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쓸만한 정보는 거의 적혀 있지 않았지만.'
서큐버스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서큐버스 성체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었다.
직접 성교를 하지 않더라도 남녀의 교합에서 정기를 갈취해 그것을 마력으로 바꿀 수 있으며, 성인식을 치른 뒤 육체는 '영체화'되어 물리적인 데미지를 줄 수 없다는 것 정도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책들에 적혀 있는 것은 서큐버스에 대한 망상을 품은 몇몇 귀족이 서큐버스를 겁탈하려 했다가 역으로 정기를 갈취당한 채 죽음을 당한 사건들에 대해서였다.
모험가들을 고용해 서큐버스를 포획했지만 밤에 서큐버스를 덮치다 역으로 정기를 빨려 죽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다만 모든 책에 그런 쓰레기 같은 내용이 적힌 건 아니었다.
읽었던 책들 중 '마족에 대한 고찰'이라는 책에는 서큐버스에 대해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본래 꿈을 거니는 몽마인 서큐버스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다. 남자의 정기를 갈취하며 그 대가로 극상의 쾌락을 선사하지만 그것은 수명을 담보로 하는 거래일 뿐이다. 하지만 서큐버스에게 진실된 사랑을 받는 자는, 영원한 낙원을 가질 수 있게된다.]
책의 저자는 '쿠란 토트'라는 사람이었다. 다른 잡다한 책들과 달리 마족의 습성과 성격, 그리고 자신이 만난 호의적인 일부 마족에 대한 이야기도 등록되어 있었다.
서큐버스 뿐만 아니라 다른 마족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혀 있는 걸 보면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책의 후기에는 대륙을 돌아다니며 만난 마족들에 대해 기록한 보고서들을 정리하다 보니 이 책이 만들어졌다고 적혀 있었다.
적어도 내가 모험가로 활동했을 때는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책에 적혀 있는 구절이 묘하게 신경쓰였다.
'영원한 낙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가.'
추상적인 단어였지만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서큐버스는 몽마(夢魔). 그런 그녀들이 보여줄 수 있는 '낙원'이라면 이야기는 뻔했다.
"......."
'낙원'에 대해 생각하자 문득 '그녀'가 떠올라 나는 눈을 감았다.
일순 거칠어질 뻔한 숨을 억누르고 심호흡을 하니 진정됐다. 천천히 눈을 뜨니 이미 빵과 고기를 모두 먹어치운 아이린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아이린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다. 슬슬 정리하자."
접시 바닥까지 핥아먹었는지 접시에는 기름기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접시 두 개와 컵을 들어 부엌으로 가져갔다.
식사를 마친 아이린에게는 걸레질을 하도록 시켰다. 우선은 자신의 방 바닥을 깨끗하게 닦으라고 하며 물이 담긴 양동이와 걸레를 건네주었다.
"네가 쓸 방이니 깨끗하게 닦아야한다. 나중에 확인할거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린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을 시키는데도 오히려 웃는 그 모습에 조금 의아했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아이린이 자신의 방을 걸레질 하는 동안 나는 포션의 재고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사오기로 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이 포션을 사기 위해 찾아오는 것은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나 모험 출발 전인 아침이었다.
해가 중천에 뜬 지금 찾아올 손님은 없었기에 나는 가게 문을 닫고 나왔다. 어제 저녁에 걸어둔 외출중 팻말을 그대로 뒀으니 손님이 왔다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찾아올 것이었다.
'트롤의 피야 창고에 충분하고, 프라미아 꽃잎만 사오면 되겠군.'
프라미아 꽃잎은 가로수길을 꾸미는 용도로 쓰일 정도로 평범한 꽃이다.
하지만 포션의 효과를 볼 수 있으려면 적어도 열 송이는 빻아서 트롤의 피와 섞어야한다.
지나치게 번거로운 작업이기 때문에 상단에서는 고아나 거지들을 고용해 프라미아 꽃잎을 빻는 일을 시키고 수당을 주기도 한다.
내가 사야하는 건 그렇게 정제된 프라미아 꽃잎이었다.
마법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꽃을 빻는 것까지 내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늘 프라미아 꽃잎을 사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브리튼 상단'
이 영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규모 상단이었다. 다양한 물건을 판매하지만 주력 상품은 마도구나 마법 촉매다.
아까 아르웬에게 둘러댔던 '물을 데우는 마도구'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나 마법사나 사제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촉매제를 판매했다.
물론 견습 마법사나 견습 사제가 대부분이었기에 그렇게 수준 높은 촉매가 아닌 기본 원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나 하급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정도였다.
이런 제국 변두리 영지에서는 백작가 전속 용병단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나머지는 다 어중이떠중이 모험가 파티일 뿐이었다.
길을 걸으니 시장 골목에서 이제 막 장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아침은 식당이나 여관에서 먹으니 옷이나 과일,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다한 도구들을 늘어놓은 채 자리를 깔고 있었다.
쓸만한 물건이 있나 둘러봤지만 적어도 내게 쓸모있는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시장을 지나쳐 영주의 관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건물 앞에서는 상자를 쌓아놓고 직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자를 옮기던 직원 중 하나가 건물 앞에 서 있는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루디 씨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청에서 포션 보급을 의뢰 받아서 프라미아 꽃잎을 사러왔습니다."
직원은 짚이는 게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보니 북쪽 숲에 던전이 하나 생겼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원래는 오크만 나왔지만 최근 안쪽에 진입했다가 도망쳐 나온 모험가 파티의 말에 의하면 오우거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오우거입니까. 상상 이상으로 거물이 튀어나왔군요."
산의 폭군. 오우거가 가진 별명이었다. 오우거는 고함 한 번에 대부분의 모험가들의 전의를 상실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평균적으로 4m가 넘는 육중한 덩치에 나무를 통째로 뽑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 산의 폭군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신에게 덤벼드는 모든 것을 짓뭉개는 몬스터였다.
뿐만 아니라 드물게 인육을 즐기는 몬스터이기도 했다.
고블린과 트롤, 오크같은 몬스터들의 경우 인간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성노예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우거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죽인 다음 먹어치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대신 오우거는 그런 강력함 때문인지 짝짓기 시기가 아닌 이상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 곳에서 홀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오우거가 산이나 숲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최소 B급 이상의 용병단에서 대규모 원정을 꾸려 토벌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법사들이 발을 묶고, 검사들이 한참을 달려들어야 간신히 잡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오우거였다.
그렇게 강한 힘과 포악함 때문에 어린애가 울 때 '계속 울면 오우거가 잡아간다'고 하면 뚝 그친다는 속담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모험가들이 말하길 오우거가 네 마리나 있었다고 하더군요."
"오우거가 네 마리요?"
오우거는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영역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같은 오우거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면 그대로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게 오우거인데.
"이상하군요. 오우거는 혼자 지낸다고 들었는데요."
들은게 아니라 직접 본 것이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내 말에 직원도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던전에서 오우거가 나온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네 마리나 나오다니.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죠."
던전은 일반적인 몬스터 사냥을 할 때와 달리 던전 내부의 함정도 조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던전은 함정이 있는 대신 몬스터들의 수가 적거나 던전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약한 몬스터가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로 오우거가 네 마리 나왔다면 숲에 생긴 던전은 최소 A급 던전에 버금가는 위험한 던전이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제아무리 제국의 변경이라 해도 일단은 백작가였다. 최근에는 던전을 노리고 찾아온 모험가도 늘어났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러고보니 바크는 있습니까?"
"아, 부단주 님은 2층에 계십니다. 아마 어제 들어온 물건들을 확인중이실겁니다."
상단주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만큼 깎듯하게 부상단주라 부르는 직원의 태도에서 충성심이 느껴졌다.
동시에 바크가 아버지 백으로 들어온 낙하산이 아니라 상단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능력있는 녀석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던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직원들이 사무를 처리하고 있는 1층과 달리 2층은 창고처럼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물건들의 수량과 품질을 체크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어. 바크."
"....응? 루디 형! 되게 오랜만이네요."
몬스터의 가죽으로 보이는 것을 신중하게 살펴보던 바크가 고개를 들고 내게 반갑게 인사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단정하게 넘기고, 똘망똘망한 눈과 오똑한 코, 부드러운 인상의 외모와 함께 듣기 좋은 목소리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 것 없는 미소년이었다.
플로라와 동갑인 애한테 '형'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많이 바쁘냐?"
내 말에 바크는 고개를 저으며 잡고 있던 가죽을 내려놨다.
"아뇨. 이제 막 검수 끝내려던 참이었어요. 그러는 형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숲에 생겨난 던전 때문에 시청에서 포션 공급 의뢰를 받았거든."
"저희 상단도 이번에 그걸로 이득 좀 봤어요. 오크 때문에 마법 촉매가 불티나게 팔렸거든요. 던전 사라지기 전까지는 계속 상황이 유지될 것 같아요."
누가 상인 아니랄까봐 이 상황을 조금이지만 즐기는 여유까지 보여주는 바크였다. 고블린이나 다이어 울프 정도라면 모를까 오크 부터는 마법사나 사제가 발을 묶어줘야 사냥을 시도할 수 있었다.
물론 소드 익스퍼트쯤 된다면 오크 몇 마리 쯤이야 가볍게 썰어버릴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바크는 던전에 대한 것이 별로 걱정되지 않는지 웃으며 상단의 매출이 늘어난 것을 자랑했다. 바크는 방금 전 직원이 해준 이야기를 모르는걸까, 아니면 알고도 믿지 않는 걸까.
"...그러고보니 루디 형도 포션 보급 요청 받았다고 하셨죠? 개당 얼마에 공급하기로 하셨어요?"
"원래 정가의 70%."
"네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이잖아요! 어차피 이 영지에는 루디 씨 말고 제대로 된 포션을 파는 곳도 없는데!"
내 대답을 들은 바크는 방방 뛰며 시청의 부당한 가격 책정에 대해 화를 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같이 가서 따지자고 하는 바크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물었다.
"됐어.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보다도, 프라미아 꽃잎 재고는 있어?"
"던전이 생겼을 때부터 이럴 줄 알고 준비해 놨어요. 얼마나 필요하세요?"
"포션 200병 분량 정도."
"생각보다 많네요.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바크는 창고 구석에 놓인 상자를 열더니 옅은 핑크빛 꽃잎이 가득 담긴 유리 상자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