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언제 왔는지 설거지를 끝낸 아이린이 내 뒤에 달라붙어서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제시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공기는 무척이나 상쾌했지만,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위장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
결국 나는 제시카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가게 안을 둘러본 제시카는 각기 다른 색을 띠는 포션을 보고 입을 벌려 감탄했다.
"와아, 되게 예쁜 색이다..."
제시카는 주황빛의 포션병을 손에 들고는 흔들었다.
"참고로 마비 포션이니 마셨다가 뻗어도 책임 안 집니다."
"... 그런 걸 왜 파는 거에요?"
"사람만 포션을 마신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호수에 포션을 풀어놓고 물을 마시는 몬스터를 잡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가?"
물론 내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어쩌면 저 포션을 사람에게 먹여서 악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분은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상인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물건을 팔 수 있는지이지 팔린 물건이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아니었으니까.
수도였다면 치안 문제 때문에 저런 마비 포션의 경우 제작과 판매에 대해 엄중하게 관리하지만 이런 변두리 영지에서는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독이나 마비 포션은 의외로 모험가보다 농민들이 자주 구매하곤 했다. 밭과 논을 침범하는 들개나 몬스터들을 잡기 위해 독이나 마비 포션을 발라놓은 고기를 던져 놓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이 밝자마자 제 가게에 오신 진짜 이유는요?"
원래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제시카는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언니가 루디 씨한테서 모험가의 마음가짐에 대해 좀 더 배우라고 했거든요. 저도 어제 여관에 가서 좀 더 생각해봤어요. 확실히 지금이야 언니랑 저랑 둘이서 활동하니 걱정이 없지만, 나중에 다른 '클랜'에 들어가게 되면 남자 모험가들이랑 함께 다닐 일도 있을테고."
결국 안젤리카가 시킨 것이었다. 어제 그냥 포션을 적당한 가격에 팔아치우고 돌려보낼 걸 그랬다.
이렇게 귀찮은 일에 엮이게 될 줄이야.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제시카는 어제와 달리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가죽 조끼도 걸치지 않은 완전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묶어 뒤로 넘겼고, 매끈한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와 함께 배꼽이 보이는 탱크톱을 입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이 여자는 자각도 없이 남자 모험가들의 아랫도리를 자극할만한 옷차림으로 온 것이었다.
싸구려 술집의 호객꾼이나 입을 법한 노출 면적이 넓은 옷차림이었다. 야한 짓을 질색하는 여자가 입을 옷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만, 지금 그 옷차림은 무슨 특별한 의도가 담긴 겁니까?"
"응? 아뇨? 그냥 이 차림이 제일 움직이기 편해서 그런건데요."
저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좋아 안젤리카. 당신이 이겼어.
당신 동생은 진짜배기 천연기념물이야. 대체 이 나이 먹도록 뭘 가르친거냐고.
"여기까지 오는데 사람들이 쳐다보진 않았습니까?"
"그랬던 것 같긴 한데 아무 말도 안 하길래 그냥 지나쳐서 왔는데요?"
차라리 갑옷을 입은게 나았다. 당장 가게 밖에만 봐도 창 너머로 이쪽을 힐끔거리는 남자들이 몇 명 보였다. 아마 제시카가 가게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 온 것이겠지.
오라는 손님은 안 오고 날파리만 꼬이게 생기자 나는 제시카를 가게에서 쫓아냈다.
"돌아가세요."
"네? 그래도 제가 도와드릴만한게..."
"내일 동쪽 숲에 가서 포션 재료를 채집할 겁니다. 그 때 도와주시면 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전투 복장으로 내일 아침에 가게로 오세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제시카는 시무룩하면서도 얌전히 가게를 나갔다. 제시카가 나가는 것을 본 아이린이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주인님...내일 나가시는 거에요?"
"포션 재료를 채집하러 갔다올 것 같은데 내일 하루는 혼자 가게를 지킬 수 있겠니?"
마음 같아서는 아이린도 데려가고 싶지만 아직 정식으로 신분패가 발급되지 않아 성벽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포션을 모두 만들고 아르웬에게 찾아가 신분패를 발급 받은 후라면 모를까.
나는 눈에 띄게 실망하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여 주었다.
"금방 돌아올테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다음부터는 너도 데리고 가 주마."
하루 종일 가게 안에만 갇혀 있는 것도 정서에 별로 좋지 않으니 말이다.
내 말에 아이린이 비로소 표정을 풀고 배시시 웃었다. 예전에는 어린애들을 돌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확실히, 이런 미소를 매일같이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돌봐줄 수 있을 것 같다.
제시카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리튼 상단의 직원 두 명이 프라미아 꽃잎이 담긴 상자를 배달했다.
물품을 확인한 후 나는 그들에게 시원한 사과 주스를 한 잔씩 대접하자 그들은 무척 고마워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상자에 담긴 프라미아 꽃잎을 포션 한 병을 만들 수 있는 분량으로 나누어 담았다.
옆에서 내가 하는 것을 본 아이린은 나를 따라서 빈 포션병에 프라미아 꽃잎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요령좋게 내가 담은 파라미아 꽃잎과 거의 똑같은 양을 포션병에 담고 있었다.
어쩌면 나중에 외출할 일이 있을 때 아이린에게 가게를 맡겨도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마치 200병에 프라미아 꽃잎을 나누어 담는 작업이라 꽤나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내 가게의 단골 모험가들이 찾아와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다가 포션을 사가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걸려 빈 포션병들에 프라미아 꽃을 모두 채운 다음 창고에서 꺼내온 트롤의 피를 병마다 천천히 붓기 시작했다. 욕조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의 피를 붓고 나서야 간신히 포션 200병 분량을 채울 수 있었다.
정제된 꽃잎과 트롤의 피가 닿자 그대로 녹아 희석됐다. 옅은 붉은빛을 띄는 포션 병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나는 창고에 넣어두었다.
나중에 아이린이 잠들고 나면 그 때 마법 부여를 할 생각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작업을 했기 때문일까, 창고에 포션 병들을 옮겨 놓고 나자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점점 저물어가는 태양과 은은한 빛을 뿌리는 노을을 바라봤다.
아이린 역시도 내 옆에 얌전히 앉아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던 중 창 밖으로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 거리에는 상단이나 공공건물도 없었기에 마차가 다닐 일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마차는 내 가게 바로 앞에 멈춰섰다. 지난번 백작가의 집사장이 타고 왔던 것과 동일한 마차였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이전의 그 집사장과 플로라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였다.
먼저 내린 집사장이 양산을 펴서 소녀가 내리자 햇빛이 들치지 않도록 가려주었다.
'코앞에서 뭘 하는거야.'
고작해야 열 걸음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인데 저런 짓을 하는게 우스웠다. 하지만 저게 귀족 나름의 생활이라 생각하니 이해가 안 가지는 않았다.
귀족이란 원래부터 저런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집사장이 가게 문을 열어주자 다소곳이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소녀는 그야말로 '눈' 같은 소녀였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햇빛을 받은 적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얀 피부.
입고 있는 드레스까지 흰 색이어서 그런지 마치 눈의 요정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가게에 들어오고 나와 아이린을 번갈아 보고 멈칫거렸다.
특히, 나를 향한 두려움 섞인 시선이 신경쓰였지만 그녀는 금세 귀족 특유의 고풍스러운 표정을 연기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저는 바스티안 백작가의 독녀. 앨리스라고 합니다. 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드레스의 양 끝자락을 잡아 올리며 공손히 인사하는 앨리스에게 나 역시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루디 님이 제 목숨을 구하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저 상점을 운영할 뿐이고, 그 일에 대해서라면 백작님께 이미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았으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도 앨리스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다시 한 번 묻자 앨리스는 그제서야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 오늘 찾아온 건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지만...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찾아뵀을 때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는 다시 한 번 드레스 양 끝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양산을 들고 있던 집사장은 내게 한 번 손을 흔들어주고는 앨리스가 마차 위로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앨리스를 태운 마차는 그대로 거리를 벗어났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곳을 왔다 간 것일까.
뻐근하게 굳은 목을 풀며 방금 전 앨리스가 찾아온 것에 대해 생각했다.
백작가의 영애께서 고작해야 포션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이상했다.
물론 앨리스라는 소녀의 마음씨가 무척 곱고, 은혜를 잊지 않는 성격이라 찾아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방금 전 명백히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애초에 감사 인사를 하러 올 생각이었다면 저렇게 황급히 돌아가지도 않았겠지.'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도 맞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영지에 오고 나서는 특별한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이 영지에 온 반년 동안 나는 평범한 포션가게 주인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백작가의 눈에 띌 만한 짓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꼬리를 잡힐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앨리스의 태도는 명백히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가시구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백작가의 영애 정도 되면 입막음을 하기도 어렵다.
정체를 들킨다고 하더라도 조금 귀찮은 일이 생길 뿐, 찔리는 일은 없지만 모처럼 찾아온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