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60)

방문을 열고 들아가니 이불을 반쯤 뒤집어 쓴 채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던 아이린이 갑작스레 방에 들어온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주, 주인님?!"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아이린은 무의식적으로 침대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방금 전의 일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아 보였다.

결국 나는 아이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채 물었다.

"잠깐 거리를 함께 걷고 싶은데 괜찮겠니?"

제 주인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저를 처음 데려와서 매우 아픈 약을 바를 때만 해도 저를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보니 몸에 남아있는 흉터가 대부분 아물어 있었습니다.

예전에 생긴 흉터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근에 욱씬거리던 팔목과 허벅지에 있던 상처들은 전혀 아프질 않았습니다. 자고 일어났을 때 고통에 몸을 뒤척이지 않아본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습니다.

주인님은 특이하게도 노예인 저한테 따로 방을 내주셨습니다. 따스한 이불과 베개 덕분에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빈민가 구석에서 몸을 웅크려 자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님이 저를 깨우셨을 때, 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습니다. 노예가 주인님보다 늦게 일어났다고 혼날 줄 알았으니까요. 저도 모르게 사죄의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저를 혼내지 않고 제 상처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것보다, 상처는 어떠냐."

주인님의 말에 저는 저도 모르게 팔을 걷어 상처를 보여드렸습니다. 아까 봤던것처럼 붉게 흉터가 남아있던 상처는 살이 어느 정도 아물어 있었습니다.

제 상처를 확인한 주인님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방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멍하니 있던 저는 황급히 주인님의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 주인님은 저를 때리거나 고문하지는 않으셨지만, 주인님의 비위를 거슬러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물론 어제 바른 약은 죽도록 아팠지만, 오늘 상처가 아문 것을 보면 주인님은 아마 제 상처를 치료해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님 뒤를 따라 걸으니 주인님은 제게 거실 탁자 옆의 의자에 앉으라고 하시고는 부엌으로 가버리셨습니다. 주인님의 명령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은 채 주인님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할 일도 없이 앉아있기만하자 그제서야 공복을 자각한 배가 꼬르륵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부디 빵 조각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빈민가에서 살아갈 때는 하루에 한 끼 먹는 것조차도 힘들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

이렇게 두 끼를 먹지만 잘 사는 집의 경우에는 중간에 점심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만지며 어떻게든 공복을 떨쳐내려 하는데,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옥수수와 버터 냄새가 나는 걸 봤을때 스프인걸까요.

접시에 담겨 나오는 스프를 상상했다가 곧바로 지워버렸습니다. 어차피 먹을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할수록 배고플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서는 주인님이 스프를 조금이라도 남기시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불경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틀 동안 굶었더니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는 고개를 내밀어 부엌을 살폈습니다. 끓고 있는 냄비에서 풍겨오는 그윽한 스프 냄새가 더욱 허기를 자극했습니다.

주인님은 스프의 맛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스프가 담긴 냄비를 들고 탁자에 올리셨습니다. 탁자 위에 올라온 냄비의 뚜껑을 열자, 김이 확 일어나며 폭력적인 스프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냄비에 고개를 파묻고 스프를 먹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주인님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하는데, 이어진 주인님의 행동은 제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냄비에 담긴 스프를 국자로 가득 떠서는 접시에 담아 제 앞에 놓으시더니 스푼을 건네주셨습니다.

"한 번 먹어봐."

그 말에 순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주인보다 먼저 식사를 하는 노예라니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스프와 주인님을 번갈아 쳐다봤습니다.

문득 어제 저녁에 몸에 바른 약처럼 이 스프 안에도 이상한게 들어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해로운 독초 같은 것을 넣어 제게 시험해보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제게 먼저 먹어보라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조심스레 스푼으로 스프를 떠서 입 안으로 가져갔습니다. 어떤 이상한 독초를 넣었을지 걱정하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스프를 삼켰지만 제 예상과 달리 스프는 아주 맛있었습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맛에, 가끔씩 아삭아삭 씹히는 옥수수까지.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스프는 처음 먹어봤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맛있는 스프였습니다.

한 번 먹는 것만으로도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가, 주인님의 시선을 느껴 곧바로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주인님의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놓은 채 팔을 내리자 주인님은 싱긋 웃으시며 말하셨습니다.

"내 신경은 쓰지말고 마음껏 먹어. 잠깐 나갔다올테니 부족하면 얼마든지 냄비에서 더 떠먹고."

정말인걸까요. 고작해야 노예한테 이렇게 맛있는 스프를 모두 먹게 해준다니.

아뇨. 어쩌면 이건 시험인지도 모릅니다. 노예가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는지 테스트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결론을 내린 저는 더 이상 스프에 손도 대지 않기로 했습니다. 주인님의 말이 있었다고 해도, 접시를 다 비웠을 때 주인님은 저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노예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양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있으니 배가 계속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안 먹었으면 모를까, 맛있는 스프를 한 입 먹었더니 오히려 공복이 심해진 기분입니다.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잠시 후, 결국 저는 다시 스푼을 들고 말았습니다.

'한 숟가락. 딱 한 숟가락만 더 먹는거에요.'

한 숟가락 정도라면 주인님도 별로 줄어든 것을 눈치채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스푼에 가득 담긴 스프를 입 안에 머금었습니다.

따스한 스프가 입 안을 적시며 고소한 풍미가 그대로 퍼졌습니다. 고작 한 숟가락 떠먹었을 뿐인데도 공복감이 절반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한 숟가락만 더 먹을까요.'

한 숟가락을 먹었는데 이 정도면, 두 숟가락을 먹었을 때는 배가 아예 안 고프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조심스레 다시금 숟가락을 들었고.

그 결과.

'다 먹어버렸다.......'

그것도 접시에 스프 흔적도 남지 않게 싹싹 긁어 먹어치워버렸습니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한 접시를 보며 스스로를 자책했지만 없던 스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그래도 일단 떠 주신 스프만 먹어치웠으니 화는 그렇게 안 내실지도 몰라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주인님이 주신 음식을 다 먹지 않는게 더 나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어떻게든 혼나지 않는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지만 본능적으로는 혼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 보여준 주인님의 모습은 상냥한 분이셨으니 화를 내지 않으시기만을 빌며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어딜가셨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질 않으셨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님이 안 오시자 제 시선은 슬그머니 탁자 위로 향했습니다.

점점 식어가는 스프를 보자 아직 덜 찬 공복이 사악하게 속삭였습니다.

'어차피 혼날건데 뭐 어때? 그냥 먹어치워버려. 기왕 혼날거면 다 먹어치워버리는게 낫지.'

처음에는 고개를 흔들며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의 몫까지 다 먹어치워버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참기 위해 눈았지만 냄비 안의 고소한 스프냄새는 여전히 코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는 냄비 안의 스프마저 모두 먹어치워 냄비가 텅 비어버렸습니다. 주인님이 이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실까요. 먹보 노예는 쓸모없다면서 다시 팔아치운다거나, 목에 찬 구속구로 고통을 줄 지도 모릅니다.

바보같이. 조금만 더 참을 것을.

적어도 지금까지의 주인님의 모습은 상냥했습니다. 약은 무지하게 아팠지만 결과적으로 제 몸을 치유해주셨고, 스프도 무척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다 먹어치워버린 겁니다. 주인님을 뵐 면목이 없어 탁자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쪽팔림과 부끄러움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을 어떻게든 가리고 싶었습니다.

주인님의 시선이 냄비로 향하는 것을 보고 저는 곧바로 고함을 지를거라 생각했지만 주인님은 마치 냄비 안을 못 본 것처럼 빵을 탁자 위에 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빵을 사왔는데 조금 먹어볼래? 스프만 갖고는 모자랄텐데."

저를 배려해서 모르는 척 해주시는 걸까요. 어찌됐든 혼나지 않는 것만 해도 정말로 다행이었기에 저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습니다.

"아, 아뇨... 스프를 많이 먹어서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밍 나쁘게도 제 배에서 다시금 배꼽시계가 울렸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그 많던 스프를 다 먹어치우고도 또다시 울리는 배가 원망스러웠지만 주인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해."

그 말에 제 구속구가 반응하며 입이 씰룩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움에 어떻게든 대답을 거부하려 했지만 마법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실을 토해냈습니다.

"사실 스프를 먹어서 그런지 공복이 더욱 심하게 느껴졌습니다...빵도 먹고 싶습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이 비참한 진실을 토해냈습니다.

수치심에 이대로 목을 매달아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자해를 하는 것 역시도 주인님의 명령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몸이라는게 서러웠습니다.

이 순간만큼 자신이 노예라는게 원망스러웠던 적도 없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님은 제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빵을 잘게 썰어 제 앞 접시에 담아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치즈를 한 덩이 꺼내 방금 제가 먹은 스프 그릇에 우유와 함께 넣고 끓이시더니 제 앞에 놓아주었습니다.

척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과 소스를 보고 입 안에 군침이 맴돌았습니다.

방금 전에 그렇게 수치스러워 할 때는 언제고 금세 입 안에 군침이 도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지만 결국 늘 승리하는건 본능이었습니다.

중간에 군침을 삼키는 순간 주인님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아마 주인님은 보신 것 같습니다. 한층 더 자살충동이 일었습니다.

"난 신경쓰지말고 편하게 먹어. 오늘부터는 네가 해야 할 일도 있으니 말이야."

주인님의 말이 나오자마자 더 이상 뒤를 생각하지 않고 빵을 먹었습니다.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전투적으로 빵을 먹어치웠습니다. 어차피 이렇게까지 된 이상 거리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달콤하면서도 무척 바삭바삭한, 이렇게 맛있는 빵은 살면서 처음 먹어봤습니다. 한 입 먹을때마다 빵이 사라져가는게 슬플 정도로 빵은 무척 맛있었습니다.

그렇게 허겁지겁 빵을 먹다 목이 메여 가슴팍을 두드리는데 주인님은 치즈 소스를 가리키더니 빵에 찍어 먹는 시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빵만 먹지말고 이 치즈에 찍어 먹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다행히도 주인님은 혐오스러운 시선이 아니라 어딘가 따뜻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봐주고 계셨습니다.

만약에 경멸이나 혐오를 담은 시선이었다면 저는 진작에 밖으로 나가 달려오는 마차에 몸을 던졌을겁니다.

역시 제 주인님은 무척이나 상냥한 분인 것 같습니다.

오랜만의 배부른 식사가 끝나고 잠시 쉰 저는 주인님에게 가게 앞을 청소할 것을 명령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에게 명령을 받는 저는 이상할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런 잡일을 하는데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요. 주인님께 받은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양 손에 쥔 채 밖으려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주인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잠깐만."

그리고는 주인님은 갑작스레 제 목덜미를 손으로 더듬었습니다. 갑작스런 스킨쉽에 놀란 저는 목을 젖혔고, 주인님은 제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댔습니다.

역시, 어린애한테 관심이 없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님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코앞에서 주인님의 얼굴을 보니 괜스레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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