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이건 마법사와는 관계 없는 힘이에요. 제 어머니도 가지고 계셨다고 하는, 이 피를 물려받은 일족의 고유한 능력인 모양이니까요. 마나의 흔적을 찾는게 아니라, 사람의 고유한 마나를 볼 수 있는 거에요."
앨리스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 주어진 고유한 마나를 본다니. 내 표정을 보고 앨리스가 부연 설명을 했다.
"예를 들면 지금 제 옆에 계신 고든 씨에게서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요. 타고난 마나의 양이 많을수록 몸 주변을 휘감는 오라(Aura)같은게 크게 보이는거죠."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도 쉽사리 믿기 힘듭니다만."
"그건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 전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루디 씨는 제가 본 누구보다도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처음 봤을 때는 제 눈과 능력을 의심했을 정도에요."
지난번에 찾아왔던 건 포션병에 부여되어 있는 '치유 마법'의 흔적 때문이었는데 말이죠. 앨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기사단장님을 따라 던전이 있던 자리를 둘러보고 확신했어요. 텅 빈 공터에는 루디 씨의 마나가 잔뜩 남아있었으니까요."
"......"
그럼 앨리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가진 마나의 총량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능력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앨리스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당황해서 돌아갔지만, 오늘 확신을 얻었다는게 던전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흔적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는 뜻이었군.
"참고로 방금 전에 방에 들어간 소녀가 마족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요. 흐릿하게나마 날개가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아이린의 정체마저 들킨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지만, 제 마나는 어떻게 보입니까?"
"칠흑빛을 띠는 검은 마나가 루디 씨 뿐만 아니라 주변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어요. 고든 씨와 제 아버지의 오라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양이에요."
"...후우. 더 이상 변명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우선 루디 씨의 진짜 정체와 실력이 궁금해요."
앨리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나에 대해 물어왔다. 물론 정보를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 줄 생각은 없다.
"우선, 지금부터 듣는 이야기는 당연히 비밀을 유지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앨리스와 고든을 번갈아보자 앨리스가 안심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스티안 가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요. 고든 씨도 저희 가문 사람이나 다름 없으니 걱정 말고 말씀하세요."
"우선 제가 마법을 배운 곳은 흑색 마탑입니다. 그곳에서 마법을 배우다가 뛰쳐나와 모험가로 활동하며 실력을 키웠죠."
내 말에 앨리스와 고든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흑색 마탑?""
적색 마탑은 화염 마법을 탐구하는 마법사들이, 청색 마탑은 얼음 마법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이 모여서 배우는 곳이었고, 가장 많은 마법사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원소 마법중 가장 단순하고 위력이 좋은게 그 두 속성이었으니 말이다.
두 마탑 말고도 여러 마탑이 존재하지만 가장 독특한 마탑 두 개가 바로 흑색 마탑이었다.
정체도 알 수 없고, 어떤 마법을 연구하는지조차 비밀에 둘러쌓인 마탑이 바로 흑색 마탑이었다. 고든은 흑색 마탑에 대해 들은게 조금 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흑마법이나 사령술을 배운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럴리가요. 정말로 그랬다면 제국이 인정한 마탑으로 존재할 수 조차 없었을 겁니다. 뭐, 마탑이라고 해 봤자 저랑 스승님을 포함해 두 명 밖에 없었지만요."
아직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빌어먹을 할망구. 아직도 살아있으려나. 아니, 분명히 살아있겠지.
그녀가 죽는다는 것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 스승님이 제 몸은 마법을 쓰기 위해 태어난 몸이라며 끌고가서는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삼 년 동안 마탑 안에서 죽어라 마법만 배우고 나니 5클래스를 마스터 했더군요."
""5클래스라니...""
4클래스만 해도 어지간한 백작이나 후작가의 전속 마법사나 A랭크 용병단의 전력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마법을 수십년 동안 배우고도 4클래스를 달성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고작해야 삼 년 만에 5클래스를 마스터한 것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긴 했다.
참고로 스승님은 그걸 '자신의 완벽한 지도'와 '내 타고난 신체' 덕분이라고 일축했다.
"삼 년이 지나자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몰래 도망쳐 나왔습니다. 모험가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으며 마법 실력을 늘렸습니다. 대략 십 년 정도 모험가로 활동하다보니 자연스레 실력도 늘었고요."
"그래서, 지금 루디 씨의 마법 수준은 어느 정도인건가요?"
앨리스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고든은 우울한 표정을 지은 채 계속해서 '삼 년 만에 5클래스 마스터...'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8클래스 마스터입니다. 아쉽게도 이 이상의 경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더군요."
""......""
내 말에 두 사람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싸늘해진 분위기에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고든이었다.
"8, 8클래스라면 마법의 끝을 본게 아닙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8클래스가 끝은 아닙니다. 그저 인간이 만든 마법의 한계가 8클래스일 뿐이죠. 용족이 만든 마법에는 9클래스나 10클래스도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예순이 넘으신 저희 마탑의 탑주님이 7클래스 초입인데..."
"그게 정상입니다. 제가 좀 특이한 경우고요."
결국 정신줄을 놔버린 고든은 입을 벌린 채 반쯤 해탈했다.
그런 고든과 달리 앨리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혹시 루디 씨. 폴리모프한 용같은 건 아니시죠?"
"그러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입니다. 칼에 베이면 피를 흘리고, 아파하는 평범한 인간이요."
"인간이라고 하기엔 좀처럼 믿기 힘드니까 그렇죠. 고작해야 서른에 8클래스 마스터라니."
정확히 말하자면 8클래스를 마스터한 것은 스물 여섯 때지만 굳이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8클래스 마스터라면 이런 막대한 마나의 양도 이해가 가지만..."
"마나의 양과 마법 실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요."
"B랭크 용병단과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박살낸 던전을 단신으로 없애놓고도 그런 말을 하시네요."
나를 바라보는 앨리스의 시선에서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과거에 저런 시선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아왔기 때문이다.
나를 이용하고, 제어하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루디 씨."
"싫습니다."
말을 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하자 앨리스는 처음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
"제가 살면서 앨리스 양 같은 사람들을 한 두 명 만나본 줄 아십니까?"
압도적인 힘을 가지면 사람들은 그 힘을 동경하게 된다. 거기서 나아가 힘 가진 사람을 이용하려 하고, 이용할 수 없으면 빌붙으려 한다.
그게 대부분의 인간들의 특징이었다. 조금 더 힘 있는 자들은 나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 넣고 꼭두각시처럼 부리기를 원하기도 했다.
내가 앨리스에게 내 힘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은 그녀가 이미 내가 가진 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잖은 호의나 앨리스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었다.
그걸 착각하면 곤란했다.
"부탁이에요. 하다못해 이야기라도 들어주세요."
"경청하겠습니다."
대답하며 나는 품에서 꺼낸 연초를 입에 물었다. 손을 튕기자 연초에 불이 붙으며 탁한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족 영애 앞에서 더 없이 무례한 짓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체를 들키기 전이라면 모를까, 들킨 후에도 그녀에게 예의를 갖출 생각은 없었다. 특히 어떻게든 나를 자신의 파벌에 끌어들여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지금 내 행동이 암묵적인 축객령이라는 것을 앨리스는 알아들었을 터인데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다만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처음인지 조금 분노한 모습이 겉으로 드러났다.
굳은 입꼬리, 나를 노려보는 시선, 그래봤자 아이린보다 너덧 살 많은 소녀일 뿐이다. 수많은 용병과 모험가들의 살의 어린 시선도 여유롭게 받아냈던 내게 저 정도는 애교였다.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의 재가 바닥에 떨어지려할 때 즈음, 앨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루디 씨와의 결혼, 하다못해 약혼을 원해요."
상상했던 것과 다른 방향의 요구가 튀어나오자 나도 모르게 사레가 들렸다.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 한 것을 간신히 손으로 낚아챘다. 연기를 쿨럭거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무리한 요구군요."
"어쩔 수 없어요. 이 정도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어떤 의미 말입니까?"
백작가의 독녀. 비록 제국 변두리라고는 하나 어지간한 후작에 비견될 정도로 넓은 영지를 가진 바스티안 가문이었다. 다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 밖에 없겠지.
"최근 공작 가문들끼리 분란이 잦게 일어나다보니 파벌을 늘리기 위해 정략 결혼이나 가문의 영애를 공작의 첩으로 들이는 경우도 많아요. 그레이스 공작가에서 석 달 전에 아버지에게 자신들의 파벌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고 해요."
"그 대가로 당신을 요구했겠군요."
귀족 가문들이 가장 쉽게 동맹을 맺는 방법 중 하나가 혈맹이었다. 정략 결혼을 통해 피로 이어진 동맹. 시집 보내진 영애는 스파이인 것과 동시에 인질이었다.
서로에게 사랑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고 하더라도 귀족에게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네. 그 때의 저는 병을 앓고 있었으니 아버지가 그걸 명분으로 단칼에 거절하셨지만 제가 나았다는 사실을 안 공작가가 다시 제안한다면 그 때 저희 가문은 공작가에 변명할 명분이 없어요."
후작도 아니고 자그마치 공작이었다.
황제와 함께 제국을 떠받치는 다섯 개의 기둥. 단순한 공작의 힘이 아니라 각각이 가진 파벌들의 힘까지 합친다면 영지 하나를 고립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바스티안 백작가가 고립되든, 정치적으로 말살되든 내게는 남의 일일 뿐이다.
나는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족간의 정략결혼이 그리 드문 것도 아니잖습니까. 백작가 영애에서 공작가 안주인. 비록 첩이라고는 해도 공작가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무척 좋은 일로 들리는데요."
앨리스가 아니라 다른 자작, 백작가의 영애가 들었다면 당장에 물었을 법한 좋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귀족 가문에 남는 것은 가문을 이을 남자뿐.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는 여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공작 가문의 이름을 달고 생활하는 것이 앞으로도 훨씬 좋을 것이었다.
이런 변방의 영지가 아닌 수도에 가면 온갖 사치로운 보석과 화장품, 연회들이 기다리고 있을터였다. 앨리스만한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는 곳이 바로 수도였다.
비록 나이 꽤나 먹은 아저씨와 결혼한다 하더라도 어차피 사랑 없는 정략 결혼을 할 거라면 좀 더 좋은 상대를 잡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레이스 가문은 최고의 상대였다.
나는 오히려 그런 제안을 거절하려 하는 앨리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