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60)

아이린은 내 품에 안기고 나서야 안심했는지 한결 편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사라지신 줄 알고...무서웠어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지쳤는지 그대로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아이린을 침대에 눕힌 다음 가게 탁자 옆의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용병단의 발표에 따르면 던전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때문에 하루 안에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간단한 건조 식량만을 챙겼다.

야영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성공하든 실패하든 오늘 안에 결판이 날 터였다.

모험가와 용병들이 사라진 거리는 무척 한산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도,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불온한 공기가 살갗을 긁었다.

썩 좋지 않은 감각이었다.

모험가로 활동했을 때나 느꼈던 감각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이린과 함께 아침을 먹고 가게를 정리했다.

포션들을 분류별로 진열하고, 어제 숲에 다녀오며 채집한 재료들로 정력제와 미약, 그리고 마나 포션을 만들었다.

아이린은 내가 포션 만드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나중에 포션을 만들어 나를 돕고 싶다는 기특한 말을 했다.

"나중에 조금 더 크면 포션 제작법을 알려주마."

내 말에 아이린은 방긋거리며 내 옆에 달라붙어 만들어놓은 포션병을 정리했다.

점심을 간단하게 스프와 빵으로 때웠다.

빵을 사러갔을 때 크루거는 이번 일에 대해 뭐 아는거 없냐고 물었다.

하나하나 설명하기는 귀찮았기에 적당히 숲에 생긴 던전을 토벌하러 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점심때가 지나도 포션가게를 찾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북쪽 숲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다리가 근질거렸지만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가봤자 이미 늦었을테고, 가서 무력 행사를 했다가는 아이린과의 평온한 일상이 깨지게 된다.

애초에 주변을 경계하는 다른 모험가들이 현역 모험가도 아니고 일개 점주인 내가 던전에 들어가게 두지는 않을것이다.

해질녘이 되자 서서히 저물어가는 해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산책이라도 가겠니?"

내 권유에 아이린은 곧바로 원피스로 옷을 갈아입고 와서는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아이린의 손을 맞잡은 채 거리를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성의 북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달이 슬금슬금 얼굴을 내미는 시간이었다.

때마침 성벽 위에서 망을 보던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열리는 성문의 틈 사이로 만신창이가 된 모험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합쳐서 마흔 명 남짓인 모험가 무리 사이에는 안젤리카와 제시카도 섞여 있었다.

병사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황급히 달려와서는 제일 앞에 있던 모험가에게 말을 걸었다.

"던전. 던전은 어떻게 됐나?"

모험가는 입술을 질끈 씹더니 힘없이 중얼거렸다.

"용병단의 단장은 사망, 부단장은 생사불명입니다. 던전 안에 들어간 용병과 모험가들은 절반이 넘게 죽었습니다."

불과 반나절 전에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걸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던전 밖에서 경비를 하던 도중 굉음과 함께 용병단원들과 오우거 다섯 마리가 뛰쳐나왔습니다. 놈들 중 한 마리는 단장의 머리통을 들고 있더군요."

가장 강력한 전력인 단장이 그렇게 된 순간부터 이미 던전에 들어간 이들의 운명은 정해 졌으리라.

더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야영 준비도, 식량도 넉넉치 않은 숲속에서 도망다니는 이들이 얼마 동안 살아남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140여 명의 대규모 토벌대는 고작해야 40명 남짓으로 줄어 돌아왔다.

그것조차 대부분이 밖에서 경비를 하던 일반 모험가들이었다.

'황혼의 빛' 용병단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단장이 죽고, 부단장은 생사조차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단원들이 사망했다.

참패였다.

나는 전사였다.

누구보다 전쟁의 앞에서 적과 맞서 싸웠으며, 누구보다 많은 적의 수급을 취했다.

어느새 나는 용병들의 정점에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전쟁왕', '용병왕' 등의 이름으로 불렀지만 내가 관심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전투. 더 많은 전투.

서로의 강함을 확인할 수 있는 전투에 심취했다. 보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의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나에 맞선 용병들과 병사들의 시체가 산을 쌓았고, 어느새 나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쟁에 미친 원귀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말대로 나는 늘 전투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먹을 때도, 잘 때도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다른 전사와의 전투를 하는 순간만 스스로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전쟁에 참여해왔을까.

그 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제국과 공국의 전쟁이었다. 나는 열세인 공국의 의뢰를 받아들여 공국의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내 주변으로는 그 누구도 다가오질 않았고, 나도 그들이 나를 멀리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됐다.

지독한 비를 뚫고 돌격하는 기마병들이 맞부딪쳤다. 누군가는 낙마해 목이 부러지고, 누군가는 창에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짙은 피냄새와 쏟아지는 비가 감각을 고양시켰다.

나도 모르게 검을 빼어들었다. 기마병의 뒤를 이어 곧바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제국의 용병들 역시도 나를 막기 위해 뛰쳐나왔다. 여러 명이 나를 포위하며 합격진을 구사했지만 그런 짓은 의미가 없었다.

내 검이 번쩍이며 붉은 빛을 흘렸다. 마검 타나토스. 예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얻은 검이었다. 소유자에게 피를 갈구하게 하고, 더 많은 피를 마실수록 더 강해지는 마검이었다.

다음 순간, 그들의 목이 허공에 흩날렸다.

땅바닥에 자빠지는 머리 없는 몸을 지나쳐 적진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허공을 가르며 뛰어든 내게 병사들이 창을 휘둘렀지만 그 날의 나는 절호조였다.

오늘이라면 싸우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이 시대에 나처럼 열광적인 전사가 또 있을까.

약한 자를 핍박하지 않았고, 늘 나보다 강한 자와 맞서 싸웠다.

죽은 뒤에는 발할라에 도착해 전사들의 궁전에서 선대 전사들과 함께 술을 마셔대고, 영원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싸워댔을까. 분명 싸움의 시작은 새벽이었는데, 어느새 하늘에는 별이 떠올라 있었다.

땅에는 용병과 병사들로 뒤섞인 피가 강을 이루고 있었다.

다리가 비틀거렸다. 그제서야 내 등 뒤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국의 병사들이 모두 죽은 것인지, 아니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후퇴한 것인지는 모른다. 지금 주변에 남아있는 것은 적의를 담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제국의 병사들 뿐이었다.

그런 병사들을 보며 나는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크하하하하! 좋구나! 어디 한 번 죽을 때까지 해보자꾸나!"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깊은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동굴에 있었다. 동굴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옥좌에 앉아 있었다.

손을 움직여보니 감각이 무뎠다. 손을 비롯한 온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산 자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차갑고 악한 기운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처음보는 괴물이었다. 산만한 덩치에 초록색 피부를 가진 괴물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땅이 크게 울렸다. 그런 놈들이 모두 여덟이나 있었다.

하지만 괴물은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놈들은 각각 네 마리씩 내 좌우에 정렬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울부짖었다.

"쿠후루! 크락! 쿠아락!"

신기하게도 괴물의 고함을 듣자 그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언어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번역이 되는 기분이었다.

놈들은 나를 '긍지를 가진 전사'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는 '전사들의 왕'이라고 칭송했다.

자신들은 나를 섬기기 위한 존재이며, 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할라로 가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이런 몸으로도 누군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은 만족스러웠다.

내가 늘 쓰던 투구와 갑옷, 그리고 마검 타나토스 역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히려 지금의 육체가 훨씬 나았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았고 상처가 생겨도 피가 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발할라로 가기 전에 주어진 조금의 시간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전사들의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유롭게 옥좌에 앉은 채 곧 찾아올 모험가들을 기다렸다.

죽기 전이나, 죽고 난 지금이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전투를.

좀 더 많은 전투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런 전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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