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60)

"언니가 왜 루디 씨한테 관심을 가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저는 연하는 조금."

"또. 또. 그런 의미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 돌리잖아요."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미지의 지식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나에 대한 관심은 좀 접어줬으면 한다.

안젤리카는 이미 내가 정체를 숨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오지 않고 천연인 자신의 동생을 보내서 이러고 있는 것이겠지.

이것 봐라. 다리를 꼬니까 아슬아슬하게 바지의 속살이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다리를 올리면 팬티까지 드러날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건 제시카에게 그런 자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슬슬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언니가 기다리실텐데요."

"안 그래도 슬슬 돌아가려고요. 그렇게 제가 여기 있는게 싫으세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정말로 솔직하네요! 그럴 땐 거짓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주셔야죠!"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제시카는 씩씩대며 내게 여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한숨을 내쉬고는 치워뒀던 갑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안 오셔도 됩니다만."

"안 그래도 사흘 후에 있는 토벌에 참여할거라 당분간은 못 오거든요!! 정말이지, 이런 때는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이라도 해주면 덧나나."

제시카의 말 중 '토벌'이라는 단어를 듣고 멈칫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북쪽 숲이요. 근데 저랑 언니만 가는게 아니라 이 영지에 있는 모험가 대부분이 같이 가기로 했어요. 백작가 전속 용병단인 '황혼의 빛'이 직접 던전에 들어가고, 저희는 그 주변을 경계하면서 몬스터들을 처리하기로요. 원래는 좀 더 쉬려고 했는데 모험가 길드에서 집결 명령서가 날아왔거든요. 워낙 보수가 좋기도 했고."

확실히 모험가 길드는 유사시에 모험가들을 모을 권리가 있었다.

물론 거부하는 모험가도 있지만 그런 이들의 경우에는 일정 기간 자격 박탈이나 랭크 하락의 패널티가 주어진다.

실제로 이렇게 집결 명령이 떨어지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말 그대로 영지간의 전쟁이나 몬스터의 대규모 침략이 아닌 이상 모험가들은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받는다.

이번이 특이한 케이스였다.

던전이 생겼다고는 하나 아직 영지에 직접적으로 피해가 온 것도 아니고, 던전을 클리어하러 갔던 모험가 파티 몇 개가 전멸한 것 뿐인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군.'

여차하면 손을 써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정보의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창고에 남아있던 하급 포션과 중급 포션을 각각 세 개씩 건네주었다.

"색이 진한쪽이 효과가 좋은 포션입니다. 필요할 때 사용하세요."

제시카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지난번의 일로 내 성격을 알았는지 토를 달거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포션병을 품에 넣고 돌아가는 제시카의 발걸음은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그 후로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제시카 말고도 내 가게의 단골 모험가들 역시도 이번 집결 요청을 대부분 수락했다.

그렇게 편성된 인원은 총 140여 명.

영지 전속 용병단인 '황혼의 빛'은 용병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포함한 60명을 인선에 참가시켰고, 영지에 머무르던 모험가들 중 일부는 보상을 노리고, 일부는 마지못해, 일부는 경험을 쌓기 위해 토벌에 참가했다.

물론 던전에 진입하는 것은 용병단의 몫이기에 일반 모험가들은 번갈아가며 경계를 서면 될 뿐이었다.

문제는 '북쪽 숲'은 다른 숲들과 달리 위험한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는 것. 고블린은 물론이고 오크와 트롤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숲이었다.

제시카가 떠나고 사흘이 지난 날 새벽, 140명의 용병과 모험가들이 광장으로 모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이린은 자게 두었다.

광장에 도착하자 구석에 서서 모여있는 모험가들을 살펴봤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파티,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구긴 파티, 이번 일로 받을 보수에 대해 이야기 하는 파티 등 최소한 20개가 넘는 파티들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광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휘어잡은 것은 단상 위로 걸어올라가는 한 남자였다. 음성 증폭 마법을 걸었는지 남자의 목소리는 광장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나는 '황혼의 빛' 용병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지크라고 한다. 여기 모인 모험가들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지금부터 던전 '전사들의 궁전'을 클리어하러 가게 된다."

'전사들의 궁전'이라니.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센스가 죽여주는구만.

일정 수준 이상의 던전은 '이름'이 붙게 되는데 예를 들어 제국 7대 미궁들은 '모든 죽은 이들을 위한 안식처'나 '영원한 꿈의 정원'과 같은 이름이 붙어져 있었다.

참고로 앞쪽은 리치가 만든 언데드 던전이고, 뒤쪽은 서큐버스 퀸이 만든 서큐버스 던전이었다.

...아무튼. 던전에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그 던전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래봤자 7대 미궁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제 정찰대의 조사에 의하면 동굴 최심부에는 오우거 8마리와 그들의 보스로 추정되는 존재가 하나 있다고 한다. 정찰대장의 말에 의하면 강력한 사기가 느껴지는 걸로 봐서 다크나이트나 리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하더군."

설마하니 거기까지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갔을리는 없을테고, 아마 도적 계열의 모험가가 은신 기술을 이용해 확인만 하고 온 것 같았다.

"때문에 우리 황혼의 빛 용병단은 원래의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우리 용병단을 제외한 80여 명의 모험가들 중 우리 용병단과 함께 던전을 클리어할 사람은 손을 들어라!! 던전 내의 부산물들은 모두 평등 분배할 것을 황혼의 빛 용병단 단장으로서 맹세한다!"

그 말이 끝나자 모험가들 중 몇몇 파티는 서로 상의를 하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기 시작했다.

난이도가 높은 던전일수록 얻을 수 있는 보상도 많다.

희귀한 마법서가 들어있을 수도 있고, 전설급의 명검이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보물 상자를 찾을지도 모르지.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모험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 중 하나였다.

'설마 내가 죽겠어.'

던전에 들어간 모험가들의 생환율이 20%에 채 되지 않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위험한 던전의 막대한 보상에 대한 기대만을 부풀린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는다.

나는 그것을 '무식'이라고 부른다.

아는게 없기에 두려워 하는 것도 없다.

그런 이들의 최후는 대개 하나로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파티가 손을 들고 있었다. 모두 합쳐 스무 명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손을 든 이들 중에는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은 없었다.

단골을 잃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물론 용병단과 함께 던전 클리어에 성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하지만 그 뿐이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했을 뿐, 토벌에 참가한 것에 대한 보수와 '목숨'이 남는다. 실패 했을 때, 목숨을 비롯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패널티에 비해 무척 자비로운 셈이다.

"지금 손을 든 모험가들은 우리 용병단과 행동을 함께한다. 나머지 모험가들은 던전 주변에 각기 진형을 짜서 던전의 입구를 지킬 수 있도록. 그럼, 잘 부탁한다."

단상에서 내려오는 지크의 뒤를 용병단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따라 걷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여 있던 모험가들은 저마다 다른 태도를 보이면서도 얌전히 지크의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던전 공략의 시작이었다.

이곳에 와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황혼의 빛' 용병단의 단장이 예상보다 강한 인물이라는 것.

소드 마스터는 아니지만 소드 마스터에 상당히 근접한 상태였다. 저 정도라면 오우거와의 일기토에서 승리를 점칠 수 있는 실력이었다.

두 번째는 던전 공략의 실패 확률이 내 예상보다 더 높다는 것.

지난번에 브리튼 상단에 갔을 때는 네 마리인 줄 알았던 오우거가 네 마리 더 늘어 있었다.

산의 폭군이라 불리우는 놈이 자그마치 여덟 마리였다.

조금이라도 구멍이 생기는 순간 놈들은 그 허점을 파고들어 살육을 시작하리라.

아마 지크라는 남자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용병단뿐만 아니라 추가로 모험가들을 모집했을 것이다.

용병단의 단원들은 대부분이 C랭크로 보였다.

그중 드물게 B랭크로 보이는 이들이 단원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고, A랭크는 단장인 지크와 그의 옆에 있던 부단장 뿐이었다.

'성공하기를 비는 수 밖에.'

우선은 모험가들이 최대한 죽지 않고 던전을 클리어 하기를 빌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실패한다면... 그 때는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었다.

새벽의 어스름이 걷히고, 용병과 모험가들이 거리를 위풍당당하게 걷자 시민들은 그들에게 응원과 함께 박수를 쳐주었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몬스터 놈들한테 혼쭐을 내주라고!"

모험가들 입장에서는 처음 받아보는 환호였을 것이다.

평소 시민들은 모험가에게 살갑게 군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몇몇 모험가들은 손을 흔들어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사기는 확실히 오른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모험가들이 성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더 이상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잠에서 깬 아이린이 비몽사몽 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열린 방문을 보니 잠에서 깨서 내 방을 찾아왔지만 내가 없어 당황한 것 같았다.

"으응...주인니임...어디 있어요..."

애타게 나를 찾는 모습에 나는 그대로 아이린에게 다가가 끌어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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