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오우거가 육중한 덩치를 무너뜨렸다. 온 몸이 은화살로 꼬챙이가 된 오우거의 모습은 무척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옥좌에 앉아있던 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더불어, 놈의 입에서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오, 그대는 어딘가 조금 달라 보이는구나. 오늘 찾아왔던 다른 녀석은 고작해야 저런 놈 둘을 상대로 한참을 분투하다 간신히 이겼건만."
다른 녀석이란 건 아마도 지크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대라면 여(余)의 여흥에 좀 더 어울려 줄 수 있겠구나."
그렇게 말한 놈은 옥좌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세계는 내가 아는 곳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야. 저런 기예는 오늘 처음 보는군."
아무래도 그는 마법에 대한 상식이 전무한 세계에서 온 것 같았다.
"물론, 그래봤자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만 말이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감각에 곧바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 순간 내가 있던 자리에 검이 흘러가는 궤적이 그려지며 허공을 갈라냈다.
"역시, 전사는 전사를 알아보는 법이지. 그대는 여(余)와 겨룰 자격이 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반적인 데스나이트와 달리 자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럼 싸움 전에 통성명이나 하지. 내 이름은 루디다. 그쪽은?"
내 말에 그는 손으로 투구의 턱 부분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서 어차피 아무런 감각도 없을텐데 저렇게 생각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우스웠다.
"확실히. 전사간의 전투에는 서로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겠지. 나의 이름은 재키다."
"좋아. 재키. 그럼 시작해볼까."
평소에 늘 하던 존대는 집어치웠다. 어차피 전사가 전사에게 차릴 예의는 필승의 자세로 전투에 임한다는 것 뿐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튕기며 두 개의 마법진을 불러냈다. 하나는 초록색, 하나는 푸른색을 띠는 마법진이었다.
초록색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식물의 덩쿨들이 재키를 묶기 위해 솟구치자 재키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휘둘러 식물들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리고 재키가 검을 휘두르고 다시 자세를 잡는 순간, 푸른 마법진에서 쏟아진 얼음 송곳들이 쇄도했다.
틀림없이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재키는 몸을 흘려 얼음 송곳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곡예와도 가까운 몸놀림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할 정도였다.
재키의 발을 확실히 묶고 마법을 사용하는게 아닌 이상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메테오나 인페르노 같은 마법은 사용할 수도 없고.'
던전 안에서 그런 마법을 사용했다가는 나까지 잔해에 깔려 죽어버릴 것이었다.
결국 남은 답은 근접전 뿐이었다. 검에 신성 마법을 부여한 뒤, 재키에게 달르들었다. 물론 순수한 근접전은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과 함께 마법을 발동시켜 재키가 반격을 생각할 수 없도록 몰아붙였다. 틈을 노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마법을 난사하며 재키를 몰아붙이자 놈은 크게 웃어제끼면서 내 검과 마법을 자연스럽게 흘려냈다.
"크하하! 역시, 그대는 최고의 전사다. 어중간한 애송이들보다 훨씬 낫군!"
계속 공격을 흘려내면서도 웃어대는 대범한 모습에 욱한 나는 놈의 허리춤에 검을 휘두르며 신성 마법을 발동시켰다.
새하얀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신성 망치가 검을 피하던 재키의 등을 노려 후려쳤다.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망치에 얻어맞은 재키는 그대로 동굴 구석까지 튕겨 날아갔다. 일단은 언데드인만큼 어느 정도 타격이 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재키는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키고는 더욱 크게 웃어댔다.
실성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웃어제끼던 재키는 갑자기 검을 땅바닥에 꽂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 전사의 신 이크룸의 아들이 힘을 바라노니 이 곳에 강림하소서!"
주문을 모두 외우기 전에 어떻게든 숨통을 끊기 위해 마법을 발동시켰지만 한 발 늦게 발동된 마법은 갑작스레 재키의 몸을 휘감은 검은 빛무리에 의해 막혔다.
적어도 마법은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마나의 기운이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저건 아마 재키가 있던 원래 세계의 주술인 것 같았다.
"크흐흐. 이걸 사용하는게 얼마만이던가. 정말 좋구나!"
검은 빛무리를 휘감은 재키의 몸은 방금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대는 검은 물론이요, 기예 또한 극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발할라로 가는 나의 마지막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으니!"
땅바닥에 꽂았던 검을 뽑아든 재키가 나를 향해 겨누었다.
"나 또한 전력으로 갈테니 그대 역시도 전력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언데드가 발할라에 갈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왜 내가 마지막 상대라고 확신하는거냐?"
마치 자신이 나에게 질 것을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늘 나보다 강한 자와 싸워왔다. 상대의 강함을 파악하는 것쯤이야 손쉽지. 그대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다만 그대의 강함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것일 뿐."
그 정도까지 알아차렸나. 일부러 규모가 큰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동굴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골동품점에서 마나의 흔적을 찾아 물건을 구매한 것처럼, 갑작스레 던전이 사라진다면 이상하게 여긴 조사단이 올 것이고 그 조사단이 내 마법 사용의 흔적이라도 찾는다면 일이 골치 아파지게 된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얌전히 목을 내주지 그래."
"그럴 수야 없지. 발할라로 가기 전에 여(余)의 마지막을 기념할 전투가 아닌가! 최대한 오랫동안 즐기고 싶구나."
"빌어먹을. 언데드 주제에 왜 그리 발할라를 좋아하는거냐."
재키는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연신 발할라를 연호하며 검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은 꼭 기사가 되겠다고 말하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어쩌면 그는 아무런 생각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강자와 검을 맞대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어째서 이런 언데드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딱히 인간에게 악의를 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전투에 대한 광적이고도 순수한 열망. 그것이 재키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재키에 대한 적의감이 줄어들었다.
나 역시도 순수하게 그와 겨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한동안 휘두르지 않은 검과 마법을 원없이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혹시나 싶어 재키에게 직접 물어봤다.
"방금 전에 네가 말했던 오늘 온 애송이 말인데, 그 놈 머리를 나무에 걸어놓은 건 네가 한 짓이냐?"
"아니. 그럴리가. 아마 이 초록색 괴물 놈들 중 하나가 멋대로 했겠지. 난 이놈들에게 명령을 내린 적도, 이 동굴 밖으로 나간 적 없다. 이 놈들이 멋대로 날 지키겠다고 하는 것일 뿐."
"그러냐. 그럼 됐어."
이걸로 재키에 대한 적의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투쟁심 뿐.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내게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말이다."
재키가 검을 뽑아 다시금 나를 겨누자 나 역시도 검을 재키를 향해 겨누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대치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재키였다.
붉은 빛으로 번쩍이는 검은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예기를 풍겨대고 있었다. 맞받아치면 그대로 검이 부러진다는 판단과 함께 곧바로 뒤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내가 있던 자리에 착지한 재키는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도약해왔다. 내 목을 노리고 쇄도하는 재키의 검을 멈춘 것은 새하얀 마법진이었다.
검은 사기를 거리낌없이 풍겨대던 재키였기에 신성 마법은 그에게 상극이라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빛으로 만들어진 마법의 방패가 재키의 검을 막아냈다.
갑작스레 생겨난 방패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감각에 재키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재키는 크게 웃으며 검을 더욱 강하게 방패에 밀어붙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방패에 균열이 생기며 천천히 갈라지자 나는 곧바로 다음 마법을 영창했다.
"영혼을 구속하는 강철의 사슬이여!"
은빛의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강철 사슬들이 재키를 향해 날아갔다.
엄청난 기세로 솟구치는 사슬들은 그대로 재키를 짓뭉개 버릴 것 같았지만, 재키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고 검을 휘둘러 사슬들을 쳐냈다.
유연하게 몸을 비틀며 등 뒤를 노리는 사슬을 피하고, 앞으로 오는 사슬의 연결고리를 잘라내버렸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사슬들은 마나의 공급이 끊어지자 그대로 사라졌다.
내가 아니라 다른 마법사가 재키를 상대했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마법 방패를 사용해도 무식하게 힘으로 뚫어내고, 마법 공격은 모두 피해버린다.
대체 저런 녀석을 어떻게 잡으란 말인가.
사슬을 모두 무효화시킨 재키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발을 굴렀다.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땅이 울렸다.
신화 속 헤라클레스가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재키의 검이 내 목을 베려는 것을 부드럽게 흘리며 재키의 배를 걷어찼다.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반응조차 못했을테지만, 아슬아슬하게 반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목덜미에 작은 실선이 그어지더니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아슬아슬했다. 재키를 걷어차며 밀어내는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지금쯤 내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겠지.
오랜만에 격렬히 움직였기 때문일까, 어깨가 욱씬거려왔다. 팔은 이미 몇 번이나 재키의 검을 받아내느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숨은 더욱 거칠어지고, 시야가 흔들렸다. 잠깐 거리가 벌어졌을 때, 옷소매로 땀을 닦으며 간신히 숨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메테오나 블리자드를 사용해서 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힘이 풀려 후들거리는 팔로 다시 검을 들었다. 이제 와서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검을 막고, 검을 내질렀다.
재키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손 마디가 얼얼하게 아파오고, 압도적인 사기가 감각을 자극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살면서 이 정도로 처절하게 검을 맞대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몸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검을 놓는 순간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검을 쥐고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재키와 대등하게 검을 겨룰 수 있었다.
내가 지쳐가는 것과 동시에 재키의 몸도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기'를 몸에 받은 언데드 몬스터들의 흔한 최후였다.
압도적인 힘을 품지만, 그 대가로 본래라면 사라지지 않는 언데드로서의 영혼을 불태운다. 재키는 지금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내가 이길 수 있겠지. 마법으로 재키의 발을 묶으면서, 적당히 도망만 다녀도 사실상 내가 승리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럴리가 있겠냐고!"
모험가로 활동할 때, 그 누구도 내 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S랭크 모험가가 될 수 있었고, 그 어떤 마탑도 나를 무시할 수 없는 마법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 본성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억눌려 있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