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60)

"아뇨. 저는 절대 공작 가문에 갈 수 없어요. 제가 공작 가문에 첩으로 들어가게 되면, 가주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희 영지는 통째로 그레이스 가문에 귀속되니까요."

그제서야 나는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작가에서 굳이 이런 변방의 백작가 영애를 첩으로 들이려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다.

현재 바스티안 가문의 가주인 앨리스의 아버지는 가문을 이을 혈통이 아무도 없었기에 기사단을 그만두고 영지로 내려왔다. 그리고 고 그가 가진 자식은 앨리스 한 명 뿐.

가주인 그가 죽었을 때,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앨리스 밖에 없다.

하지만 앨리스가 그레이스 공작가에 첩으로 들어갈 경우 앨리스의 남편인 공작이 영지를 비롯한 모든 권리를 넘겨받게 된다. 앨리스는 자신의 가문과 영지가 그렇게 공작가의 것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자식이 한 명. 그것도 딸이라 생기는 문제점이었다.

하다못해 다른 혈통이 있었다면 모를까 앨리스와 지금의 가주. 고작 두 사람 뿐인 바스티안 가문은 공작가에게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왜 저를 필요로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와드려야 할 이유는 없군요."

"제가 가진 모든 걸 드리겠어요."

앨리스의 즉각적인 대답에 제시카가 떠올랐다. 그녀도 분명 이런 소리를 했었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앨리스는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명확히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모든 걸 각오하고 있었다. 내게 무슨 짓을 당하든 어떻게든 자신의 가문을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할만한 것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하군요."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모험가로 활동하며 어지간한 대규모 상단에 필적하는 재화를 얻었다. 의뢰 보수 뿐만 아니라 던전을 타사하고 얻은 보물과 대륙을 여행하며 얻은 희귀한 재물도 있었다.

그런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평화와 안정 뿐이었다.

"우선, 평민에서 백작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요. 영지의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릴 수도 있고, 기사단이나 병사들을 지휘할 수도 있어요."

앨리스는 내가 관심을 가졌다고 오해한 모양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푸흡.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요. 그런데 제가 권력을 원해서 이 영지로 온 것 같으십니까? 7클래스 마스터인 적색 마탑의 탑주도 황제에게 후작 작위를 받았는데요?"

내가 적색 마탑주처럼 마탑을 이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8클래스 마스터였다. 최소 후작, 어쩌면 공작 작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고작해야 백작 작위를 받겠다고 내가 앨리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내 조롱 섞인 대답에 앨리스가 조바심을 느꼈는지 다른 이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 뿐만 아니라 백작가의 재산과..."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잠시 떼어냈다.

"백작가의 재산을 모두 턴다고 해도 제가 가진 재산에는 안 될 겁니다만."

애초에 바스티안 백작가는 변두리라 제대로 개발이 되어 있지 않아 세금을 제외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물론 평민들에 비해서는 압도적인 수입을 거둘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가진 보물과 재화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

두 번째 설득 역시도 실패하자 앨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정신을 차린 고든이 나와 앨리스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돌려놓으려 했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분위기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맞아요. 사실 루디 씨가 저를 도와주실 이유는 없죠. 제가 부탁하고 있는게 루디 씨에게 민폐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알면 슬슬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려 하는 순간 앨리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래도! 지금 제가 부탁할 수 있는 곳이 루디 씨 밖에 없으니까요. 루디 씨가 저와 결혼한다 하시더라도 루디 씨의 사생활에는 일절 침해하지 않을거에요. 다른 여자를 데려와 첩으로 삼든, 성노예를 들이든 간섭하지 않을게요. 루디 씨가 제 몸을 원하신다면 전 최선을 다해 루디 씨한테 봉사할 거에요. 그러니까 명목상만으로 이름을 빌리는 것 만이라도, 제발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

그렇게 말한 앨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자 눈치를 보고 있던 고든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고개를 숙였다. 거의 다 타들어간 연초를 탁자에 비벼껐다. 치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초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눈물 겨운 광경이었다. 내가 순수한 관객의 입장이었다면 당장 사귀라는 말을 열창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건 명백한 현실이었다.

모험가로 십 년이 넘게 활동하다가 이제서야 고요한 안식을 찾았는데, 그걸 내 발로 걷어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무리일 것 같군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영지에 남아 있는 것이 불편하시다면 최대한 빨리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앨리스가 불편하지 않더라도 내가 불편했다. 내 정체와 아이린의 정체를 알고 있는만큼 수도에 이야기를 했다간 황실 기사단이 날 쫓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았다.

8클래스 마스터인 마법사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어린 마족이니 말이다. 마탑에서는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들겠지.

나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하지만 단호하게 앨리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대답을 들은 앨리스의 눈가가 젖었다. 내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동아줄 같은 것이었을까.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앨리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지금의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게 몇 분동안 눈물을 흘리던 앨리스가 눈물을 그치자 나는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이걸로 닦으십시오. 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은 앨리스는 조금 진정됐는지 숨을 골랐다.

"죄송해요. 추태를 보였네요."

"이해합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녀의 사정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 온전한 타인일 뿐이었다.

만약 그녀가 나를 협박하거나, 강압적으로 명령했다면 몹시 짜증난 내가 그녀를 처참한 꼴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만.

귀족들의 대명사 같은 단어다.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이들이 자신의 앞에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앨리스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를 찾아왔다면 그녀는 여기서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오늘 있었던 재키와의 전투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럽던 참이었다. 흥분한 내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아이린과 함께 한적한 시골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앨리스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음을 정리한 앨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든이 먼저 가게 밖에 나가 양산을 펼치고 앨리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앨리스는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다가 나를 보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정체를 들킬지도 모르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던전을 클리어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이건 거짓없는 진심이에요."

그 말에 순간 몸이 멈칫거렸다.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어떻게든 쥐어짜내 최대한 차가운 대답을 연기했다.

"딱히 그쪽을 위해서 한 짓이 아닙니다. 제게도 목적이 있었기에 했을 뿐."

"루디 씨에게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저희 영지를 구해주신 것이니 백작가의 일원으로서 감사 인사를 드리는게 맞아요."

"......."

"귀족이라 할지라도 모험가의 개인 정보에 대해 캐묻는다는 것은 실례라는 것은 고든 씨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만큼 필사적인 상황이었다고 제 입으로 말해봤자 변명으로 들리실 뿐이겠죠. 오늘 들은 정보의 대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갚도록 할게요. 무례를 범해 죄송했습니다. 그럼, 안녕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게 밖으로 나간 앨리스는 고든이 씌워주는 양산으로 햇빛을 피하며 마차 위에 올라탔다.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앨리스와 고든이 떠난 가게에서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말한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터무니 없고, 일방적이며, 무례한 요구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줄 수는 있었다.

내가 이 영지를 바로 떠나지 않고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아이린 때문이었다.

저 나이 때의 아이라면 당연히 또래 애들과 놀고 싶고, 예쁜 옷을 사거나 거리 음식을 군것질하고 싶을텐데 너무 시골로 들어가버리면 그런 것들이 없었다.

나야 아이린과 함께 시골에 틀어박혀 사는 것을 원했지만 아이린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경험조차 해보지 못한 아이였다. 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

다른 영지로 옮겨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린의 시민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정착한 내가 앨리스의 목숨을 구해 1급 시민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시청에서 근무하는 아르웬과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덕분에 다소 느슨하게 아이린의 시민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지만 다른 영지에서도 그런 요행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결국에는 원점이었다.

앨리스를 도와주는 것과 영지를 떠나는 것을 저울질 하던 도중 아이린이 방에서 살금살금 나왔다.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다가온 아이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처럼 내게 달라붙은 아이린은 보는 사람이 치유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이제는 홀몸이 아니잖아.

네가 그렇게 동경했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도 신중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야지.

자식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이 이럴까.

내 기억 속에는 아버지라는 인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마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는 이런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슬슬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평소처럼 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 썰고, 준비해둔 샐러드를 꺼내 상을 차렸다.

닭고기에 튀김옷을 입히니 고소한 냄새가 가게 안에 가득 퍼졌다.

아이린은 내 옆에 달라 붙어서 냄비 안에서 지글지글 튀겨지고 있는 닭튀김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닭튀김이 완성되자 샐러드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아이린은 먹성 좋게도 닭튀김을 다섯 개나 먹어치웠다. 처음에는 깡말랐던 몸이 지금은 살짝 말라 보이는 정도가 되었다.

더불어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 어린 아이 특유의 볼살도 붙어 더욱 귀여워졌다. 저 볼을 잡아당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후식으로 사온 푸딩까지 하나 먹고 나자 아이린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주인님...같이 자면...안 돼요?"

최근 들어 아이린이 변한 점이 있다면, 나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져 간다는 것이었다.

화장실을 갈 때 조차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고, 잠시 외출이라도 하고 오면 며칠 못 본 사람처럼 내게 달라붙어댔다.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컸으니 그 보상심리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계속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물론 아이린이 조금만 울먹거리면 거절하지 못하는 나도 문제였지만.

"오늘은 일이 있어서 안 되지만 다음에는 함께 자 주마."

아이린은 아쉬워 하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을 침대에 눕는 것을 본 나는 방문을 살살 닫고 나왔다. 저렇게나 즐거워 하는 아이를 나 좋자고 산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물에 빠진 앨리스를 건져 주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요구한 방법을 들어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굳이 그런 복잡한 방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단순하게, 무식하게, 천박하게, 그리고...폭력적으로. 예전의 내가 쓰던 방식으로도 충분했다.

이번 일에 대가는 톡톡히 받아둘테니 기대해 둬. 앨리스.

앨리스는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서 말랐지만 유전 덕분인지 가슴은 봉긋하고 엉덩이는 풍만해 보였다.

정성을 다해 봉사하겠다는 말. 잊지 않았다고. 나를 귀찮게 한 만큼 진득하게 조교시켜주마.

옷장 구석에 넣어놨던 검붉은 외투와 가죽 바지로 갈아입었다. 서랍에 넣어둔 손에 쫙 달라붙는 장갑을 끼고 가게를 나섰다.

거리는 던전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시장을 돌아다니는 모험가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