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 제작한거라 따로 구하시기는 힘들테고, 마침 창고에 여분이 있으니 갈 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시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양은 넉넉하게 있으니 부담가질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그제서야 아르웬은 미안한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트롤 고기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더니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와아! 엄청 맛있는 냄새인데, 무슨 고기에요?"
순간 사실대로 트롤 고기라고 말할까 싶었지만 시청에서 모험가 길드 일을 함께 처리하고 있는 아르웬이라면 트롤 고기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적당히 돼지고기라고 둘러댔다.
아르웬은 식탁을 보고는 다시 한 번 감탄하더니 즐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르웬이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먼저 탁자에 앉아 스프를 접시에 담았다.
그렇게 빵을 가운데에 두고, 아르웬과 내 자리에는 각각 콘스프와 트롤 고기가 담긴 접시가 놓이게 되었다. 내 셔츠와 바지를 걸치고 돌아온 아르웬은 향긋한 향을 맡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수저에 손을 뻗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차린게 없기는요. 평소 집에서 먹을 때는 빵이나 과일로 간단하게 때울 때도 많은데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죠."
슬림한 몸매의 아르웬이 말하니 확실히 설득력이 느껴졌다.
아르웬은 가볍게 스푼을 들어 스프를 한 입 맛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바삐 놀렸다.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정말 맛있어요. 스프만 먹었는데도 벌써 기운이 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마치 알통을 만들듯이 팔을 굽혀 보였다. 그런 장난스런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기를 권했다. 아르웬은 사양않고 포크로 트롤 고기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입 안에 넣는 순간, 아르웬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린 아르웬의 뺨을 검지로 찌르자 그제서야 아르웬은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마치 수천년 뒤의 문물을 접한 인간같은 모습이었다.
아르웬은 포크를 쥔 손을 덜덜 떨며 트롤 고기를 가리켰다.
"루, 루디 씨. 이거 정말 돼지고기 맞나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트롤 고기를 노려보는 아르웬의 반응에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외국에 사는 제 친척이 보내준 고기입니다. 일반적인 돼지고기와는 다른 방법으로 키운다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
"하아......"
영지에서 구할 수 없는 고기인게 아쉬운지 아르웬은 숨을 깊게 내쉬며 다시 고기에 포크를 가져가서는 찍어먹었다.
고기를 입 안에 넣고 몇 초 동안은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기가 점점 사라지는 걸 볼때마다 착잡해지는지 행복과 슬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보다 재미난 일이 없었다. 고기 한 조각에 저렇게 희비가 교차할 수 있다니. 아르웬의 표정이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힐끔거리며 나는 고기를 씹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트롤 고기는 확실히 괜찮았다. 야들야들한 고기의 식감과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부드러움은 식욕을 더욱 돋궜다.
아르웬은 이미 홀린듯이 트롤 고기를 먹어치우고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르웬과 나 모두 접시를 비웠다.
아르웬은 배가 모두 찼는지 사과 주스를 마셨고, 디저트로 빵을 가볍게 뜯어먹었다.
"루디 씨한테는 신세만 지네요. 포션 보급 일도 그렇고, 이런 고급스런 식사도 그렇고."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아르웬은 다 마신 사과 주스 잔을 양 손으로 잡았다. 아무래도 본인은 내게 받은 대접에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기에 나는 슬쩍 아이린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정 그렇게 신경이 쓰이신다면, 혹시 자그마한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요."
아르웬은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궁금했는지 몸을 살짝 뒤로 빼고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까 고기를 보내주신 친척 분이 있다고 말씀 드렸었지요."
"네. 무척 맛있었어요."
트롤 고기의 맛을 다시 떠올리는지 아르웬은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입맛을 다시는 아르웬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그 친척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젊을 때 사업을 하셔서 큰 돈을 버셔서 그 돈으로 왕국 변경지에 거대한 농장을 지었다고 하시더군요. 몇 번인가 가본적이 있었는데 하루 종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다짜고짜 시민권 하나를 발급해달라고 해봤자 이성적인 아르웬은 당장 부탁을 들어주더라도 후에 의심의 눈길로 쳐다볼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들통나지 않도록 지금 적당히 이야기를 지어내놓는 편이 좋았다.
즉석에서 지어낸 이야기라 조금 엉성할 수는 있겠지만 요점은 아르웬을 납득시키는 것이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나 넓나요? 저도 한 번 가보고 싶네요."
아마 아르웬의 머릿속에서는 드넓은 초원에서 살아가는 돼지와 소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이 영지에 오기 전에는 대륙을 돌아다니다 가끔씩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갈 때 마다 키우는 동물들의 수가 훨씬 늘어나더군요."
그 말과 함께 나는 그 친척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 사실과, 친척 부부는 목장을 잘 꾸리며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제게 편지가 왔습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이제 13살이 되니, 도시에서의 삶을 경험시켜 주고 싶다고 당분간 돌봐줄 수 있냐는 편지더군요."
내 말에 아르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수락하셨나요?"
"그 아이가 어릴 때 몇 번 찾아갔었는데 저를 잘 따르던 아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르웬이 내게 호감이 있는만큼 실망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르웬의 반응은 내 생각과 정반대였다.
보통 호감 있는 남자에게 애가 딸리게 되면 당연히 반대를 할 줄 알았는데, 아르웬은 오히려 나를 두둔하며 칭찬했다.
"잘 하셨어요. 루디 씨는 역시 친절하시네요."
내 예상과 다른 반응에 조금 당황했지만 아르웬은 그런 내 심정을 모르는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상황을 정리했다.
"한 마디로 친척분의 딸이 여기 오게 됐는데, 그 수속 처리를 부탁하고 싶으시단거죠?"
"네. 아무래도 아르웬 씨는 시청에서 일하시니 이런 부분에 대해 잘 알지 않으실까 싶어서."
아르웬은 평소 시청에서 근무할 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복잡한 절차가 있겠지만, 어제 루디 씨는 영주님의 보증 아래 1급 시민으로 등록되셨으니 1급 시민의 보증 하에 임시 시민권을 발급하는 것은 가능해요."
1급 시민에 그런 권한도 있던가. 별로 신경쓰지 않았고 있었기에 조금 의외였다.
1급 시민은 영주와 백작가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영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일부 사람들을 말한다.
2급 시민은 영지 내의 전속 상인과 고위 공무원들이다.
3급 시민은 평범한 백성들을 말하며, 빈민가나 부랑촌의 사람들에게는 시민권조차 부여되어 있지 않다. 세금을 내지 않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시민 계급이란 사실상 이렇게 4개의 계급으로 구성된 셈이었다. 1급 시민은 영지를 통 틀어서도 열 명도 채 되지 않으니 확실히 이런 특권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좁은 영지 안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금세 알게 될 테고, 1급 시민은 자신이 추천한 사람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추천할 것이었기에.
"그럼 그 아이가 오면 시청에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오실 때 그 아이도 데리고 와주세요. 하는 김에 신분패도 제작해 드릴게요."
시청에 찾아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아르웬을 보며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뭘 이런걸 가지고요. 원래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나서 아르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는 꽤나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지금도 노팬티고 말이야.'
내가 건넨 셔츠와 바지를 입고, 원래 입고 왔던 속옷은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됐기에 쓰레기통에 버렸다. 정장은 냄새가 찌들어 오늘 출근할 때 입을 수 없었다.
가게 문을 열어주며 아르웬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아르웬은 극구 거절하며 포션이 다 만들어지면 시청으로 찾아와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떠나버렸다.
아르웬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가게 앞에 서서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길을 걷던 도중 몇 번인가 뒤를 돌아보던 아르웬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부끄러운지 황급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르웬이 떠나자 나는 다시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탁자 위에 놓인 텅 빈 접시들을 차곡차곡 쌓아 물에 담궈 놓은 뒤 옆에 치워뒀던 트롤 고기 접시와 빵을 몇 개 챙겨 아이린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보니 아이린은 여전히 몸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해가 중천에 떴고, 아르웬과 내가 밖에서 그렇게 대화를 했는데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눈을 감고 있던 아이린은 빵과 고기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씰룩씰룩 거리더니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고, 그대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결국 아이린이 다시 눈을 감으려고 할 때 나는 들고 왔던 가죽 주머니와 접시를 꺼냈다.
아이린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이부자리를 치우고 자리를 빵을 잘게 찢어 다른 접시 하나에 담아주었다.
"...어제는 미안하게 됐다. 배 많이 고팠니?"
내 말에 아이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지만 트롤 고기 접시에 고정된 눈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까지 타이밍 좋게 울려퍼지며 아이린의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괜한 말을 했구나. 어서 먹으렴."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린은 포크가 아닌 손으로 트롤 고기를 집었다가 손이 데이고는 화들짝 놀라 고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곧바로 포크를 꺼내 떨어진 고기를 찍어먹었다.
한 번 청소를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더러운 나무 판자에 떨어진 고기를 주워 먹는건 어떤가 싶었지만 지금의 아이린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르웬이랑 똑같은 반응이구만.'
고기를 입 안에 넣은 직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극상의 맛에 정신줄을 반쯤 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아이린을 내버려 둔 채 나는 사과 주스를 가지러 부엌으로 돌아왔다.
고기와 빵만 먹다보면 목이 메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과 주스를 컵에 담아 아이린의 방에 돌아왔을 때, 방 안에는 왠 다람쥐가 한 마리 있었다.
입 안에 고기와 빵을 가득 우겨넣은 채 씹어댔다. 아무리 노예라지만 그래도 여자애인데 저런 모습은 어떤가 싶어 하루 빨리 식사예절을 가르쳐야겠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 내가 한 짓도 있고 했기에 적당히 넘어가주기로 했다.
트롤 고기는 이미 반이 넘게 사라져 있었는데, 나는 접시 옆에 사과 주스가 담긴 컵을 내려놓고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먹어치우는 아이린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저께 처음 노예를 구매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물론 아직 깡마른 몸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저렇게 복스럽게 먹는 걸 보면 금세 살은 찔 것 같았다.
오히려 너무 찌는 것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문득 아이린의 '날개'가 어제보다 조금 더 빛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는 거의 투명에 가까운 옅은 보랏빛이었는데, 오늘은 그보다 조금 밝은 색의 보랏빛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여전히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색이 짙어진게 분명했다.
적어도 내가 읽었던 책들에는 저런 변화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