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60)

탁자와 부엌을 비롯해서 가게 안을 깨끗이 청소한 저는 주인님의 방 앞에 선 채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것은 노예로서 어떻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계속 고민하던 도중 저는 방 안에서 나는 묘한 냄새에 이끌려 그대로 방문을 열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말로 형용키 어려운, '야한' 냄새였습니다. 그 냄새를 맡는 것과 동시에 제 날개가 다시금 반응했습니다.

물론 어제 느꼈던 것 만큼 격렬하게 퍼덕거리지는 않았지만 살짝 움직이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제 주인님의 격렬한 정사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침대가 보였습니다. 어제 제가 뿜었던 액체와 비슷한 냄새는 아마 은발 여자의 것이겠지요.

그것 말고도 왠지 달콤한 냄새가 났습니다. 주인님의 향과 뒤섞인 이 향은 아마도 주인님의 소위 말하는 '정액'이라는 것이겠죠.

'정액이 달콤한 냄새가 나던가요?'

분명 리키에게 대충 교육을 받았을 때는 정액이 비린내와 함께 쓴 맛이 난다고 했지만 주인님의 정액 냄새는 황홀할 정도로 달콤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서큐버스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킁킁."

손에 쥔 양동이와 걸레를 내려놓고 주인님의 침대에 놓인 베개를 끌어 안았습니다. 주인님의 체취가 그대로 배인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냄새를 맡다가 아랫도리가 어느새 축축해졌습니다.

고작해야 냄새만으로 이렇게 축축해질 수 있는 걸까요.

방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점심 때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주인님이 돌아오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걸레를 빨아 주인님의 방바닥을 깨끗이 닦고 청소를 끝내자 창 밖에는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곧 주인님이 돌아오실테니 저는 문 앞에 선 채 얌전히 주인님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환영 인사는 뭐라고 하는게 좋을까요. 어서오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어서오세요, 주인님' 이었습니다. 잠시 후, 주인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시자 저는 준비한 말을 건넸습니다.

"어서오세요. 주인님."

주인님은 제 인사를 받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천천히 뻗어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셨습니다.

조금은 투박한 손이었지만 저를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에 행복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이상한 표정을 지어버릴 것만 같아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으신 주인님은 몸을 숙이며 저를 끌어안으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인님의 품에 안긴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팍에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습니다.

"흐윽!"

가슴을 불로 지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주인님이 제게서 몸을 떼어내자 고통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는 고통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반쯤 주저앉은 저를 끌어안은 주인님은 제 입을 벌려 푸른 빛을 띠는 포션을 먹이셨습니다. 죄송하게도 제멋대로 벌어진 입이 포션을 삼키지 못하고 조금씩 흘러내렸습니다.

포션을 마시자 방금 전의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들었습니다. 제 존재를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 저는 몸이 떨려왔습니다. 대체 그 감각은 뭐였을까요.

주인님은 저를 안아들고는 제 방의 이불 위에 눕혀주셨습니다. 문득 이런 상황이 꼭 동화 속에서나 듣던 '공주님'안기 같다고 생각하며 저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도 작게 웃었습니다.

주인님은 저를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제 뺨을 살짝 어루만졌는데, 그 때 문득 아까 가슴의 통증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아까는 부끄러움 때문에 눈을 감았다면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님은 그대로 방을 나가셨고, 저는 속으로 자책했습니다. 주인님에게 실례를 범하고 말았다고,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이불을 끌어안은 채 주인님이 다시 돌아오시면 고개를 조아릴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는 아까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주인님은 제 예상보다 빨리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오셨습니다.

"주, 주인님?!"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려던 제게 주인님은 점점 다가오셨습니다. 주인님이 다가올수록 진하게 나는 체취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습니다.

주인님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면 그대로 아랫도리가 젖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잠깐 거리를 함께 걷고 싶은데 괜찮겠니?"

주인님의 갑작스러운 말에 저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주인님은 옷을 갈아입고 나오라는 말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첫 외출이었습니다.

주인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오늘 걸레질을 하느라 더러워진 옷을 급하게 갈아입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주인님은 벌써 가게 문 앞에 선 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에게 사과하며 주인님의 뒤에 붙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뒤에서 걷는다. 리키가 가르쳐준 것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그런 저를 보시고는 명령하셨습니다.

"중간에 사라지면 곤란하니 뒤에서 걷지말고 옆에서 걸어."

주인님의 명령대로 저는 주인님의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때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중강 중간 가로등에서 빛나는 마석이 빛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가로등 아래에서 팔고 있는 대부분은 먹거리였습니다. 닭꼬치, 튀김, 사탕과 같은 간단한 식사나 후식으로 먹을 법한 메뉴들을 팔고 있었습니다.

고소한 기름 냄새에 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따라갔습니다.

닭튀김을 팔고 있던 노점을 보며 잠시 발이 멈추자 그런 제 시선을 눈치챈 주인님은 노점에 가서는 탉튀김을 봉투 가득 사오셨습니다.

"마음껏 먹으렴. 오늘 하루 정도는 얼마든지 사주마. 또 먹고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하렴."

그렇게 말하며 닭튀김이 잔뜩 담긴 봉투를 제게 주셨습니다. 고소한 닭튀김 냄새를 맡자 저녁을 먹지 못해 허기진 배가 곧바로 반응 했습니다.

게 눈 감추듯이 닭튀김을 모두 먹어치우자 이번에는 슈크림 빵을 잔뜩 사오신 주인님이 봉투를 건네셨습니다. 저는 사양하지 않고 슈크림을 입에 물었습니다.

한 입 베어먹자 부드러운 슈크림이 입 안 가득 퍼지며 달콤한 맛이 났습니다. 슈크림을 입 안에 밀어넣은 저는 봉투에서 슈크림을 꺼내 주인님에게 내밀었습니다.

"주잉닝도...드싱래용?"

슈크림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다 보니 발음이 뭉개졌지만 주인님은 제 말을 알아들으시고는 제가 뻗은 손의 슈크림을 가져가 베어 먹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맛있다'. 라고 짤막하게 말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삭막한 반응이었지만, 그게 또 주인님다워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주인님과는 저녁의 거리를 한참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처음으로 고급 옷가게에 가서 속옷을 구매했습니다. 점원의 추천에 따라 제 머리색에 어울리는 보라색과 핑크색 브래지어와 팬티를 두 세트 구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몸에 맞는 예쁜 원피스 두 벌과 셔츠와 치마도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옷을 사도 되나 싶었지만 주인님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옷을 제게 내밀고는 탈의실에서 갈아입게 했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점원이 너무 예쁘다며 칭찬했지만 주인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네'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원의 사탕발린 말보다는 주인님의 그 한마디가 훨씬 좋았습니다.

이 순간이 정말로 꿈만 같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저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이뤄졌으니까요.

슬쩍 고개를 들어 주인님의 얼굴을 보려다 주인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마도 주인님은 제 눈치를 보고 계신거겠죠.

방금 전에 제가 비명을 질렀을 때 주인님은 무척이나 필사적인 표정이었고, 저를 안아들었을 때는 무척 슬퍼 보였습니다.

고작해야 노예일 뿐인데, 주인님은 그런 저를 무척이나 생각하고, 사랑해주고 계십니다.

분명. 그렇기 때문에 저도 주인님을 좋아하게 된 것이겠지요.

주인님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저와는 일정한 거리를 벌린 채 걷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의 가슴에 느껴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저는 주인님에게 다가가서 달라 붙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인님에게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주인님. 사람들이 많은데... 잃어버리지 않게 손을 잡아도 될까요?"

제 말에 주인님은 잠시 망설이시더니 제 손을 부드럽게 맞잡아 주셨습니다.

주인님은 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조금은 마음을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인님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주인님과 저는 한참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길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은 어느새 썰물 빠지듯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텅 빈 거리를 아이린을 업은 채 걸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신나게 거리를 돌아다니던 아이린은 지쳤는지 어느새 꾸벅꾸벅 졸면서 거리를 걷고 있었고, 그런 아이린을 등에 업어주자 그대로 잠들었다.

아이린의 따스한 온기가 등 뒤에서 느껴졌다.

다행히도 아이린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척 즐거워했다. 나중에는 내가 자신을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먼저 다가와서는 손을 잡기도 했다.

그 사실이 너무 기특했다. 내가 열세 살 때는 억지와 투정만을 부렸던 것 같은데, 아이린은 벌써부터 나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런 딸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가로등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따라 가게로 돌아왔다.

밤이 늦은 시각, 아직 가게를 열고 있는 곳은 한 군데 정도 밖에 없었다.

그곳마저 슬슬 가게를 닫으려는지 슬슬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문을 닫으려는데 절규에 가까운 여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에 닫으려던 문을 천천히 열었다.

아이린을 부엌 의자에 앉혀놓고 밖으로 나와보니 피투성이가 된 갑옷을 입고 있는 여자가 사람을 업은 채 내 가게를 향해 다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갑옷의 무게가 있는만큼 옆에서 보기에는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금 시간이 걸려 도착한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악취가 풍겼다.

피냄새와 함께 고블린의 대소변으로 짐작되는 역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갑옷녀의 등 뒤에 업혀 있는 사람은 딱 봐도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옷녀의 등 뒤에 업혀 있는 사람을 살짝 내려준 다음 어깨를 기대어 부축했다.

가게 안으로 데려와 탁자에 앉힌 다음 아이린을 깨워 방 안으로 돌아가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방까지 업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잠에서 깬 아이린은 나와 옆에 있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갑옷녀를 보고는 살짝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방으로 돌아갔다.

가게 안의 불을 키자 증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목덜미가 보랏빛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죽은 피가 살갗의 색으로 드러날 정도로 심각했다. 게다가 지금도 실시간으로 독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부패독이군요. 고블린들이 쓸만한 건 아닌데 말이죠."

고블린이 만드는 독이라고 해봤자 얄팍한 마비독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이 여자가 당한 독의 이름은 '퍼플 제인'.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며 몸이 썩어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독 중에서도 꽤나 강력한 효과를 가진 상급의 독이었다.

이 정도의 부패독이라면 아마도 습격한 모험가들에게서 탈취한 것이리라.

내 말에 갑옷녀는 반쯤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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