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혹시 그 아이가 지난번에 말해주셨던 친척의 아이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르웬은 아이린이 조금 신경쓰인 듯 했지만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북쪽 숲에 있던 던전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전보가 들어왔어요. 기사단장님이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던전이 있던 곳에 가 봤지만 텅 빈 공터만이 남아있었다고 하셨어요."
그야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서 모두 무너져 소멸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 일이로군요. 던전의 보스를 잡기 전까지는 던전은 유지된다고 들었는데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지금 시청이랑 모험가 길드에서는 난리도 아니에요."
아르웬은 진절머리를 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일단 기사단장님이 기사단과 병사들을 이끌고 숲 속에 살아있는 모험가와 용병들을 구조하러 다니고 계세요. 아직까지 찾아낸 생존자는 없지만요."
"구조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야 할 텐데요."
실제로 나는 모험가와 용병들이 최대한 많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내 소중한 고객이니 말이다.
물론 오늘 새벽에 던전을 찾아갈 때 널부러진 시체들로 봤을 때 남아있는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였지만 말이다.
"맞다. 루디 씨, 여기 시청에서 드리는 포션 값도 들고왔어요. 여기 금화 일곱 닢. 맞죠?"
"조금 더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만."
"아뇨. 자그마치 포션 200병인데 그런 거금을 늦게 지급하면 루디 씨가 곤란해지잖아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 뒤로는 모험가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 대화를 조금 나누다가 내 뒤에 가만히 서 잇는 아이린에 대한 대화로 넘어갔다.
"무척 귀여운 아이네요. 저기, 네 이름은 뭐니?"
아르웬이 아이린에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아이린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작게 대답했다.
"아이린...입니다."
"죄송합니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라."
내 사과에 아르웬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두둔해주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시청에 아이린 양의 시민권을 발급받으러 같이 가실래요? 아무래도 시민권은 본인이 있는 편이 좋으니 아이린 양도 데리고요."
"당분간은 모험가나 용병들이 가게를 찾아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러도록 하지요."
그 이후로는 내가 꺼내온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가게의 케이크가 맛있었다. 어느 상단에서는 이번에 어떤 물건을 들여왔다 하더라. 그런 시시콜콜한 잡담들을 나누며 차를 모두 비웠다.
아르웬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아이린과 나는 각각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거리를 걷는 도중에도 아이린은 내 오른손을 잡은 채 걸었다.
아르웬이 옆에 있는만큼 팔불출로 보이지 않도록 손을 놓으려 했지만 아이린의 울먹거리는 표정을 보고는 결국 손을 잡은 채 시청까지 걸었다.
다행히도 아르웬은 이런 모습을 보고 아이린 양은 루디 씨를 무척 잘 따르네요~ 라고 웃어 주었다.
시청에 도착한 뒤에는 지난번에 만났던 아르웬의 상관인 사무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아르웬은 아이린에게 나이와 출신 성분에 대한 간단한 질문을 했고, 아이린은 내가 사전에 말해둔 대로 다른 왕국에서 왔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아이린의 신상 정보를 모두 기록하고 나서는 간단한 주의사항을 들었다.
"우선, 아이린 양에게는 2급 시민권이 발급될 예정이에요. 규정대로라면 3급이겠지만 얼마 전에 루디 씨가 1급 시민으로 승격되셔서 그래요. 아마 루디 씨가 아이린 양의 보호자 역할을 맡는 동안에는 2급 시민으로 유지될 것 같아요."
시민권에도 아이린 양의 보호자에는 루디 씨 이름이 적힐거고요. 그렇게 덧붙인 아르웬은 의자에 앉은 몸을 내게 딱 붙이고 있는 아이린을 보고있었다.
마치 앙칼진 아기 고양이를 보는듯이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는걸보니 아이린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하아. 정말이지, 저도 아이린 같은 귀여운 애를 갖고 싶은데 말이죠. 사무관 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한결같이 시집은 언제 갈 거냐는 소리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르웬은 문득 나와 몸을 섞었던 것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앗. 절대 루디 씨가 책임져 달라거나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니까요! 그, 그때의 일은 분위기를 타서 그런 것도 있고, 물론 루디 씨가 원하신다면 저야 얼마든지..."
말할수록 스스로의 무덤을 판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마지막에는 결국 입을 다문 아르웬이었다.
저게 노처녀의 슬픔이라는 것일까. 사실 아르웬의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스물 셋.
아직 창창한 나이임에도 이 세계에서는 모험가나 기사를 제외한 여자들의 대부분은 성인이 되고 1~2년 만에 신랑감을 찾아 내조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웬은 완전히 혼기를 놓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불과 며칠 전에 아르웬과 몸을 섞은 내가 '좋은 남자 만나실 수 있을겁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니 나는 그저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게 어색하게 이어지던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때마침 들어온 사무관이었다.
"뭐야, 아직도 있었는가? 슬슬 퇴근시간인데."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슬슬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르웬 씨도 안녕히 계세요."
아르웬은 아직도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채 살짝 고개를 숙여 우리를 배웅했다.
시청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시장에서 간식으로 닭꼬치를 두 개 사서 아이린과 나눠 먹었다.
왼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오른손에 닭꼬치를 쥐고는 후후 불어먹는 아이린의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좀 더 시장을 둘러볼까 싶었지만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었기에 군것질은 이 정도만 하기로 했다.
좋은 하루였다.
귀찮은 일은 마무리 지어지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웃고, 맛있는 것을 사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하루였다. 이제 저녁을 먹고 기분 좋게 잠들면 좋은 하루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가게 앞에는 눈에 익은 마차가 있었다. 가게 문 앞에 서 있던 소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에는 집사장을 대신해서 젊은 금발의 남자가 함께 있었다.
바스티안 백작가의 독녀. 눈의 요정 같은 소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지난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앨리스가 의도를 알 수 없는 깊은 미소를 지은 채 내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앨리스 드 바스티안(Alice De Bastian). 제국 2급 기사인 제이크 드 바스티안의 독녀.
어릴 때부터 병을 앓고 있어 외출을 잘 하지 않았고 영주의 저택 안에서만 생활해왔다.
윤기가 흐르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고 한다.
앨리스가 내게 찾아온 이후로 앨리스에 대해 조사하고 간신히 얻어낸 정도는 이 정도였다.
애초에 병 때문에 늘 저택 안에서만 지내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앨리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영주에 대한 정보는 꽤나 있었다.
제국 황실 기사단에 소속된 뛰어난 기사였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형이 급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영지를 물려받게 된 남자. 황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만났던 평민인 연인과 결혼식을 올린다.
제국의 변두리에 위치한 바스티안 가문에게는 이어진 다른 핏줄이 전무했기에 평민과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더라도 반대할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앨리스의 어머니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다고 한다. 외출이 잦은 편도 아니고, 외출할 때도 늘 한 손에 양산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늘 예의와 기품을 지켰다.
귀족가의 안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도와 일하기도 하고, 가끔씩은 다과회를 열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사치나 낭비벽도 전무, 백작과의 금슬 역시도 무척 좋아 언제까지고 행복한 신혼생활이 이어질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갑작스레 깨졌다.
앨리스의 어머니가 앨리스를 임신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앨리스의 어머니는 저택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백작은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의사와 약사들을 불러왔지만 그 누구도 백작의 아내를 치료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는 병약해진 몸으로 앨리스를 낳다가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때문에 앨리스에 대해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다고 한다.
앨리스를 자기 어머니를 잡아먹은 년이라는 멸시의 뜻을 담아 부른 사람도 있었다. 다만 그 말이 백작의 귀에 들어가 그는 다음날에 귀족모욕죄로 참수 당했지만 말이다.
"가게가 비어있길래 오늘은 안 돌아오시는 줄 알았어요."
"잠깐 시청에 볼 일이 있었기에 갔다 왔습니다. 혹시 저한테 용무가 있으셨습니까?"
앨리스의 옆에 붙어 있는 남자는 영지에 반년 동안 머무르면서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앨리스의 옆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 이쪽은 저희 가문 전속 마법사인 고든 씨에요."
앨리스가 고든을 가리키며 소개하자 고든이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미숙하지만 백작가의 전속 마법사직을 맡고 있는 고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묘하게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손을 내미는 고든의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그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시지요. 차를 내 오겠습니다."
나는 무심코 내 등 뒤에 서 있는 아이린을 가렸다. 인식 장애 마법을 걸었다고는 해도 상대가 수준 높은 마법사라면 아이린에게 걸린 마법의 존재를 파악할 수도 있었다.
아이린을 먼저 가게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바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린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방 안으로 달려갔다.
가게의 탁자에 앉은 두 사람의 앞에 방금 막 달인 파리안드 차가 담긴 잔을 올려주었다.
앨리스는 여전히 그녀 특유의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차를 홀짝였다.
"그럼 슬슬 본론에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이야기입니까?"
"네. 그 때는 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기에 물러났지만 오늘 확신을 얻었기에 이렇게 찾아왔어요."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가 손을 들어올리자 옆에 앉아 있던 고든이 품에서 포션병을 꺼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포션병과 똑같은 생긴 포션병은 텅 비어 있었다.
앨리스는 그 포션 병을 고든에게서 받아 들었다.
"루디 씨는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사람의 고유한 마나를 볼 수 있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도 모를거라 생각했던 비밀을 남에게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마법사들이 흔히 말하는 마나 스캔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점짓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앨리스는 다 알고 있다는듯이 나를 압박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