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대고 있던 검을 그대로 튕겨내고는 재키의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그대로 재키의 가슴을 관통시켰지만 내가 하나 간과한 점이 있었다면 녀석은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가슴에 검을 찔리고도 태연하게 서 있던 재키는 내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던 내 얼굴이 구겨지며 그대로 땅바닥을 굴러댔다.
뭐 저리 튼튼한거냐. 슬슬 쓰러져 줄 때도 됐을텐데.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가슴에 꽂힌 내 검을 바닥에 적당히 던진 재키가 주먹을 쥐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 뒤로는 난투였다. 내가 재키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재키는 내 다리에 로우킥을 먹였다. 그 다음에는 재키와 내 주먹이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후려쳤다.
광대뼈가 완전히 나갔는지 뺨이 얼얼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얻어맞고도 즐거워하는 재키를 보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남의 가슴에 칼을 박아놓고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렇게 말하며 또 다시 서로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이번에는 꽤나 진심을 담아서 주먹을 휘둘렀더니 재키는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나도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 재키의 옆에 드러누웠다.
"내가 이긴거다. 이 빌어먹을 언데드 놈아."
내 말에 재키가 킬킬 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다가 마지막에 한 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해 하지마라. 애송아."
말을 할 때마다 입 안이 쑤셔 치유 마법으로 입 안을 지혈했다. 내 옆에 누워 있는 재키의 몸이 반쯤 투명해진 것을 보면 완전한 소멸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넌 왜 그렇게 발할라에 집착하는거냐? 솔직히 너도 발할라가 정말로 있을거라 생각하는 건 아닐거 아냐."
"있을거라 생각하는게 아니다. 있을거라 믿는거다."
"무슨 차이가 있는데?"
"사후의 세계에 그런 곳이 없다면, 스스로가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니까. 자신보다 강한 전사를 찾고, 전투를 하고, 그렇게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발할라조차 없다면 그런 내 삶을 어디에서 증명할 수 있겠나."
그렇게 말하는 재키는 어딘가 개운한 목소리였다.
"이런 말 다른 사람한테 해본 적 있냐?"
"그럴리가. 그대가 처음이다. 덧붙이자면 내 얼굴을 후려친 것도 그대가 처음이다. 영광으로 알아도 좋다."
"반반한 여자한테 들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전투광인 남자놈한테 들으니 썩 좋지는 않군."
무슨 귀족 청년이 시녀에게 뺨을 맞고 '날 때린건 네가 처음이야!'하는 것도 아니고, 시꺼먼 남자 둘이서 내 얼굴을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품에 넣어뒀던 펜던트를 던져주었다. 은은한 빛을 내뿜던 성물은 재키의 몸에 닿자 더욱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정말로 발할라 같은 곳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몸으로는 발할라에 갈 수도 없겠지. 얌전히 성불해라."
재키는 신기하다는 듯이 펜던트를 쳐다보다가 그 빛이 자신을 정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에 가볍게 쥐었다.
"확실히, 몸이 가볍고 따뜻해지는 기분이 드는군. 고맙다."
재키가 몸에 두르고 있던 검은 투구와 갑주는 어느새 순백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재키가 몸에 두르고 있던 탁한 사기 역시 완전히 소멸되었다.
재키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라. 썩을 놈아. 다시는 보지 말자고."
"잘 있어라. 패배자. 나중에 발할라에 다시 오면 그때 또 겨루자꾸나."
글쎄, 내가 진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는 이미 재키의 몸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끝까지 재수 없는 놈이었다. 재키가 사라지며 내 뒤에 남아있던 오우거들도 사라졌다.
바닥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지켜보다가 몸에 힘이 좀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성물인 펜던트와 재키의 검을 발견했다.
성물을 다시 품 안에 넣고, 재키의 검을 한 손으로 들고 살폈다.
아마도 이게 던전의 클리어 보상이겠지. 성물의 영향을 받았을 때, 재키의 갑주와 투구는 새하얗게 변했지만 이 검만큼은 여전히 새카만 빛을 띠고 있었다.
검의 성분 역시도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오늘 내가 들고온 검이 명검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오리하르콘과 미스릴을 조금씩 섞어 만든 검이었는데, 그런 검의 이가 다 빠질 정도로 합을 나누었음에도 이쪽은 멀쩡했다.
다만 검에서 느껴지는 탁한 사기는 마검에 가까운 것 같았다. 재수 없는 놈답게 쓰는 검도 재수가 없었다.
"어휴...죽겠다."
온 몸이 만신창이였다.
팔은 오랜만에 사용한 근육이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입 안의 상처 역시도 대충 지혈을 해놨을 뿐 다친 것은 그대로였다.
물론 이런 몸이라고 해서 이대로 가게에 돌아가 발 뻗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사라질 던전이지만 이곳에서 내가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면 큰일이었다.
나는 환각 마법과 위장 마법을 함께 사용해서 내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흔적을 하나 하나 지우다보니 서서히 던전이 붕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던전의 보스가 사망하고 몇 시간이 지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게 된다.
얼추 마법의 흔적을 모두 지우자 나는 여유롭게 동굴을 빠져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달리, 동굴에서 나오는 나를 막는 몬스터는 아무도 없었다.
동굴에서 빠져나오자 어느새 새벽녘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굉음과 함꼐 동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완전히 던전 브레이크가 끝나자 본래 던전이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슬 돌아갈까."
어쩌면 아이린은 아직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몰랐다.
나는 한 손에 재키가 쓰던 마검을 손에 쥔 채 북쪽 숲을 빠져나왔다.
던전이 사라진 여파인지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몬스터들은 비교적 온순해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인간을 발견하는 순간 달려들었을 오크와 트롤들도 나를 보고는 슬금슬금 피해다녔다.
아마 내 손에 쥐어진 재키의 마검과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여파 때문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넝마가 된 로브를 걸친 채 숲에서 빠져나오며 다시 마법을 발동시켰다.
"비열한 뱀은 당신의 눈을 사로 잡으니, 다른 그 무엇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황야를 넘어 성벽을 딛고 올라오니 병사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방금 전 굉음의 정체는 뭐냐!"
"아직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던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아까 숲 속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 모양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경비대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성벽 위에서 북쪽 숲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안심해도 돼요. 다 끝났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영지 안으로 들어오자 적막하고도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방금 전 죽어라 싸워대며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이 천천히 식기 시작했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새벽의 틈새로 떠오르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가게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린이었다.
그렇게 자두라고 말을 했는데.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졸은 것 같다.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품 안에 넣어뒀던 성물을 꺼내 서랍에 넣어 두었다.
아이린을 품에 안은 채 아이린의 방 침대에 눕혀주자 그제서야 살짝 깼는지, 아이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으응...가지 마세요오..."
그렇게 잠꼬대를 하는 아이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한 번 쓰다듬어준 나는 아이린의 옆에 누웠다.
아이린이 혼자 누워 있을 때는 무척 커 보였는데, 내가 그 옆에 누우니 살짝 비좁았다.
나른한 몸이 푹신한 침대에 눕자 수마가 몰려왔다. 지독한 피냄새가 밴 로브도, 목덜미와 입에 난 상처도, 허리춤에 찬 재키의 검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아이린의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다.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쪽은 내 잠버릇 쪽이었다.
가끔씩 창관에 갈 때 같이 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자곤 했는데, 아이린의 침대에서 깜박 잠들었다가 그 때의 잠버릇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아응...주인님..."
아이린의 야릇한 목소리에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천천히 돌아오는 정신과 함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이린의 새하얀 목덜미였다. 나는 아이린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아이린은 간지러운지 묘하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입고 있던 셔츠의 한쪽 어깨가 흘러내려 반쯤 가슴이 노출된 상태였다.
도대체 자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리고 나는 이런 어린애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냐.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아이린과 거리를 벌렸다. 비로소 해방된 아이린은 옷무새를 다듬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꼭 섹스를 한 다음날의 아르웬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부끄러워 하는 아이린의 색기 어린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나는 스스로의 뺨을 후려쳤다.
고작해야 열세살인 어린애한테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어제 재키에게 얻어맞은 뺨이 욱씬거렸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이 모자랄텐데 좀 더 자도 된다."
"아뇨...잠은 이제 안 오니까 괜찮아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진정이 됐는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이린과 함께 방을 나왔다. 욕실로 가서 세안을 하고, 평소처럼 아침을 차려 먹었다.
가게를 열었지만 좀처럼 손님이 오지 않아 아이린에게 가볍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머리가 영특한 아이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금세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산수 역시도 무척 뛰어나 나중에는 장부를 맡겨도 될 것 같았다.
머리가 좋아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고 칭찬해주니 아이린은 무척 기뻐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던 도중, 아르웬이 가게를 찾아왔다.
"루디 씨! 들으셨어요? 던전이 사라졌...... 어라?"
허겁지겁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아르웬은 내 무릎 위에 앉은 채 산수를 배우고 있는 아이린을 보고 말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