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우, 그래도 전 플로라가 좋단 말이에요."
한숨을 내쉬는 바크는 방금 전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정말로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 정도로 충격이었나. 한창 감수성이 민감할 때니 그럴만도 했다.
"네가 희대의 순정남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그래도 이미 차인 걸 어떡하겠냐. 아직 포기 못했어?"
"......아뇨. 포기는 했는데 아직 플로라 말고 다른 여자를 좋아할 생각은 안 들어요."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바크를 보니 나도 조금 마음이 아팠다.
플로라 녀석. 어지간하면 좀 받아주지 그랬냐. 솔직히 바크만한 신랑감이 또 어딨다고.
성격 좋지, 집안 좋지, 외모도 좋다. 그야말로 완벽한 신랑감인데 콧대만 높아서는 나중에 대체 누구랑 사귀려고 그러는지. 쯧쯧.
나름 마음은 정리했지만 그래도 아직 플로라를 잊지는 못했는지 바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니까. 플로라 말고도 여자는 널렸어."
하지만 이 희대의 순정남은 내 말을 듣고도 전혀 힘을 내질 못했다. 오히려 플로라에게 자신이 실수한 것이 있는 게 분명하다며 자책 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플로라가 널 차면서 따로 한 말은 없어? 어떤 점이 싫다거나, 다른 남자가 있다거나."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그냥 동갑인 남자보다는 연상이 좋다고만 말하더라고요."
연상이라. 그러고보니 플로라 녀석은 나한테도 '여자가 남자보다 어린데 사귀는 경우는 많다'고 계속 말했었지. 그랬던 이유가 자기 취향이 연상이라 그랬던거군.
"더 들이대 볼 생각은 없고?"
"네. 플로라한테 민폐라고 생각하니까요."
다른 여자애라면 그래도 한 두 번 더 들이대보라고 하겠지만 플로라의 성격상 다시 들이대도 플로라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바크도 그걸 알고 빠르게 포기한 것이겠지.
그래도 차이고 나서 시간이 좀 흘러서 그런지 바크는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를 한 것 같아 보였다. 나와는 달리 마음이 굳센 녀석이었다.
"술이라도 마시러 갈래?"
"아뇨. 던전이 생기고나서부터는 일에 치여 사느라 플로라 생각도 거의 안 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금방 돌아가봐야 해요."
그나마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실연의 아픔도 덜 느껴진다고 바크가 작게 덧붙였다.
"아쉽게 됐네. 그럼 고생해라. 나중에 시간 나면 놀러오고."
"알았어요 형. 프라미아 꽃은 오늘 중으로 보내드릴게요."
바크는 내가 갈 때까지 상단의 건물 앞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흔들리는 손에는 힘이 없었지만 바크는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잘 치유를 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바크의 성격상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눈이 돌아가서는 상단의 권력을 이용해 플로라를 협박하거나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크는 깔끔하게 결과에 승복하고 마음을 추스리고 있었다. 분명 내 나이의 절반정도 밖에 안 되는 소년이지만, 저런 점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크와 헤어진 후 평소에 다니던 가게를 들렀다.
역사서, 마법서,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판매하는 고서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쌓아놓고 팔아치우는 골동품점.
고서점에서는 살만한 책을 찾지 못했기에 적당히 책을 읽다가 나왔다.
그리고 도착한 골동품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걸려있던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울렸다.
손님이 꽤나 있던 고서점과는 달리, 골동품점에는 가게의 주인인 할아범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할아범은 눈을 번쩍 뜨고는 나를 보고 반색했다.
"흠. 꽤나 오랜만에 왔구만."
"최근에 일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물건 많으니 좀 많이 사. 괜찮은 물건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는 할아범을 보니 어지간히도 장사가 안 되나 싶었다. 하긴, 누가 봐도 고물이라 생각할 법한 것을 1실버에 팔고 있으니 살 사람이 없는 건 당연했다.
가끔씩 자신의 운을 믿는 모험가들이 녹슨 반지나 팔찌 같은걸 특별한 효과가 부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 사갔다가 욕을 하며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한테는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할아범의 옆을 지나쳐 나는 박스에 담겨 있는 골동품을 보며 '눈'을 떴다. 일순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금새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보는 광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쓰레기 더미 사이로 은은하게 빛나는 '마나의 흔적'을 찾았다.
새로운 물건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지난번에 왔을 때 없던 마나의 흔적이 몇 개 보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마나의 흔적을 따라 물건을 찾으니 흐릿한 하늘색 마나로 빛나는 벨트가 나왔다. 벨트를 잠시 살핀 나는 벨트를 다시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마나의 기운이 약하고, 너무 옛날 물건이라 내구성도 좋지 않았다. 아마 벨트를 만들 때 미스릴이나 오리하르콘이 조금 함유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양이 너무 극소량이라 따로 추출할 수도 없었다.
'첫 번째는 꽝이군.'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마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골동품은 열 개도 넘게 흩어져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가까이 있는게 아닌 마나의 흔적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물건으로 향했다. 쓰레기 더미 제일 밑에 파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력한 마나를 내뿜고 있는 물건으로 향했다.
위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치우며 간신히 찾아낸 물건은 십자가가 달린 펜던트였다. 남들이 본다면 그저 때가 탄 펜던트라고 생각하리라.
하지만 내 눈에는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새하얀 마나의 흔적이 보였다. 일반적인 마도구들은 자신의 속성과 관련된 마나의 흔적을 남긴다.
불을 붙이는 마도구는 붉은색으로 빛나고, 물을 만들어내는 마도구는 푸른색으로 빛난다. 하지만 하얀색. 그것도 이 정도로 찬란한 빛을 내뿜는 마나의 흔적이라면.
"......성물."
말하고 나서야 나는 아차 싶어 할아범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할아범은 다시 책상에 고개를 박기 직전까지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다행히도 방금 내가 한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보통 공작령에 위치한 위세 좋은 대교회 정도는 되어야 간신히 성물 하나 정도를 가질 수 있는데, 그런 물건이 어째서 이렇게 골동품점까지 흘러들어왔는지 경로가 의심스러웠다.
물론 교회 윗대가리가 썩은 거야 용병 놈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탐욕스러운 놈들이라면 당연히 성물을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터였다.
성물은 말 그대로 존재 자체로 성스러운 귀물이니까. 당장 성물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펜던트의 가치는 수천 골드를 호가하리라.
본래는 마나의 흔적을 모두 확인해볼 생각이었지만 이런 물건을 찾은 이상 빠르게 집에 돌아가서 그 효과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할아범. 이거 하나 계산해줘."
나는 졸고 있는 할아범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은화를 내밀었다.
"흠냐...헉! 뭐야, 꼴랑 하나 사는거냐."
내가 손에 쥔 펜던트를 힐끔 보고는 투덜거리는 할아범이었지만 군말 없이 은화를 받고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펜던트가 성물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믿기 힘든데.'
제국을 통틀어도 성물의 수가 열 개도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희소성은 더욱 올라간다.
제국에서 국교로 인정받은 교회의 성물이 사라졌다는 것이 알려졌다면 아마 진작에 소문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전혀 없다는 것은 교회가 성물이 사라진 것을 모르거나, 알고도 사실을 은폐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또다시 창고의 서적들을 뒤적이며 성물에 대해 찾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적어도 어느 지역 교회의 성물인지 알 수 있다면 흘러들어온 경로를 짐작하기 쉬울테니 말이다.
손에 쥔 펜던트를 품 안에 넣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붉은 석양이 지는 것을 보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문 앞에 서 있던 작은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주인님."
이때까지 집에 돌아왔을 때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아이린의 인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반겨준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체험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생소하기 짝이 없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린은 아직 트라우마가 남아있는지 내가 손을 뻗자 눈을 질끈 감은 채 떨었지만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한참 동안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아이린을 가볍게 끌어안아 주기 위해 다가간 순간 아이린이 고통 섞인 신음을 토해냈다.
"흐윽!"
그제서야 나는 서큐버스인 아이린에게는 상극인 성물이 내 품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곧바로 거리를 벌려 물러났다. 아이린은 아직 고통이 남아있는지 신음을 억눌러 참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성물을 품에서 빼내 탁자 위로 던지고는 아이린에게 전시되어 있던 푸른 빛을 띠는 포션을 먹였다.
신음을 참으며 꾹 다문 입술을 살짝 벌려 포션을 흘려넣자 아이린은 조금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받아마셨다.
포션을 모두 마시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진정됐는지 가는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아이린의 등을 팔로 받쳐주었다.
아이린은 왜 자신이 아팠는지 모르는 것 같지만 방금 전의 행동 때문에 내 손이 그녀의 몸에 닿을 때마다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하다."
내 사과에 아이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도리질하기만 할 뿐. 나는 그런 아이린을 품에 안아 아이린의 방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신성력이라는 상극의 힘을 접해 놀라 다리가 풀린만큼 조금 더 휴식이 필요했다. 아이린은 눈을 감은 채 작은 고양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 아이린의 뺨에 살짝 손을 갖다댔지만 오히려 눈을 질끈 감는 아이린의 모습에 결국 방을 나와버렸다.
'뭐하는 짓이냐. 이게.'
하다못해 머리만 쓰다듬고 끝내면 됐을 것을, 어울리지도 않게 안아주려고 하다가 아이를 다치게 했다. 청소를 끝내고 문 앞에서 한참동안 나를 기다렸을 아이를 말이다.
지독한 자기혐오가 치밀어 올랐다.
무엇보다 화나는 것은 '내게 호의를 가진 사람'을 내가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연상시켰다.
탁자 위에 올려놨던 성물을 손에 움켜쥔 채 힘을 주었다. 차라리 이대로 부숴버릴까 하는 생각이 치밀었지만 간신히 진정을 한 뒤 성물을 서랍에 넣었다.
아르웬이 말했던 것처럼 시청이나 모험가 길드에서 며칠 후 포션을 대량으로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겠다고 공지를 했는지 평소라면 한 두 명은 찾아왔을 모험가들도 전혀 찾아오질 않았다.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곧바로 가게 문을 닫았다.
나는 어린애를 대하는 것에 서투르고, 호의를 가진 사람을 대하는 것은 더욱 서툰 사람이지만, 적어도 상처를 입힌 이상 그만한 보상을 해줘야한다는 것은 알고있다.
물론 돈으로 줄 생각은 없다. 돈을 준다고 해도 아이린이 내 노예인 이상 사실상 소유물은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이린이 가장 원할 것 같은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