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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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명의 모험가들 중 용병단은 단 세 명 뿐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겁에 질린 채 자신이 본 것들을 털어놓았다.

"던전 초반부에는 별다른 몬스터도 없었어요. 오크 몇 마리랑 트롤 몇 마리 정도 뿐이었죠. 단장이랑 부단장이 앞장서며 손쉽게 정리하자 분위기도 좋아졌어요. 던전 가장 안쪽의 보스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요."

그렇게 말하고는 침을 삼켰다.

"오우거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옥좌 앞에 앉아 있었어요. 마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산의 폭군이라 불리우는 오우거가 무릎을 꿇고 숭배하는 존재라. 좀처럼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이때까지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해봤을 때 북쪽 숲의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오크, 트롤, 오우거' 세 종류였다.

던전의 단골 몬스터인 미믹이나 레이스 같은 몬스터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전사 계열의 몬스터들. 혹시 그 사실과 방금 전의 말이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제일 먼저 달려든 건 단장님이었어요. 단장님이 오우거에게 달려들자 무릎을 꿇고 있던 오우거들이 일제히 일어나서는 제 몸만한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어요."

오우거라면 나무 하나를 통째로 뽑아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장님은 오우거 두 마리를 상대로 분투하셨고, 저희도 남은 여섯 마리를 상대로 부단장님의 명령 하에 분전했어요. 결국 단장님은 두 마리 중 한마리를 쓰러뜨리셨고, 저희도 피해는 조금 입었지만 어떻게든 오우거를 한 마리 쓰러뜨릴 수 있었어요."

거기까지는 순조로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 정도로 참패를 당했을까.

"던전 보스는 여전히 옥좌에 앉아서 꿈적도 하지 않고 있어서 단장님과 부단장님은 저희 단원 열 명 정도를 이끌고 바로 보스를 토벌하기로 했어요. 던전 보스만 죽인다면 던전은 클리어 되니까요."

이해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이 던전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던전은 여러 갈래의 길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던전의 모든 몬스터를 토벌할 필요 없이, 한쪽 길로 가서 던전 보스를 토벌하면 던전 내의 모든 몬스터는 자연 소멸하게 된다.

남은 오우거 여섯 마리를 모두 상대하며 전력을 깎아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던전 보스를 빠르게 잡겠다는 지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단장님이 검에 마나를 불어넣으면서 던전 보스에게 휘두르는 순간, 단장님의 몸이 쪼개졌어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지크의 몸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단장의 뒤를 이어 곧바로 연계 공격을 하려던 용병단원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단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용병단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부단장이 어떻게든 부대를 추스르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왕에게 달려들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폭주한 오우거들이 용병단을 개미 밟듯이 짓밟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후퇴 명령을 내리던 부단장은 오우거의 눈에 띄어 곤봉을 얻어맞았다. 도망치던 도중 오우거 한 마리를 더 쓰러뜨렸지만 용병단의 피해가 훨씬 막심했다.

모험가들을 합쳐 80명이었던 부대는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 스무 명 남짓이었다.

밖에서 몬스터를 경계하고 있던 모험가들은 갑작스레 던전에서 튀어나온 오우거에 당황하며 공격을 쏟아부었지만 폭주한 오우거들을 자극할 뿐이었다.

오우거들은 산의 폭군이라는 자신의 별명을 과시하듯이 괴성을 지르며 모험가와 용병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았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먼저 도망간 이들은 오우거의 첫 번째 먹잇감이 되었다.

오우거는 등을 보이는 적을 무척 싫어했다. 4미터는 될 법한 육중한 몸으로 숲을 뛰어다니며 도망치는 모험가들을 양 손으로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우거들의 폭주를 피해 도망치다 보니 계속해서 인원은 줄어들었고, 결국 무사히 돌아온 인원은 이것 밖에 되지 않았다.

용병단원의 설명에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설명을 들은 남자는 곧바로 보고를 위해 성 안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고, 돌아온 모험가들은 성벽에 기대며 쓰러졌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직 오우거를 직접 마주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 중 한 명은 한쪽 팔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모험가들이 몸에 상처 한 두 개 씩은 입은 상태였다.

그들은 벽에 기댄 채 시청에서 보급받은 포션을 상처 부위에 부으며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아이린과 같이 가게로 돌아왔다.

아마 백작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면 백작은 수도나 근처의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왕실 기사단이나 다른 용병단이 영지를 돌아다니며 던전을 조사하면 영지가 소란스러워 질 것은 볼 것도 없었다.

늦어도 내일 밤까지는 일을 끝내야 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영지에 다른 기사단이나 용병단이 들어와서 던전을 들쑤시고 다닐테니 말이다.

"돌아가자. 아이린."

"...네. 주인님."

작게 대답하는 아이린의 시선은 완전히 지쳐 쓰러진 모험가들의 시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가게로 돌아와서 빵과 트롤 고기로 저녁을 차렸지만 아이린은 방금 전에 본 모험가들의 처참한 모습 때문인지 좀처럼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어느새 깊은 밤이 되고 아이린이 방에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나는 창고로 들어가 조금 먼지가 쌓인 검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법과 달리 검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먼지가 쌓인 검을 깨끗이 닦고 칼집에 넣어 허리춤에 찼다.

평소에 입던 재킷을 벗고 검은 로브를 꺼냈다.

로브의 모자를 깊숙히 뒤집어 쓰고 가게를 조용히 나가려는데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떻게 알았는지 방에서 나온 아이린이 로브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 울먹였다.

"주인님. 가시는거에요?"

"...그래."

"안 가시면 안 돼요?"

눈물을 글썽거리는 아이린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 왔지만 나는 아이린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여 주며 속삭였다.

"우리가 앞으로도 이 곳에서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는 가야한단다."

왕실 기사단이나 A랭크 용병단쯤되면 수준 높은 마법사도 여럿 있을텐데 그런 이들이 아이린의 정체를 파악했다간 험한 꼴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말에 아이린은 여전히 슬퍼 보였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주인님."

"약속하마. 대신 너도 기다리지 말고 푹 자두거라. 아침쯤에는 반드시 돌아와 있을테니."

아이린을 한 번 꼭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린은 그제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아이린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문득 서랍에 넣어둔 물건이 떠올랐다.

서랍 안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 품 안에 집어넣고는 가게를 나섰다.

밤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지금쯤 영지에 참패 소식이 모두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텅 빈 거리를 질주하며 굳어있던 몸의 감각을 풀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북쪽 숲에 위치한 던전 '전사들의 궁전'이었다.

아무도 없는 밤의 거리와는 반대로, 성벽 위에는 평소보다 많은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쓴 나는 성벽 앞에서 잠시 멈춘 다음 마법을 영창했다.

"비열한 뱀은 당신의 눈을 사로 잡으니, 다른 그 무엇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전에 아이린의 목걸이에 부여한 것과 같은 마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식을 방해하는 마법. 다만 이번에는 적용대상이 물건이 아닌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가볍게 성벽을 발로 딛으며 뛰어올랐다.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이 소리를 듣고 살짝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성 밖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착지하고는 북쪽 숲을 향해 달렸다.

황야에 있는 몬스터는 물론 숲 속에 있는 몬스터들도 나를 감지해내지 못했다. 숲을 서성거리는 오크와 트롤이 간간히 보였다. 하지만 덩치가 큰 오우거는 암만 둘러봐도 보이질 않았다.

'던전 안으로 돌아갔나?'

던전의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의 5m에 달하는 높이의 거대한 동굴이었으니 말이다. 하기야 저만한 높이가 아니면 오우거들이 오갈 수도 없을 것이다.

던전 입구로 향할수록 짙은 피냄새가 풍겼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인간의 팔이나 다리를 보니 도망치다 오우거에게 잡혀 산 채로 뜯어먹힌 것 같았다.

그렇게 피냄새를 따라 던전의 입구에 도착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입구 바로 앞의 나무를 보고 흠칫했다.

나무의 정중앙에는 지크의 목이 걸려 있었다.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제서야 예전 현역으로 활동할 때의 감각이 살아났다.

그래. 몬스터들은 원래 이런 놈이었지. 한동안 마을 안에서 평화롭게 생활하다보니 잊고 있었다.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몇 마리 안 되는 오크와 트롤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오늘 용병단이 길을 틀 때 대부분의 몬스터를 사냥했는지 남은 몬스터는 얼마 되지 않았다.

"크라락! 쿠룹!'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크의 목을 베고는 허물어지는 몸뚱이를 걷어차 곧바로 뒤에서 달려오는 놈에게 부딪치게 했다. 뒤에 있던 놈은 주춤거리며 동족의 시체를 받았고, 나는 그대로 시체의 심장 부분에 검을 겹쳐 찔러넣었다.

그렇게 오크 두 마리를 처치한 다음에는 일사천리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사방에서 일제히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베어넘겼다.

검으로 몬스터 한 마리를 베어넘길 때마다 예전의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살을 베는 그 특유의 감촉.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짜릿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불과 3분도 되지않아 몬스터들이 모두 정리됐다. 하지만 이 정도는 고작해야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진짜배기는 이 안쪽에 있을 오우거와 던전 보스였다.

던전 깊은 곳으로 갈수록 느껴지는 사기는 분명 범상치 않았다. 지크가 어째서 오우거보다도 이쪽을 우선시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놈은 전력을 소모한 용병단 따위로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A랭크 용병인 지크가 일검(一劍)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상대는 검의 극의에 다른 자. 소드마스터나 그에 준하는 존재일게 분명했다.

모험가들에게 검사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사기에 섞인 투기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오직 싸움에 미친 전사들만이 저런 투기를 내뿜었다.

던전 가장 깊숙히까지 들어가자 '놈'이 보였다. 검은 투구에 검은 갑주를 걸친 채 옥좌에 앉아있는 오만방자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오우거 다섯 마리가 그를 호위하듯이 서 있었다.

"""""크후르! 크룹! 쿠락!""""""

나를 위협하듯이 소리를 지르던 놈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양 손으로 통째로 뽑아낸 나무를 빙빙 휘두르며 나를 도발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저렇게 싸움이 하고 싶다면야 들어줘야지.

다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이야.

손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내 뒤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한 개, 두 개가 아닌 수십 개가 넘는 마법진이었다. 은빛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은화살들이 그대로 오우거에게 빗발쳤다.

놈은 황급히 나무를 휘둘러 은화살을 쳐내려 했지만 그것도 한 번 뿐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법진의 화살들은 오우거의 온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일전에 오우거의 가죽에는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맞는 말이다.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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