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몸은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 찝찝하긴한데... 이 정도는 씻으면 되니까요. 그러고보니 되게 신기하네요. 어제 그렇게 격렬하게 했는데도 딱히 허리나 무릎이 아프지도 않고."
어색한 손놀림으로 허벅지와 음부에 묻어있는 정액을 손으로 훑는 아르웬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제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아, 아니에요! 저도 기분은 무척 좋았고, 루디 씨가 저를 상대로 그렇게 흥분해주시는 것도 기뻤는걸요."
내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아르웬은 곧바로 손사래를 치며 나를 두둔해주었다. 정말이지, 착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나는 아르웬을 '그녀'에게 겹쳐본 것이겠지.
"욕실에 물을 받아놓겠습니다. 조금 있다 나오십시오."
다행스럽게도 어제 일찍 곯아떨어진 덕에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조금만 서두른다면 제 시간에 출근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아르웬이 입고 왔던 옷은 정액과 애액 냄새가 배어 돌아갈 때 입기에는 곤란한 상태였다.
나는 돌아갈 때 입을 수 있도록 내 옷장에서 검은색 셔츠와 감색 바지를 한 장 꺼내주었다. 아르웬에게는 조금 크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르웬이 몸을 추스릴 수 있도록 먼저 방을 나오고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가는 길에 아이린의 방문을 살짝 열어봤지만 아이린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결국, 어제 들렸던 소리는 뭐였는지 묻고 싶었지만 자는 애를 깨우는 것도 그래서 그냥 조용히 방문을 닫고 욕실로 향했다.
손가락을 튕기니 붉은색의 마법진과 푸른색의 마법진이 이중으로 허공에 겹쳐졌다. 그리고는 욕조에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뜨거운 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욕조에 물이 거의 다 차자 다시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해제하고는 아르웬이 쓰기 쉽도록 비누와 바디 크림을 욕조 옆에 갖다 놓았다.
마지막으로 물 온도를 한 번 체크하고는 수건을 한 장 챙겨 방으로 돌아가니 대충 주변에 던져 놨던 옷들을 정리하고 있는 아르웬을 볼 수 있었다.
그 옷들 중에는 내가 어제 찢어버린 아르웬의 속옷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이린의 속옷도 사야하는데.'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아이린에 대한 생각을 밀쳐두고 아르웬에게 다가가 목욕물이 준비됐다고 하며 가져온 수건을 한 장 건넸다.
"우선은 이걸로 가리십시오."
내 말에 아르웬은 자신의 가슴팍까지 끌어당기고 있던 이불을 놓고는 재빨리 수건을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어제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의 알몸을 탐닉했는데도 아침에는 이렇게 조신하게 행동하는걸 보니 어제 아르웬의 색기 어린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수건은 조금 짧아 아슬아슬하게 가슴과 허벅지를 덮고 있었다. 간신히 주요부위만을 가리고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물건이 반응할 뻔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성을 컨트롤 할 수 있었기에 꾹 억누른 채 아르웬을 욕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루디 씨, 뜨거운 물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준비하셨어요? 장작을 때우려고 해도 한참 걸릴텐데."
그러고보니 영지의 사람들은 내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약초나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이용해서 포션을 만들 줄 안다고만 생각할 뿐, 내가 '어떤 방법'으로 포션을 만드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포션에 '마법'이 부여된 다는 것도 모른다. 포션에 부여된 마법의 흔적을 찾아보려면 최소한 은색 용병패를 가진 모험가나, 마탑의 마도사 정도는 되어야 했으니 말이다.
"물을 데워주는 마도구를 사용했습니다."
내 말에 아르웬은 신기하다는 듯이 김이 피어오르는 물에 손을 한 번 넣어보고는 물이 뜨거운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발끝부터 몸을 담궜다.
나는 기분좋은 신음을 내며 목욕을 즐기는 아르웬을 뒤로 한 채 조용히 욕실 문을 닫고 나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둘테니 느긋하게 씻으라고 문을 사이에 두고 말하니 알겠다는 나른한 대답이 욕실 안에 메아리쳤다.
"우선은 스프인가."
모처럼 좋은 밤을 보내게 해준 아르웬에게 가벼운 보답을 해주기 위해 찬장에 넣어둔 하얀 가루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와이번의 알의 껍질을 빻아 만든 가루였다.
살짝 쌉싸름한 맛이 나지만 몸의 활력을 돋우고 생리 같은 신체의 기복을 최소화 시켜주기에 귀족들이 가끔씩 찾는 진귀한 향신료였다.
아르웬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가루를 넉넉하게 물에 풀고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천천히 끓도록 두고는 어제 아침에 쓰고 남은 치즈와 옥수수 반죽을 꺼냈다.
물이 조금씩 끓기 시작하자 불의 세기를 약하게 조절하며 밀가루를 풀어 평범한 스프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어지간한 미식가가 아닌 이상 여기에 와이번의 알 껍질이 들어갔다는 것은 알지못할 것이다.
그렇게 잘 섞이도록 몇 번 국자로 저어준 나는 지갑을 챙겨 크루거의 빵집으로 향했다. 역시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열고 있던 크루거는 빵을 진열하던 도중 나를 보고는 특유의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흐흐, 루디 씨. 어젯밤은 황홀했나봐?"
"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크루거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기분나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툭툭 쳤다.
"아르웬 양 정도면 확실히 괜찮은 아이지. 조금 깐깐해 보여서 나중에 잡혀서 살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여자가 또 가정에는 충실한 것 아니겠는가."
"아니...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분명 내 집에서 나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방음 마법이 적용되어 되어있을 터였다. 어제 아르웬이 내 집에서 계속해서 교성을 질러댈 때 제지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응? 그야 우리 집 여편네가 자네 가게에 아르웬이 들어가고 몇 시간이나 나오지 않는 걸 봤다고 했는데. 혹시 아닌건가?"
정작 크루거도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아닌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젠장, 하필이면 맞은편 건물이다 보니 우리 가게에 들어가는걸 봤던건가.
그건 그렇고 몇 시간 동안이나 안 나오는 걸 계속 보고 있지 말라고. 일을 하란 말이다.
"하하. 오해입니다. 아르웬 씨와는 잠깐 대화하고 금방 돌어가셨는걸요. 아마 아내분이 잘못 보신 걸 겁니다."
"끄응... 그런가. 그 여편네도 참. 쓸데없는 소리를."
내 변명이 먹혔는지 크루거는 인상을 쓰며 아내에 대해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어제 산 것보다 조금 많은 양의 빵을 샀다.
"새로 온 아이가 먹성이 좋은 모양이지?"
"원래 있던 집에서 제대로 못 먹었는지 아주 좋아하더군요. 크루거 씨 빵 맛이 워낙 좋기도 하고요."
이건 진심이었다. 크루거 정도되는 사람이라면 빵값을 지금의 두 배로 올려도 살 사람은 많을 것이었다.
정작 본인은 관심이 없는지 주변 빵값과 비슷한 가격에 팔고 있었지만.
크루거는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크하하! 그런가. 확실히 내 빵이 맛있긴하지. 이것 참. 다음에는 한 번 그 아이도 데려오게나. 서비스도 듬뿍 주지."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습니다."
크루거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빵이 가득 담긴 가죽주머니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크루거와 대화를 한 시간이 길었는지 밀가루와 아이번 가루가 찐득하게 냄비 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물을 조금 더 붓고 몇 번 젓자 금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거기에다 옥수수 열매를 빻은 반죽을 넣은 뒤 우유를 조금 부었다. 아이번 알 껍질 가루의 쌉싸름한 맛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양을 조금 많이 잡았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기다려서 스프를 졸였다.
그렇게 완성된 스프에다 늘 하는 것처럼 타프린 잎을 갈아만든 가루를 살살 뿌렸다. 다만 오늘은 생크림 대신 치즈를 잘게 잘라 스프에 넣고 천천히 저었다.
어제는 빈 속인 아이린에게 다짜고짜 고기반찬을 먹일 수 없었기에 소화가 편하도록 생크림을 뿌렸었지만 평소에는 이렇게 치즈를 넣어 스프의 간을 맞추곤 했다.
생크림을 넣은 스프는 빵과 먹을 때는 괜찮지만 고기 반찬과 함께 먹을 때는 속이 더부룩해지기 때문에 잘 넣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겨 불을 끄고, 스프가 담긴 냄비를 탁자 위의 방금 막 사온 빵이 담긴 가죽 주머니 옆에 내려 놓았다.
구수한 스프 냄새가 기분좋게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창고로 들어가서는 분류되어 있던 고기들 중 트롤고기를 꺼내왔다.
고블린, 오크, 오우거같은 몬스터들의 사체는 정말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먹을 수 있는 맛이 아니지만 트롤은 달랐다. 트롤은 버릴 곳이 하나 없는 알짜배기 몬스터였다.
트롤의 피는 포션을 만드는데 사용됐고, 트롤의 가죽은 따뜻한 난방 재료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트롤의 심장은 마법을 사용하는 매개체로 사용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트롤의 고기는 닭고기와 소고기를 섞은듯한 맛이 나는데, 조리법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극상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할 때 녀석들과 자주 먹었지.'
토벌을 나갔을 때 식량이 모두 떨어져 몬스터라도 잡아먹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 때 우연히 발견한 트롤을 보고, 우리는 처음으로 트롤을 '몬스터'가 아닌 '식량'으로 보고 사냥했다.
트롤 고기를 넉넉하게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고 부엌칼을 들었다.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부엌칼이 푸른색으로 빛나며 예기가 흘러나왔다.
소드 오러(Sword Aura). 어느 정도 숙련된 검사들이 검에 마나를 주입하는 행위를 말하는 단어다. 검에 마나를 흘려넣으면 이렇게 빛나게 된다.
나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부엌칼을 트롤의 고기에 갖다대고 천천히 고기를 썰었다. 묵묵히 고기를 썰던 도중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평범한 검사와 기사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인 '소드 오러'를 고작해야 고기 써는 것에 사용하다니.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소리지를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이라 하겠지만 트롤 고기만큼은 이렇게 다루는게 맞다.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트롤은 태생부터 몸에 마나를 많이 품고 있는 종족이다. 고블린이나 오크는 사냥을 해도 손톱이나 손가락만한 마석이 나올 정도로 몸 안에 함유한 마나량이 적지만 트롤은 몸 전체가 마석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트롤은 팔다리가 잘린다 하더라도 반나절이면 재생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근원이 몸 안에 품고 있는 마나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왜 트롤만 이런 특징이 있는지는 모른다.
세간에서는 수백년 전 마탑에서 만들어낸 키메라가 교배를 통해 트롤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지만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일 뿐이다.
때문에 트롤 고기를 조리하기 위해서는 트롤을 사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나가 깃든 검으로 베어야한다. 내가 괜히 부엌칼에 소드 오러까지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마나를 부여하지 않으면 칼이 제대로 박히지도 않을 뿐더러 고기를 구워도 속부분이 익지 않기 때문에 유명 레스토랑에는 트롤 고기만을 따로 다루는 마도 요리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렇게 잘게 저민 트롤 고기를 철판 위에 올려놓고 불을 강하게 키웠다.
뜨거운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로 강한 불에 트롤 고기를 익히며 나는 중간 중간 철판을 뒤집어 한 부분만 타지 않도록 주의깊게 살폈다.
지글지글하고 고기 굽는 소리와 함께 트롤 고기 특유의 담백한 향이 부엌에 가득 퍼졌다. 맡기만 해도 군침이 흘러나오는 향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잡고 있는 철판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평소엔 요리 하는 것조차도 귀찮아 적당히 빵으로 때우기만 했었는데, 오랜만에 식욕이 돋았다.
'조금은 따로 챙겨둬야겠군.'
당장 아르웬 앞에서 아이린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부끄럼 많은 아르웬이 바로 옆방에서 아이린이 저녁 내내 우리들의 교성을 들었다는 것을 알면 그대로 목을 매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고보니 아이린은 어제 아침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밥도 먹지 못했다. 아르웬이 점심 때 찾아왔고, 그대로 저녁까지 곯아떨어졌으니 거의 하루를 굶은 셈이었다.
어제 아르웬에게 너무 빠져있던 나머지 아이린을 까먹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조금 반성하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트롤 고기의 삼 분의 일 정도는 따로 빼 접시에 놓아두었다.
온도 유지 마법을 걸어둔 접시를 옆으로 치워놓고 나머지 트롤 고기를 다른 접시에 담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콘 스프와 빵. 그리고 트롤 고기가 오늘의 아침식사였다. 슬슬 아르웬의 목욕도 끝나가는지 욕실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마실만한 건.'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것도 그러니 창고에 넣어뒀던 사과 주스가 담긴 통을 꺼냈다. 잔에 따라 조금 마셔보니 숙성된 사과의 달콤한 맛이 은은하게 입에 퍼지는게 식후 음료로 제격이었다.
사과 주스와 함께 스푼과 포크를 자리에 세팅하고 있을 때, 아르웬이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서 뜨거운 증기와 함께 조심스레 나온 아르웬은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덕분에 완전히 괜찮아졌어요. 맞다 루디 씨, 혹시 무슨 바디 크림 쓰시는건지 알려주시면 안 돼요? 향이 너무 좋던데."
바디크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 아르웬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