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은 혹시 귀족이셨나요?"
아이린은 약간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했니?"
"제가 아는 귀족들은 감사한 일이 있어도 평민에게는 반말을 하거나 거만한 태도인데, 저 언니는 전혀 안 그래 보였어요."
아이린의 말대로였다. 앨리스는 내게 계속 존대를 사용하며 예의를 갖췄다.
귀족 치고는 지나치게 예의 바른 행동이었다. 조금 더 거만하게 굴어도도 됐을텐데 말이다.
오히려 한 수 접어주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는 묘하게 내 눈치를 본다는 느낌이 있었다. 나를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말하고도 우스웠다.
백작가의 영애께서 고작해야 포션 가게 주인의 눈치를 본다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재미 없는 농담이라고 비웃을 이야기였다.
다음 날, 가게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역시나 제시카였다.
그래도 내 말대로 오늘은 갑옷과 옆구리에는 검을 차고 왔기에 어제처럼 남자들의 시선이 몰리는 일은 없었다. 물론 갑옷으로 얼굴까지 가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폭력적인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숲에 가기 전에 잠깐 시청에 들르죠. 짐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알았어요."
어젯밤 아이린을 먼저 재우고 마법 부여를 한 포션 상자들을 꺼냈다. 각 상자당 50병씩 담았기에 두 상자를 제시카에게 넘겨 주었다.
"들 수 있겠어요?"
포션병이라고는 해도 자그마치 100병이었기에 제시카가 못 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제시카는 상자를 가볍게 들었다.
"괜찮은데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편안한 표정으로 상자를 들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네요. 아이린, 오늘 하루 가게를 잘 봐주렴."
그렇게 말하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린은 어린아이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듯한 미소였다.
지난번 아르웬과의 관계 후, 깜박하고 주지 않았던 속옷 값과 지난번에 마음에 들어하던 바디 크림은 다른 봉투에 따로 챙겨뒀다. 마음 같아서는 트롤고기도 좀 챙겨주고 싶었지만 내가 트롤 고기를 조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귀찮아질 것 같아 그만뒀다.
그렇게 봉투를 품 안에 넣고 제시카와 함께 포션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시청으로 향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를 돌아다니느 사람은 별로 없었다.
10분 정도 걸어가자 영지의 중앙에 있는 백작가 자택과 시청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시청의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상자를 들고 시청 안으로 들어가자 접수처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아르웬과 마주쳤다.
"루디 씨!"
접수처의 칸막이를 올리고는 곧바로 다가온 아르웬의 앞에 포션 상자를 내려놓았다. 제시카 역시도 내가 놓은 상자들 옆에 들고온 상자를 내려놓았다.
"벌써 다 만드신거에요?"
"빨리 만들수록 죽는 모험가들이 줄어들테니까요."
내 말에 아르웬은 감격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비록 가슴팍에 느껴지는 감촉은 없었지만 따스한 온기와 함께 아르웬 특유의 체취가 풍겨왔다.
"정말 감사드려요! 사실 어제만 해도 모험가 파티가 두 개나 전멸했거든요.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이걸로 한 숨 돌렸어요..."
"그렇게 심각합니까?"
상황이 내 예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물론 제국 7대 미궁에 준하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남작도 아닌 백작가에서 이렇게 던전이 오랫동안 남아있다는 것은 던전의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다는 뜻이었다.
"...네. 우선 모험가 파티를 한 번 더 정찰을 한 뒤, 그 다음에는 저희 영지 전속 용병단인 '황혼의 빛'이 나서기로 했어요."
확실히, 일이 이 정도로 커지면 마냥 모험가들에게 맡겨놓기도 그럴 것이다. 영지의 전속 용병단은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혹시 나중에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습니다."
"호의에 정말 감사드려요. 루디 씨. 맞다. 대금은..."
"분위기를 보니 지금 당장 대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다음에 아르웬 씨가 제 가게를 찾아오셔도 되고, 아니면 제가 다시 한 번 시청을 찾아오겠습니다."
"그, 그럼 제가 다음에 루디 씨 가게에 찾아가는 걸로......"
그렇게 말하는 아르웬은 뭘 생각했는지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설마, 흥분한건 아니겠지.
"그리고 이거. 받아두십시오."
"네?"
내 뒤의 제시카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속삭였다.
"지난번에 마음에 들었다고 하신 바디 크림이랑 찢었던 속옷값입니다."
아르웬의 달아오른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아르웬의 상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접수처와 이어진 방에서 나왔다.
"아르웬. 일단 모험가들에게 공지부터...응?"
남자는 나와 아르웬을 번갈아보더니 다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당신이 루디 씨였군. 우리 아르웬을 잘 부탁하네. 아직 부족한 친구지만 마음씨는 참 곱다네."
"왜 사무관님이 제 아버지처럼 말씀하시는건데요!"
얼굴을 붉힌 아르웬이 남자에게 성을 내자 남자는 능글맞게 웃으며 받아쳤다.
"응? 무슨 소리를 하는겐가.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자네의 상관으로서 아르웬을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네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아르웬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내가 준 봉투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마워요 루디 씨. 일이 정리되는대로 바로 찾아갈게요."
"...천천히 오십시오."
에상 외의 기습이었기에 대답이 조금 느렸다.
아르웬도 부끄러운건 마찬가지인지 곧바로 바닥의 포션 상자를 하나 들고 몸을 돌려서는 접수처로 돌아갔다.
"사무관님! 포션 상자 안쪽으로 옮기는 것좀 도와주세요!"
"무슨 소린가. 이런 늙은이에게 저런 육체노동을 시킬 셈인가?"
"아직 마흔 밖에 안 되신 분이 늙은이 운운하지 마시고요!"
그런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은 나는 제시카와 함께 시청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제시카는 뭐가 마음에 안드는지 불퉁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그냥... 방금 저 여자가 루디 씨 여자친구에요?"
"아닙니다."
"방금 전에 보여준 행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아르웬이 내 뺨에 입을 맞춘 것을 말하는 것일까.
"친한 친구끼리는 가끔 할 수 있는 스킨쉽 아닙니까."
"...제가 남자 사람 친구를 사겨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는 못 말하겠지만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사귐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 법입니다."
"말이라도 못하면."
제시카는 시청에서 나와 동쪽 숲으로 가는 길 내내 투덜거렸다. 확 두고 가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두고 갔다간 다음 날 아침부터 또다시 시끄럽게 하겠지.
기본적인 상식이나 기술만을 가르쳐주고 끝내자.
성의 동문을 나가려고 하자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신분패를 요구했다. 나는 지난번에 받고 늘 지니고 다니는 1급 시민 증명서를 꺼내들었고, 제시카는 모험가들에게 지급되는 모험패를 건넸다.
제시카의 모험패를 확인하던 경비병들은 내 증명서를 보고 잠시 굳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1급 시민이라는게 대부분 영주나 영주의 가족들이니 아무래도 실례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걸 받은 것도 며칠 전이고. 그것보다, 슬슬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 혹시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곧바로 구조대를 파견하겠습니다!"
1급 시민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나는 경비병에게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말했고, 그는 알겠다며 다시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단하네요. 평소 같았으면 아무 말 없이 통과했을텐데."
경비들은 내 동행인 제시카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쓰며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살면서 그런 대우는 처음 받아봤어요. 사실 병사들은 모험가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죽든 말든 신경을 안 쓴다고 해야하나."
"영지 내에서 사건을 일으키는 녀석들 중 대부분이 모험가고, 모험가는 세금을 안 내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모험가들은 계속 거점을 바꿔가며 활동하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 물론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혜택도 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모험가들이 집을 살 때는 평범한 시민이 사는 것보다도 더 많은 수수료가 붙었다.
주점에서 매일같이 주먹질을 하다가 경비들에게 끌려가는 녀석도 양아치 모험가였으며 상인의 집을 털다가 끌려나가는 것도 도적 계열의 모험가였다.
모험가와 부랑자는 말 그대로 한 끗 차이었다.
그러니 경비들 입장에서는 모험가란 존재가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놔두자니 신경쓰이고, 내버려두자니 사고를 치고 다니고. 그렇다고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쫓아내버리고 싶지만 성을 경비해야 하는 병사들을 대신해 몬스터들의 숫자를 줄여주는 게 모험가였기에 간신히 상호 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성을 나오니 광활한 평원이 드러났다.
평원의 끝자락에는 숲이 위치해 있었다. '동쪽 숲'은 북쪽 숲과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제시카가 마주쳤던 흉폭한 몬스터들을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가볍게 둘러보고 돌아가죠. 제가 약초를 채집하는 동안은 주변을 경계해주십시오."
"네이. 네이."
태평한 소리를 하면서도 제시카는 한눈 팔지 않고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걷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자신의 언니가 기습당해 생사를 헤맸으니 당분간은 방심할 일도 없을 터다.
메마른 평원을 지나 숲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경고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