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60)

어느 정도 경험 있는 베테랑 모험가라면 여기서 얌전히 입을 닦고 물러났겠지만 아직 모험가로서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 제시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안젤리카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루디 씨. 지금 당장 그런 거금을 지불 할 능력이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포션을 쓸 때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남았는지 제시카가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낼름 받아 먹을 수는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시카는 방금 전에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했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 말에 나는 살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뭐가 '뭐든지'라는 말인가. 자신의 몸에 대한 자각이 너무나도 없는 것 같았다.

플로라에 버금가거나 더 커 보이는 풍만한 가슴과 가슴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모를 잘록한 허리, 모험과 단련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허벅지까지.

젊은 남자 모험가들이 저런 말을 들었다간 그녀는 그대로 자빠뜨려져서 범해졌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옷을 벗어 주십시오."

내 말에 깜짝 놀란 제시카가 한 걸음 물러났다.

"엣?!"

"방금 뭐든지 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의 몸을 취하고 싶으니 옷을 벗어달라고 했습니다."

"그, 그런 뜻이 아니에요!"

손사래를 치며 거부 의사를 밝히는 제시카에게 나는 강한 어조로 설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면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십시오. 모험가뿐만 아니라 사람들 중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악질인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뭐든지'라는 단어를 남발했다가는 비참한 꼴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험가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몬스터 뿐만이 아니니까요.

내 말에 제시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끼어든 것은 조용히 있던 안젤리카였다.

"걱정마세요. 루디 씨. 비록 지금 5골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3골드 정도는 지금 드릴 수 있으니까요. 나머지 2골드는 의뢰를 수행하고 받은 돈으로 천천히 갚아드릴게요."

"...굳이 그러시겠다면, 알겠습니다."

"제시카. 잠깐만 가게 밖에 나가 있어. 난 루디 씨랑 조금만 더 이야기하고 나갈테니까."

안젤리카의 말에 제시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방을 나섰다. 내 말에 꽤나 충격받은 것 같았다.

제시카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안젤리카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제시카한테 충고해주신건 감사드려요. 제가 아무리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라고요."

"안젤리카 씨를 업고 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하시더군요. 언니를 살려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그 마음씨는 좋지만 그걸 악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아둬야 하기에 말했습니다. 혹시 제 말이 심했습니까?"

"아뇨. 제시카는 워낙에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 정도가 적당해요."

하긴, 딱 봐도 천연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러게나 말이죠."

안젤리카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더듬으며 조소했다.

그녀의 목덜미는 이미 흉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독기는 모두 빼냈지만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일 하루 정도는 쉬시는게 좋습니다."

안젤리카는 나를 꿰뚫어보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작게 속삭였다.

"안 그래도 당분간은 마을 안의 자잘한 의뢰만 맡아서 하려고요. 그보다 궁금한게 있는데요."

"물어보십시오."

"루디 씨는 대체 정체가 뭐에요?"

내 수준을 가늠하는 듯한 안젤리카의 말에 나는 몸을 돌려 검게 물든 침대 시트를 벗겨내며 대답했다.

"한 때 모험가를 했던. 그냥 평범한 포션 가게 주인입니다."

다행히도 돈주머니는 안젤리카의 로브 안에 들어있었기에 곧바로 2골드를 받을 수 있었다.

본래 안젤리카는 3골드를 주려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당분간 마을 안에서 지내실거라면 생활비가 필요할겁니다. 갚으실거라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갚으셔도 됩니다."

안젤리카는 내 말에 수긍하며 2골드를 건네주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제시카 씨를 잘 달래 주십시오. 보아하니 자기 때문에 안젤리카 씨가 이렇게 됐다고 자책하는 것 같으니까요."

내 말에 안젤리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게를 나갔다.

온 몸에 노곤한 피로가 몰려왔다.

가게 밖에서는 안젤리카에게 무슨 대화를 했냐고 묻는 제시카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는 아르웬을 배웅하고, 포션을 만들기 위해 바크를 찾아가 식사를 하고, 골동품점에 들러 성물을 찾고, 아이린과 함께 야시장을 돌아다니고, 독에 중독된 모험가를 살렸다.

하룻동안 지나치게 많은 일들이 있어 몸도, 정신도 피로한 상태였다.

답답한 기분을 풀기 위해 품에서 꺼낸 연초에 불을 붙였다. 아직도 가게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깊게 숨을 삼켰다. 탁한 연기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피곤하지만, 나쁘지는 않아."

불과 며칠 전, 나는 똑같은 자리에 앉은 채 지독한 권태와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있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연초를 모두 태우고 바닥에 떨어진 재를 빗자루로 쓸어 쓰레기통에 털어넣었다. 방금 전 안젤리카가 흘린 피 때문에 오늘은 침대에서 자기에는 글렀다.

결국 나는 가게에 있는 의자를 세 개를 붙이고는 그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자리가 불편했지만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할 때를 생각하며 잠을 청하자 생각보다 쉽게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온 몸이 뻐근했다.

세월은 속일 수 없다며 자조하며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보니 아이린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린을 깨우지 않도록 다시 문을 살짝 닫고는 욕실로 가서 몸을 씻었다.

생각해보면 어젯밤에 옷에 튄 안젤리카의 피를 제대로 닦지도 않은 채 잠들었다. 몸을 모두 씻고나서 입고 있던 옷을 마법으로 세탁한 후 줄에 매달아 놓았다.

방으로 돌아와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어제 먹고 남은 빵과 간단한 샐러드로 적당히 아침을 만들었다.

어젯밤에 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먹어댔으니 아침 정도는 가볍게 먹어도 되겠지. 아침을 차려놓고 아이린의 방으로 가서 아이린을 깨웠다.

"으응...주인니임..."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잠꼬대로 나를 애타게 부르더니 나중에는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더 자게 두고 싶었지만 그래도 해가 중천에 떴기에 아이린을 흔들었다.

몇 번 몸을 흔들자 곧바로 눈을 뜬 아이린은 나를 보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주인...님?"

"그래. 아침 식사 시간이니 어서 나오거라."

탁자에 앉아 먼저 빵을 먹고 있으니 조금 후 아이린이 내 옆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만 아까 방에 찾아갔을 때와는 달리 잠결에 풀어헤쳐진 머리가 아니라 한 쪽으로 넘겨 얌전히 정돈된 머리였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이번에는 아이린에게 설거지를 맡겼다.

평소에는 마법을 사용하지만 오늘은 아이린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설거지를 시킨 것이었다. 내 명령에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이 부엌에서 식기를 씻는 동안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체크했다.

어제 안젤리카에게 마시게 한 마취제의 재고를 채워놓고, 시청에 보급해야하는 포션도 만들어야했다.

바크가 직원을 통해 물건을 보내준댔으니 아마 오늘 안에는 도착할 것이다.

'조만간 숲에도 한 번 가야하긴 한데.'

다른 약들과 달리 어제 쓴 것처럼 강력한 마취제와 같은 약들은 재고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언제 쓸 일이 있을지 모르니 넉넉히 구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마침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니 그 때 숲에 다녀오기로 하고 슬슬 가게를 열려는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벌써부터 첫 손님인가. 오늘은 꽤나 운수가 좋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밖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문을 열어주자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루디 씨......."

곧바로 문을 닫자 상대는 문 틈 사이로 손을 끼워넣었다.

그래도 거리낌 없이 문을 닫으려고 하자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손을 끼웠는데도 이러기에요?! 너무하잖아요!"

소리를 질러대며 이제는 양 손을 끼워 문을 필사적으로 열려고 하는 제시카의 행동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주었다.

머리가 아팠다. 어제 그런 소리를 듣고도 대체 왜 내 가게를 찾아왔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혹시 아르웬처럼 내게 매도당하고 특수한 성벽을 뜬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변태를 이틀 연달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문을 열어주자 제시카는 여전히 활발하게 떠들어 대며 내게 투정을 부렸다.

태도가 너무하다, 장사할 생각이 있기는 한 거에요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제시카를 보니 나도 모르게 욱씬거리는 이마를 검지로 짚었다.

"오늘은 왜 찾아오셨습니까."

"언니는 여관에서 쉬고 있겠다면서 나중에 할만한 의뢰를 찾던가, 다음 모험에 필요한 물건을 구비해두라고 했거든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제시카는 아무 생각 없이 왔겠지만 그녀의 언니인 안젤리카가 여기로 오도록 유도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건 그런 이유였나.

"......그래서요?"

"포션도 사고, 루디 씨한테 빚진 것도 갚을 겸 왔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려고요. 아, 물론 야한건 안 되요!"

허겁지겁 덧붙이는 제시카를 보니 더욱 머리가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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