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60)

"한 상자면 20병 정도 만드실 수 있을테니 10상자 정도면 될 거에요."

"고마워. 가격은?"

"원래 대로라면 은화 열 닢은 받아야겠지만....... 루디 형이 시청에게 공급하는 가격을 생각하면 그렇게 받을 생각도 안 드네요. 은화 다섯 닢만 주세요."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그래도 고맙다."

나는 품 속에 넣어온 지갑에서 은화를 다섯 닢 꺼내 바크에게 넘겨주었다.

"은화 다섯 닢.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꽤 부피가 나가니 프라미아 꽃잎은 직원에게 형 가게에 배달해놓으라고 전해둘게요."

정말이지. 배려심이 깊은 녀석이었다. 자신보다 아랫사람인 직원들을 대우할 때도 거만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며, 나 같은 놈에게도 깎듯이 형 대우를 해준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 어째서인지 이 녀석이 먼저 다가와서는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었지만.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는 상태다. 그래도 이 녀석의 성격을 봤을 때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 그렇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신경써줘서 고마워."

"뭘요. 형이랑 저 사이에."

씨익 웃으며 주먹을 내미는 바크에게 가볍게 주먹을 부딪쳐 주었다. 활기차서 좋구만.

어제 플로라가 바크를 찼다는 말을 듣고  아직 침울해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슬슬 점심 때인데 밥이라도 먹으러 갈래?"

"저야 좋죠. 마침 저희 건물 앞에 새로 음식점이 생겼는데 거기 가실래요?"

"그럼 그쪽으로 가자고. 밥은 내가 쏘지."

"배가 터지게 얻어 먹어야겠네요."

기분 좋게 웃으며 꺼냈던 프라미아 꽃 상자를 다시 박스에 넣은 바크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1층으로 내려가니 슬슬 점심시간인지 직원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나가고 있었다.

건물을 나서던 직원들 몇몇은 바크와 함께 있는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부단주님. 식사 하러 가십니까?"

"네. 오랜만에 루디 형이랑 같이 먹기로 했어요."

"맛있게 드십시오."

"네. 여러분도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웃어주며 직원의 인사를 받아주는 바크의 모습을 보며 정말 성격 좋은 녀석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적어도 내가 보는 곳에서 이 녀석이 화를 내거나 직원을 갈구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바크가 말했던 음식점은 이미 절반 가까이 자리가 차 있었다. 시끌벅적한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여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몇 분이신가요?"

"두 명입니다."

"이쪽으로 와주세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의 2인석에 앉았다.

"그럼, 메뉴를 정하시면 불러주세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한 종업원은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앉은 자리에서 벽에 붙어 있는 팻말들을 보니 요리 이름과 가격이 붙어 있었다.

-스프- 동화 3개

-샐러드- 동화 4개

-돼지고기(1인분)- 대동화1개

-돼지 통구이- 대동화 5개

-오크 귀 구이- 대동화2개

......마지막 건 뭐야.

내 시선을 눈치챈 바크가 작게 속삭였다.

"소문에 따르면 오크 귀가 정력에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인기메뉴에요."

남자는 정력에 좋다면 돌도 씹어먹는다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오크의 귀로 추정되는 것을 나이프로 잘라 먹는 아저씨들이 보였다.

부디 밤에 효과를 볼 수 있기를.

"처음 와 봐서 잘 모르겠는데 뭐가 맛있어?"

"그럼 그냥 제가 주문할까요?"

"그래."

내가 선택권을 맡기자 바크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오늘의 세트' 두 개 주세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주방을 향해 '오늘의 세트 두 개!'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오늘의 세트가 뭔데.

"이 식당 특징이에요. 일일이 주문하는게 귀찮을 때 이렇게 주문하면 그 날에 제일 괜찮은 요리를 가져다 주거든요."

"특이하네."

"살아남으려면 눈에 띄어야 하니까요."

누가 상인 아니랄까봐 말에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바크는 싱글거리면서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고보니 루디 형은 아직도 혼자 살고 있죠? 쓸쓸하지는 않아요?"

"글쎄다. 좀 있으면 혼자 사는 것도 아니야. 친척 애 하나를 맡게 됐거든."

바크는 그 말에 조금 놀랐는지 입을 벌리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몇 살인데요?"

"열세 살 정도일걸."

아이린의 실제 나이는 모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대충 열둘에서 열셋 정도였다. 나중에 돌아가면 나이도 한 번 물어볼까.

"어떤 애일지 궁금하네요. 나중에 한 번 놀러가도 되죠?"

"언제든지 와. 그런데 너 바쁘지 않냐?"

"그건 그렇네요."

그런 대화를 나누던 도중 식사가 나왔다. 우선 스프와 샐러드가 전채로 나왔고, 그 뒤를 이어 나온 건 다름 아닌 닭튀김이었다.

스프는 적당히 달달한 맛이 나는 평범한 스프였고, 샐러드 역시도 평범했지만 닭튀김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삭거리는 식감과 함께 입 안에 가득 퍼지는 매콤한 맛에 감탄했다.

"맛있네. 뭘 넣은거지?"

"향으로 봤을 때 후추랑 베고니아 가루를 섞은 것 같네요. 이 톡 쏘는 향은 베고니아 가루에서 자주 나거든요."

바크의 말을 듣고 먹어보니 확실히 베고니아 가루 특유의 매운 향이 느껴졌다. 후후 불어가며 닭튀김을 모두 먹어치우자 이어서 요리가 나왔다.

"손님들은 운이 좋으시네요. 마침 오늘 골드 피쉬가 들어왔거든요."

종업원의 웃음과 함께 가게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가르며 온 종업원이 탁자 위에 올린 음식은 금빛으로 빛나는 생선 조림이었다.

조심스레 생선 살을 발라 먹어보니 마치 눈처럼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렸다.

트롤 고기에 필적하는 맛에 나와 바크는 말도 하지 않고 열심히 손을 놀렸고, 몇 분도 되지 않아 골드 피쉬는 뼈만 남기고 사라졌다.

"살면서 골드 피쉬를 보게 될 줄이야."

"저 양반들은 봉 잡았구만."

"젠장! 내가 먼저 오늘의 세트를 시켰어야 하는건데!"

"주방장! 오늘 골드 피쉬 재고는 더 없나?!"

우리가 골드 피쉬를 완전히 먹어치우는 것을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소리를 질러댔지만 종업원은 여전히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오늘 들어온 골드 피쉬는 방금 한 마리가 전부랍니다."

"젠장!"

손님들이 다들 아쉬움을 표하며 투덜거리며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번에 왔을 때는 제일 먼저 오늘의 세트를 시킬테다."

"뭐라는거야. 다음 번에는 내가 먼저다."

"다들 닥쳐. 골드 피쉬는 내꺼라고."

다음 번에도 골드 피쉬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을 터인데도 모험가들은 자기들끼리 다음 번에는 자신이 먼저 주문을 하겠다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설마하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오늘의 세트라는 것을 만든 것일까.

바크는 배불리 먹어 만족스러운지 가볍게 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바크와 나는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집어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향하니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종업원이 있었다.

"두 분 합쳐 은화 한 닢입니다."

골드 피쉬 가격 한 마리 가격만 해도 은화 두 닢은 될텐데, 오늘은 운이 좋았다. 나는 종업원에게 음식값이 은화 하나와 팁으로 대동화 하나를 올려놓았다.

대동화를 확인한 종업원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바크와 나는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바크 네 덕분에 이런 호강을 다 누려보네."

"우연이라니까요. 애초에 루디 형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기회도 없었으니 루디 형 덕분이죠."

이래서 이 녀석을 싫어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냉철히 상인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자신의 직원이나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다.

그런 녀석이기에 여자애들이 전부 다 바크를 쫓아다니는거겠지.

"그럼 이제 돌아가실 거에요?"

"그래야겠지. 가게를 너무 오래 비워둘 수도 없으니까."

"루디 형도 슬슬 결혼하셔야하지 않아요? 루디 형 좋아하는 여자애들도 꽤 있는 것 같던데."

"야 임마. 내 청춘은 이미 끝난지 오래야. 아저씨 걱정 하지말고 네 걱정이나 해."

내 말에 바크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그러고보니 플로라한테 차인지 얼마 안 됐다고 했지.

"...맞다. 형. 저 플로라한테 차였어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몰랐던 척하며 적당히 놀란 모습을 연기했다.

"뭐? 어쩌다가 그랬냐."

"지난번에 플로라가 어머니랑 같이 저희 가게에 옷감을 사러 왔거든요? 그 때 저희 아버지랑 플로라 어머니가 대화하고 계실 때 둘이서 함께 있었는데 그 때 고백했어요."

"그런데 거절당했다고?"

"......네."

"힘내 임마. 세상에 여자가 플로라 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냐. 당장 밖에 나가면 너 좋다고 달려들 여자애들이 한 다스다."

어디서 이 말을 들어본 것 같다 싶었는데 어제 플로라가 내게 찾아와서 했던 말과 똑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