.
아이린은 몽롱한 표정으로 약병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린의 셔츠 왼쪽 팔뚝 부분을 걷어올렸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아이린이 무의식적으로 몸을 빼며 날 거부하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면봉을 약병에 넣어 살짝 적셨다가 아이린의 흉터가 남아 있는 부분에 살살 바르기 시작했다.
"...으읏...하읏..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