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60)

나는 구석에 있는 청소용구함을 열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아이린에게 건넸다.

"우선 가게 앞부터 쓸고, 다 쓸고 나면 여기 탁지 밑이랑 진열장 밑까지 쓸거라. 진열장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진열장에 전시된 포션들은 대부분 하급 포션이라 깨져도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만약 아이린이 넘어지는 진열장에 있는 포션을 실수로 뒤집어 쓰기라도 한다면 꽤나 일이 복잡해질 터였다.

아이린이 내게 건네받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각각 손에 쥔 채 가게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나는 문득 다른 사람들이 아이린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이린이 나가는 것을 제지했다.

"잠깐만."

나는 부드럽게 아이린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구속구에 손을 갖다댔다. 목을 젖힌 아이린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비열한 뱀은 당신의 눈을 사로 잡으니, 다른 그 무엇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중얼거림이 끝나자 검은 마법진이 아이린의 구속구에 나타나더니 마치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아이린은 방금 전 내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뻣뻣한 입술을 움직였다.

"주, 주, 주인니임...?"

아직 어린애라 그런지 신체 접촉에 내성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어릴 때 당했던 폭력이나 구타가 트라우마로 남아 신체 접촉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마법진이 제대로 발동한 것을 확인한 나는 아이린의 목덜미를 놓아주었지만 아이린은 여전히 몸을 덜덜 떨며 황급히 내게서 떨어졌다.

흠, 고양이 같구만.

"혹시 다른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내 친척이라고 하거라.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삼촌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내 말에 아이린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자신의 목에 찬 구속구를 다시 한 번 쳐다봤지만 나는 별 말 하지 않고 문을 열어 아이린을 가게 밖으로 쫓아냈다.

입을 삐죽 내민 아이린이 가게 앞을 쓸기 시작한지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아이린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옆집 소녀 플로라였다.

플로라의 어머니는 영주관 옆에 있는 고급 의상점에서 옷을 제작하는 일을 하곤 하는데, 나도 몇 번인가 그곳에 가서 주문제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덕에 플로라는 가끔씩 내 집에 찾아와 어머니가 해준 찬거리를 전해주고 가곤 했다. 꽤나 밝고 착한 아이라 나도 몇 번인가 선물을 챙겨준 적이 있는 아이였다.

마나석이 박힌 목걸이라거나, 마석으로 만들어진 반지 같은 내게는 필요없는 장식품 말이다. 물론 정작 플로라는 그게 마나석과 마석이란 것도 모른 채 그냥 보석이라는 사실에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 정신을 집중해서 창 밖의 대화를 엿들어 보기로 했다.

"어머. 처음 보는 아인데, 넌 누구니?"

플로라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아이린에게 달라붙자 아이린은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말을 더듬었다.

"아, 아이린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 후훗. 그런데 넌 왜 루디 씨 가게 앞을 쓸고 있는 거니?"

플로라는 아이린이 귀여웠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친화력이었다.

"주인...아니, 어제부터 삼촌과 함께 살게 되서 일을 조금씩 돕기로 했어요."

"어머, 루디 씨 친척이었구나. 흠흠. 루디 씨는 가족 이야기 같은 건 별로 해주지 않으셔서 이런 귀여운 친척이 있는줄도 몰랐어."

보아하니 플로라가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거절하기엔 용기가 없었는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아이린이 당황하는 모습을 감상할까 싶었지만 금새 울기 일보직전이 될 것 같았기에 별 수 없이 나는 엿듣기를 그만두고 가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아이린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플로라의 모습이었다.

"어머, 루디 씨."

플로라는 아이린과 정반대의 소녀라고 볼 수 있었다.

아이린의 짙은 보랏빛의 단발과 달리 꿀과 같이 반짝거리는 금발을 길게 길렀다.

성격은 활발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좋으며, 무엇보다 내년이면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나이인만큼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성숙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플로라의 어머니도 상당히 가슴이 컸었지. 아마 그 부분은 유전일지도.

다만 플로라의 엄마는 상당히 날카롭고 깐깐한 이미지였다. 물론 옷가게 단골이 되고나서부터는 갈때마다 화사하게 웃어주며 립서비스를 해주긴 한다만.

산다는건 고달프구만.

"루디 씨! 이런 귀여운 애가 친척중에 있었으면 말씀해주셨어야죠!"

플로라는 아이린을 꽉 끌어안은 채 아이린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대기 시작했다. 아이린의 얼굴이 꽤나 붉어진 걸 보니 이런 일에 대해 저항력이 전무해 보였다.

"굳이 이야기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뿐이야. 아이린, 슬슬 가게 안도 쓸거라."

내 말에 아이린이 도망치듯 플로라의 품에서 빠져 나와서는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얼마나 부담스러웠던 거야. 아이린이 가게 안으로 도망가는 것을 본 플로라가 쿡쿡 웃었다.

"부끄럼이 많은 아이네요. 꼭 루디 씨처럼."

"조만간 너희 어머니를 한 번 만나뵈야겠는데. 딸이 자기 나이 두 배는 되는 어른을 놀린다고 말이야."

내 말에 플로라의 웃음이 멈췄다.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입꼬리가 살짝 굳은 걸 보니 어머니가 어지간히 무서운 모양이었다.

"...농담이죠, 루디 씨?"

"글쎄. 과연 어떨까."

"칫, 루디 씨는 정말 치사하다니까."

투덜투덜대는 플로라는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루디 씨, 켈튼 아저씨가 말하길 루디 씨가 지난 밤에 동쪽 홍등가에서 나오는걸 봤다던데요?"

그렇게 말하는 플로라의 표정을 보니 어째서인지 방금 전 아이린에 대해 물어보던 크루거의 표정과 겹쳐 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나는 플로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적당히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었고, 아내도, 여자 친구도 없는 나는 창관을 들락거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영지 안에 있는 젊은 모험가나 기사들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창관을 찾았다.

그에 비해 나는 아주 가끔 사람의 살내음이 고플 때만 창관을 찾곤 했다. 성욕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지독한 권태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창관을 찾았다.

그런 내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플로라가 볼을 부풀리며 내게 훈계했다.

"정말이지, 좀 더 부끄러워 하던가 그런 적 없다고 발뺌을 하셔야죠. 그렇게 당당하게 인정하시다니."

"딱히 문제 되는 행동도 아니잖아."

홍등가의 창관과 도박장, 투기장은 모두 영주의 허락 하에 운영되고 있었다. 법에 저촉되거나 하는 점은 전혀 없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하아."

플로라는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럼 뭐가 문젠데 그러냐."

"이해가 안가서 그렇죠. 루디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아가씨들만 해도 한 다스는 될걸요? 당장 꼽아만 봐도 물레방앗간 에밀리랑, 시청에서 일하는 아르웬 언니랑, 기사단장 딸인 네르멘까지. 다들 저 볼때마다 루디 씨랑 좀 이어달라고 그런다구요."

"나랑 띠동갑인 애들을 상대로 무슨."

에밀리랑 네르멘은 둘 다 플로라보다 한 살 많았다. 이제 막 성인으로 인정받은 소녀들이었다. 대체 그런 소녀들이 날 왜 좋다고 하는지는 몰라도 나이 차이가 너무 심했다.

그나마 시청 직원인 아르웬이 나와 여덟 살 차이였지만... 그녀 역시도 나이 차이가 꽤나 많이 났다.

"원래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 좀 많은건 당연한거라니까요. 당장 저희 엄마랑 아빠만 봐도 일곱 살이나 차이 나잖아요."

플로라가 답답하다는듯이 가슴을 통통 치며 내게 조언했지만 나는 한 귀로 흘리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생각은 해볼게."

"정말이지... 여자에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굴면서도 엄청 까다롭다니까."

"남의 연애 사정은 신경 끄고 네 걱정이나 하시지."

그러고보니 플로라도 꽤나 인기가 많았던걸로 기억하는데. 또래 애들에 비해 훨씬 성숙한 몸매와 특유의 활발한 성격 때문에 꽤나 구애를 많이 받았던 걸로 알고 있다.

"그러고보니 바크가 너한테 고백하지 않았었냐?"

바크는 이 영지에서는 꽤나 유명한 브리튼 상단주의 아들이었다.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좋은 편이라 동네 여자애들의 여심을 홀리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약초 거래를 위해 몇 번인가 브리튼 상단을 찾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때 아버지 일을 돕는다며 대화를 했었을 때 썩 괜찮은 남자애였던걸로 기억한다.

소위 말하는 완벽한 놈이라는 거다.

"네. 그랬긴한데......"

말꼬리를 늘이며 시선을 돌리는 걸 보아하니 플로라가 찬 모양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일등 신랑감일텐데.

"너희 어머니도 화내셨을 것 같은데."

"브리튼 상단에 고급 의상을 납품할 수 있는 기회인데 왜 그걸 걷어찼냐고 두들겨맞긴 했죠."

내가 플로라의 부모였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연애야 본인 마음이라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크는 차이고 뭐라 하던?"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가던데요."

쯧쯧. 아마 바크 녀석이 처음 한 고백이었을텐데. 다음에 만나면 술이라도 한 번 사줘야겠다.

"뭐, 네가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뜸 들이다가는 노처녀 되기 십상이니 적당히 해라."

"그 때는 루디 씨가 책임져주시면 되겠네요."

싱글벙글 웃으며 은근슬쩍 팔짱을 끼려하는 플로라의 마수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바크한테가서 책임져 달라 그래라. 난 식객 하나만 해도 벅차다."

내 대답에 플로라는 삐졌는지 연신 투덜대더니 혀를 내밀고는 '루디 씨 완전 바보 멍청이!'라고 외치며 자기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쾅!하고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정신 없기는."

시끄럽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끔은 의자에 앉은 채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손님이 없는 날이면 하루 종일 대화를 할 기회가 없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그녀와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과장스럽고, 스킨쉽이 과하지만 착한 아이였다.

나는 품에 넣어둔 연초를 꺼냈다.

가볍게 불을 붙이고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자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라 생각하며 연초를 태우는 동안에는 오랜만에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플로라와 헤어진 후, 연초를 모두 태우고 가게 안으로 돌아오니 이미 바닥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져 있었다.

걸레질도 해야겠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업 시작 시간이니 걸레질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 해야 될 성 싶었다.

"수고했다. 빗자루랑 쓰레받기는 용구함에 넣어놓고, 방에 가서 잠깐 쉬고 있거라."

아이린에게는 비어있던 방을 하나 내주었다. 아직 침대는 없지만 가죽 소파와 전설 비슷한 동화책이 몇 권 있는 책장이 있는 방이었다.

'그러고보니 글을 읽을 줄 알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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