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60)

"...하앙...흐윽...흐응..."

제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주인님은 제 몸에 남아있는 상처와 흉터에 약을 순서대로 바르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달 전에 직원에게 구타당하고 남은 흉터, 빈민가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다 베인 상처, 잠을 자다 옆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에 살짝 데인 흉터까지도 말입니다.

약을 바를 때마다 참기 힘든 고통이 온 몸을 쑤셨지만 저는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최대한 버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중간부터는 의식이 혼미해지기 시작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완전히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절하기 직전, 저는 속으로 상처에 이상한 약을 바르며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즐기는 변태 주인에게 오게 됐다며 신세 한탄을 했지만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창밖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그제서야 눈을 떴다. 밤늦게까지 창고에서 문헌을 뒤적거리다 잠들어서 그런지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목을 한 번 돌리며 몸을 푸니 우두둑 소리가 났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니 벌써 창밖에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살짝 뜬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자기 전에 창가에 쳐뒀던 커튼을 걷었다.

미약한 풀 내음과 함께 갓 구운 빵과 옅은 치즈 냄새가 풍겼다. 옆집의 아침은 빵과 치즈인 모양이었다.

욕실로 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세면대에서 푸른 마법진이 떠오르며 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볍게 세안을 하고 손을 씻은 뒤 수건으로 얼굴을 닦자 비로소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만 잠들었던 평소와 달리 늦잠을 잔 덕일까, 배가 공복을 짙게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준비해야 할 입이 하나 더 있었기에 나는 천천히 내 방 문을 열었다.

미약한 숨을 반복해서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린을 보고는 조금 더 자게 놔둘까 싶었지만 이미 반나절이 넘게 잤기 때문에 슬슬 깨우기로 했다.

아이린의 가느다란 팔을 붙잡고 몇 번 흔들자 그녀가 흐리멍텅한 눈을 떴다.

깜박, 깜박, 두 번 눈을 떴다 감더니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멍하니 있던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자 그제서야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아이린에게 나는 적당히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그것보다, 상처는 어떠냐."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팔을 걷어 상처를 내게 보여주었다. 확실히, 어제만 해도 붉게 물들어 있던 상처는 어느새 옅은 핑크빛을 띠며 살이 아물어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포션의 효과를 잘 받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마족이라 마나가 담긴 물건에 대해 적응력이 높은 것일지도.

아이린은 자신의 팔뚝에 난 상처가 아문게 신기했는지 팔을 연신 흔들며 감탄하고 있었다. 어린애 같은 그녀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섰다.

내가 방에서 나가자 아이린이 허둥지둥 침대에서 나와 내 뒤를 따르는게 기척으로 느껴졌다. 쭈뼛쭈뼛거리면서도 내 뒤를 따라오는게 꼭 상처입은 들개를 키우는 기분이었다.

"의자에 앉아있으렴."

내 말에 아이린이 거실 탁자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배가 고픈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하긴, 노예가 배불리 먹어본 적이 있을리가 있나.'

노예상인들은 노예를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식사를 넉넉하게 주지 않는다. 허기로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천천히 복종심을 유발하는 짓은 그리 드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빈 속에 갑자기 고기를 넣으면 탈이날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점심이나 저녁이 아니라 아침이니 간단하게 스프와 빵으로 때울 생각이었다.

가볍게 손을 튕기니 붉은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며 장작에 불을 지폈다. 철판 위에 냄비를 올리고 물 약간을 넣은 뒤 곱게 빻은 밀가루를 물에 풀고 천천히 저었다.

가루가 완전히 풀어지면 천천히 물을 조금씩 더 부으면서 준비해둔 옥수수 열매들을 털어넣고 천천히 볶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열매들이 볶아지면 거기다 우유를 넣고 천천히 휘저으며 열매들을 빻으니 연한 노란빛을 띠는 스프가 완성되었다.

마무리로 타프린 잎을 갈아만든 가루를 살살 뿌리고 생크림을 부은 뒤, 소금을 조금 더 쳤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스프를 국자로 떠서 살짝 맛을 보니 꽤나 괜찮은 맛이었다. 부드러운 목넘김과 식감이 좋은 옥수수까지.

입이 하나 더 늘어난만큼 적당히 양을 늘리려 했지만 생각보다 스프의 양이 많은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여차하면 내가 다 먹어치우면 되겠지.'

맛있는 냄새를 맡았는지 아이린이 냄비를 빤히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보랏빛 눈동자가 연신 번쩍이며 금방이라도 냄비에 달려드려는 것 같았지만 내 명령 때문인지 의자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는 실소를 지으며 냄비 손잡이를 잡은 채 탁자 위로 옮겼다. 냄비 밑에작은 나무 판을 하나 깔고 냄비를 올리자 그윽한 콘스프 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이린은 이미 냄비 안의 스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접시를 들고와 국자로 스프를 가득 담아준 다음, 스푼을 하나 건네주며 식사를 권했다.

"한 번 먹어봐."

아이린은 나와 스프를 번갈아보더니 스푼을 들어 스프를 살짝 떠서 입 안으로 가져갔다. 호로록, 스프를 한 모금 마신 아이린의 표정이 상당히 묘하게 변했다.

마치 벌레만 잡아 먹다가 빵을 처음 먹어본 원주민 같다고 할까. 혀로 입술을 핥으며 내 눈치를 보는 아이린이었다.

"내 신경은 쓰지말고 마음껏 먹어. 잠깐 나갔다올테니 부족하면 얼마든지 냄비에서 더 떠먹고."

내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스프를 스푼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급하게 먹는지 스프가 그녀의 옷에 다 튀었지만 누가 뺏어갈새라 허겁지겁 먹는 그녀를 말리기에는 그녀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였기에 식사예절을 가르치는 것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스프를 흡입하기 시작하는 아이린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온 나는 바로 반대편 거리에 있는 빵집을 찾아갔다. 갓 구운 고소한 빵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오오, 방금 전에는 플로라가 오더니 이번에는 루디 씨로군. 오늘도 늘 먹던걸로?"

"아, 오늘은 좀 넉넉하게 주십시오. 집에 입이 하나 더 늘어서 말이지요."

평소와 다른 내 대답에 빵집 주인인 크루거의 표정이 갑자기 음흉해져서는 내게 다가와서 귀에 속삭였다.

"어이쿠, 혹시 이거요?"

그렇게 말하며 새끼손가락을 흔드는 크루거에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리가요. 그냥 친척의 애를 당분간 맡아주게 되서 말입니다."

내 말에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크루거는 내가 내민 가죽 주머니에 빵을 가득 담아 주었다.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점심 때도 적당히 빵으로 때우면 된다는 생각에 그냥 그대로 값을 치렀다.

"대동화 두 개만 주쇼."

"여기 있습니다."

이만한 양에 대동화 두 개 라니. 너무 싼 게 아닌가 싶었지만 크루거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동화를 통에 넣고는 나를 배웅했다.

크루거네 빵집의 빵 맛은 어지간한 귀족가의 고급 빵집에 비해서도 꿀리지 않는 맛이었기에 전부터 계속 애용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고급 과자점에서 제빵 기술을 배웠지만 모함을 받아서 쫓겨났다던데, 털털하고 익살스러운 그의 태도를 보면 누군가에게 모함을 받았다는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빵을 가득 담은 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자 어째서인지 아이린은 고개를 탁자에 박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내가 아이린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나는 냄비 안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나 잘 먹었는지 싹싹 긁어 먹어치웠다.

'그걸 다 먹었어?'

적어도 성인 3명분은 되는 양이었는데. 생각보다 먹성이 대단했다.

아니, 이때까지 굶주린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겠지. 마음껏 먹으라고 한 것은 나였으니 그걸로 아이린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스프를 다 먹어치우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얼굴을 붉힌 채 탁자에 고개를 쳐박고 있었다. 양 손으로 뺨을 가리고 있는게 꽤나 귀여웠다.

더 이상 아이린이 부끄럽지 않도록 나는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빵을 사왔는데 조금 먹어볼래? 스프만 갖고는 모자랄텐데."

아이린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뇨... 스프를 많이 먹어서 괜찮습니다."

하지만 대답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이린의 배에서는 배꼽시계가 성대하게 울렸다. 꼬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가뜩이나 붉던 아이린의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토마토마냥 붉어졌다.

"사실대로 말해."

내가 '명령'을 하자 아이린의 입이 씰룩거렸다. 아이린은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기 위해 저항했지만 결국 구속구의 반발력을 견딜 수는 없었는지 진심을 토해냈다.

"사실 스프를 먹어서 그런지 공복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습니다...빵도 먹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완전히 절망에 빠진듯한, 그 공허한 눈은 어제의 것과 비슷했지만 고작해야 배고프다는 걸 들켰다는 정도로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게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나는 아이린이 빵을 먹기 좋게 썰어 주었다.

빵만 먹는 것은 꽤나 퍽퍽할테니 찬장에 넣어뒀던 치즈를 한 덩이 꺼내 방금 아이린이 먹어치운 스프 그릇에 넣고 우유를 살짝 넣어 끓였다.

퐁듀마냥 끈적하게 녹아내린 치즈 덩어리는 어느새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 안에 아까 쓰고 남은 빻은 옥수수 가루를 살짝 털어 넣었다.

달콤한 치즈 냄새를 풍기는 냄비를 다시 탁자 위에 올리고, 아이린이 먹기 편하도록 썬 빵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주자 그녀의 눈이 언제 썩어들어갔냐는듯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난 신경쓰지말고 편하게 먹어. 오늘부터는 네가 해야 할 일도 있으니 말이야."

이 어린 애한테 힘든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간단한 비질이나 걸레질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청소같은 집안일을 천천히 시킬 생각이었다.

아마 아이린도 그냥 놀고만 있으면 마음이 불편할테니 적당히 힘들지 않은 일감을 준다면 아이린도 부담을 느끼지 않으리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린은 빵을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다람쥐가 볼 안에 도토리를 우겨넣는 것 마냥 뺨이 미어터질 정도로 빵을 집어넣고는 급하게 씹어먹었다.

그렇게 빵을 먹어대다 결국은 목이 매였는지 가슴팍을 톡톡 치더니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가에는 눈물까지 살짝 고여 있었다.

"빵만 먹지말고 이 치즈에 찍어 먹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내가 시범적으로 잘게 찢은 빵을 콘치즈 소스에 찍어먹자 아이린은 내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고, 이런 소스를 처음 먹어봤는지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빵을 먹었다.

다행히 스프를 먹으며 어느 정도 배를 채웠는지 아이린은 받아온 빵의 절반 정도(?) 밖에 먹어치우지 않았다. 나는 남은 빵을 적당히 소스에 찍어 먹으며 공복을 달랬다.

사실 아이린이 복스럽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어찌나 거침없이 빵을 먹어치우는지, 먹는 내내 크루거에게 돌아가 빵을 더 받아와야 하는게 아닌가 고민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내 고민은 다행스럽게도 빵을 절반 정도 먹어치우고는 완전히 뻗어버린 아이린을 보며 사라졌다.

자기 딴에는 조신하게 먹는 태도를 보여주겠다고 그랬는지 입을 작게 벌리고 빵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그 작은 입으로 순식간에 빵을 먹어치우고 곧바로 다음 빵으로 넘어가는 아이린의 모습은 마치 예전에 수도에서 봤던 많이 먹기 대회에 나온 남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뭐,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행복해하는걸 보면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이 들었다. 전과는 달리 나도 꽤나 나이를 먹었는지 어린애들을 보면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챙겨주고 싶고, 배불리 먹이고 싶은 마음 말이다. 뭐, 일반적인 어린애는 아니긴 하지만.

의자에 앉은 채 아침의 포식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아이린을 잠시 내버려 둔 채 나는 남은 빵이 든 주머니를 묶어 찬장에 넣었다.

치즈 소스가 묻어 있는 냄비는 욕실에 들고가서 손을 한 번 튕기니 새하얀 마법진이 그려지며 물이 냄비에 쏟아지며 한 번 헹구더니 새하얀 거품이 일어나 냄비를 가득 채웠다.

이윽고 다시 한 번 물이 쏟아져 거품을 모두 씻어내니 냄비는 완전히 깨끗한 처음의 상태로 돌아왔다. 냄비에 묻은 물을 몇 번 털어내고 다시 부엌의 찬장 위에 올려놨다.

냄비를 돌려놓고 오자 아이린이 해맑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이 애한테는 뭐부터 가르치는게 좋으려나.

 당장 시장 주변의 건물들 사이 사이의 벽만 봐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고아들은 숱하게 볼 수 있다. 부모가 원치 않는데 생긴 아이, 산적들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고 도시로 들어온 화전민, 성노, 혹은 창녀에게서 태어난 아이 등등.

도시 외곽의 빈민가에서 살아가기에는 힘이 부족해 시장 구석에 앉아 구걸을 하거나 가끔씩 막노동을 하고 볼품없는 품삯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빈민가에는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조직이나 갱들이 있었기에 아직 어린 고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생충처럼 도심에 사는 사람들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것 뿐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미래는 보통 두 가지였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은 채 모두에게 잊혀가거나, 우연히 얻은 인맥으로 자신을 보호해줄 조직의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는 것. 하지만 아주 드물게 두 가지 모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는 마음씨가 무척 좋은 사람에게 거둬지는 것.

'나'는 그런 운 좋은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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