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야생 동물 주의※]
경고 문구는 허름한 나무 판자에 새겨져 있었다. 나무 판자 뒤로는 숲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평소 모험가들이 숲 속을 돌아다니며 만들어놓은 길이었다.
"중간까지는 길을 따라가겠지만 나중에는 직접 길을 내서 숲 속을 돌아다녀야 할 겁니다."
다른 모험가들이 지나다녔다는 말은 나처럼 채집을 목적으로 온 사람도 이 길을 돌아다녔다는 뜻이었다. 길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해서는 쓸만한 재료를 채집할 수 없었다.
숲의 초입부에서는 별다른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기껏해야 토끼가 수풀 사이로 뛰어다니거나, 날다람쥐가 나무 사이를 비행하는 것이 보이는게 전부였다.
하지만 숲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기분 나쁜 기척들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굶주린 늑대 몇 마리와 지나가던 멧돼지와 마주쳤지만 놈들은 나와 제시카를 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녀석들이 즐겨 먹는 건 인육이 아니었으니 먼저 적의를 보이지 않는 우리와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여유롭게 숲 속을 걷는 나와 달리 제시카는 들개나 멧돼지와 마주칠 때마다 긴장하는게 느껴졌다.
조금 과한 것 같기도 했지만 모험가라는 직업 자체가 원래 저 정도의 긴장감은 필요했다.
베테랑 모험가조차도 잠깐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는게 부지기수였다. 아직 초짜 티를 벗지 못한 제시카에게는 이 정도가 적당했다.
그렇게 채집할만한 꽃이나 열매가 없나 둘러보던 도중 내 귀에 기분 나쁜 숨소리가 잡혔다.
"케륵...케르륵..."
특유의 숨을 헐떡이는 듯한 기분 나쁜 숨소리.
"...인간 냄새......난다. 동료들에게...알려야..."
개코에 비견해도 좋을 정도로 냄새를 잘 맡고, 무리지어 생활하는 존재.
놈이 동료들에게 사실을 전하기 전에 처리해야했다. 곧바로 수풀을 헤치고 달려나가자 내 뒤에서 따라오던 제시카가 놀라며 황급히 내 뒤를 따라잡기 위해 달리는게 느껴졌다.
나무 옆의 수풀을 헤치고 나오자 아까 맡은 냄새를 확인하고 있는지 몸을 숙인 채 킁킁 거리고 있던 '놈'과 마주쳤다.
기분 나쁜 초록색 피부. 1미터도 채 안되는 자그마한 키.
손에는 조잡하게 만든 나무 곤봉이 쥐어져 있었다.
"케르륵...인간...죽인다..."
고블린이었다.
고블린.
평범한 사람이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몬스터다.
가끔씩 화전민들의 마을이 고블린들의 습격에 의해 사라졌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오곤 한다.
오크나 트롤과 같은 중형 몬스터에 비해 터무니 없이 약하지만 덩치가 작기 때문에 몸놀림이 날렵하다.
성인 인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소변이나 대변과 독초를 섞어 화살촉이나 녹슨 창에 발라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고블린에게 붙은 별명들 중 하나가 '모험가 킬러(Adventurer Killer)'였다.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며 모험가가 된 이들은 처음부터 몬스터 사냥 의뢰를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오크와 트롤처럼 인간과 필적하거나, 더 강한 몬스터가 아닌 자신보다 약하고, '저 정도면 나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바로 고블린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이들의 대부분은 뼈만 남긴 채 숲에서 발견되곤 한다.
고블린이 한 마리일 때야 괜찮겠지. 성인 남자라면 어지간한 병신이 아닌 이상 두 마리 까지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고블린이 자신의 부락에 신호를 보내는 순간 상황은 역전된다.
숲을 자기 집처럼 활보하는 고블린 수십, 수백 마리들이 곧바로 모험가들을 포위하고는 화살세례를 쏟아붓는다. 뿐만 아니라 조잡하게 만든 창과 검을 들고 주변을 둘러싼 채 도망가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는다.
이게 바로 짐승과 몬스터의 차이였다.
늑대나 멧돼지 같은 놈들은 인간이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는 이상 굳이 싸우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몬스터는 짐승들과 달리 인간을 만나는 순간부터 이유 없는 적의를 불태운다.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기에 그들이 '몬스터(Monster)'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물론 고블린들 수백마리가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딱히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진다. 그러니까.
서걱. 허리춤에 매달아놨던 단도를 꺼내 녀석의 목을 잘라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이 날아간 고블린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고블린의 피가 바지춤에 살짝 튀었지만 그걸 닦을 틈도 없이 곧바로 흰색 포션병을 꺼내 고블린의 시체에 뿌렸다.
냄새를 지우는 포션이었다. 동족의 피냄새를 맡고 다른 놈들이 쫓아오지 않도록 포션을 뿌린 시체를 수풀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헉...헉...왜 그렇게 뛰어가는...어라?"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고블린들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놈은 정찰병일 겁니다."
내 말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지 제시카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보다가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단도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허물어져 있는 고블린의 시체를 보고 입을 막았다.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모험가로 활동하면서 이런 시체는 질리도록 봤으면서."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목을 깔끔하게 날린적은 없었거든요! 으엑...아침 먹은거 토할 것 같아."
"익숙해지십시오. 슬슬 움직입시다.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으면 본대가 움직일겁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방향을 틀었다. 하다못해 트롤이라면 모를까 고블린 따위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좀 더 안쪽 숲으로 들어가던 도중 나는 살짝 멈춰섰다. 내 뒤를 따라오던 제시카가 내 등에 코를 박고는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으갹! 갑자기 왜 멈춘거에요!"
"확인할게 있어서 멈췄습니다."
반쯤 주저앉아 발치에 있던 식물을 살폈다. 특이하게도 초록색 줄기가 아닌 옅은 분홍색의 줄기, 꽃에서 풍기는 톡 쏘는 듯한 향기, 마지막으로 주변에 말라비틀어져 있는 다른 꽃의 모습까지.
"포브미스 꽃이군요."
"어디다 쓰는데요?"
"정력제나 피로 회복제에 주로 사용되는 약재입니다. 주변 식물들의 양분을 모두 빼앗아 안에 마나를 응축하고 있다가 인간이 섭취하면 체내의 활력을 돋아주기 때문에 부르는게 값인 꽃이죠."
제시카의 물음에 대답해주며 나는 조심스레 포브미스 꽃 옆의 땅을 파냈다. 포브미스 꽃은 뿌리부터 꽃입까지 버릴 것 하나 없었기에 온전히 캐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포브미스 꽃을 채집해 자루 안에 넣은 다음 다시 길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동쪽 숲으로는 안 왔기 때문일까,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라진 지역도 있었고, 보지 못한 희귀 식물들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우연히 고블린을 한 두 번 더 만나기도 했지만 제시카가 문제 없이 처리했다.
제시카의 검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정석적으로, 틀이 잘 잡힌 검술이었다.
물론 정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D랭크 모험가 치고는 저 정도면 우수한 실력이었다.
"검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예전에 살았던 마을에 검술 도장이 있었어요. 저희 아버지도 젊을 때는 용병을 하셨다보니 호신술이라도 배워두라고 검술 도장에 보내셨는데 거기서 배웠죠."
역시, 야매로 배운 검술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제대로 익힌 검술이었다.
평소에 농사나 짓다가 모험가가 되겠다고 뛰쳐나온 애들은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 봐도 티가 났다.
드물게는 무게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꼴사납게 뒤로 자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안젤리카의 의도대로 놀아날 생각은 없었지만 자그마한 충고를 해주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
"고블린 같이 작은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검에서 힘을 조금 빼십시오. 몸을 크게 움직일수록 다음 공격과의 차이가 벌어집니다. 고블린 같이 수량으로 밀어붙이는 놈들에게는 검을 좀 더 짧게 쥐고 가볍게 휘두르는 감각으로 싸우시면 됩니다."
"가볍게...이렇게요?"
방금 전 고블린을 해치울 때 크게 휘두르던 검의 궤적이 작아졌지만 휘두르는 속도는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오크나 트롤과 달리 고블린의 피부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검에 조금만 닿아도 그대로 나자빠질 겁니다."
내 말에 제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숲을 돌아다니며 약재를 좀 더 채집한 다음 숲에서 빠져나왔다.
돌아다니다가 중간에 다른 모험가 파티와 한 번 마주치기도 했지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지나갔다.
숲을 완전히 빠져나오니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자 다시금 경비병이 허리를 숙이며 깎듯이 인사했다.
그런 경비병을 뒤로 한 채 가게로 돌아오니 곧바로 달려나온 아이린이 내 품에 안겼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대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오늘 채집한 가죽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은 수고하셨습니다. 제시카 씨. 괜찮으시다면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가?"
"그래도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덕분에 오늘 하루 안전하게 숲을 돌아다닐 수 있었으니까요."
제시카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얌전히 얻어먹도록 할게요."
제시카는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가게 구석에 치워놓았다. 입고 있던 복장은 어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풍만한 가슴이 부각되는 탱크톱과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
보기만 해도 하반신이 움찔거릴 것 같은 매력적인 몸매였다.
아이린은 그런 제시카의 맞은편에 앉고는 제시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혹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제시카와 아이린 사이에 싸움이라도 있었나?
제시카도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다가 아이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서로를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중간에 전기가 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맹렬히 노려보다가 내가 저녁 식사를 들고오고 나서야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샐러드와 양념한 닭고기. 거기다 크루거의 빵집에서 사온 빵 정도 였지만 제시카는 가리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루디 씨는 요리 되게 잘하시네요. 겉으로 보이는 거랑 다르게."
그 말에 다시금 아이린이 제시카를 노려봤지만 제시카는 나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 돌아다니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들 뿐입니다."
"치, 대체 무슨 삶을 살아오신거에요?"
투덜거리면서도 음식을 모두 먹어치운 제시카가 배를 가볍게 두드렸다.
"후아...잘 먹었다. 메뉴는 적어도 어지간한 고급 식당보다도 맛있었어요. 요리사 하셔도 되겠는데요?"
"나중에 포션 가게가 망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거, 절대 할 생각 없다는 말로 들리는건 기분 탓이죠?"
제시카는 키득거리면서 두 다리를 꼰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