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몰라도, 사라졌다는 말 만으로도 저렇게 즐거워 하는 걸 보면 완전히 헛된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던전에 참가했던 모험가들도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성 안으로 몬스터들이 쳐들어 오는 것을 걱정하던 평범한 사람들도 안심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활발한 거리를 걸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내가 아는 사람과는 아직 마주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나서 몸을 틀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으슥한 틈새로 들어가니 굴러다니는 잡다한 쓰레기들과 쓰레기통 옆에 기댄 채 술에 취해 있는 노숙자들이 보였다.
그들 곁을 지나쳐 뒷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거리가 튀어나왔다.
코를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와 함께 옅은 붉은 빛의 등이 가게 들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홍등가(紅燈街)였다.
허벅지와 가슴골이 그대로 노출되는 야시시한 옷을 입은 창녀들이 가게 앞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바스티안 백작가의 영지는 홍등가의 규모가 작은 편이었지만 없지는 않았다.
창관만이 아니었다. 창관 옆의 골목 사이에서 싸구려 미약이나 음약을 몰래 팔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잘들 산다. 잘들 살아.
거리를 지나가는 내게 손을 흔들며 유혹하는 창부들을 지나쳐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자 허름해 보이는 술집이 나타났다.
술집 안에서는 딱 봐도 '불법적인 일'에 종사하시는 양아치처럼 보이는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팔에 문신이 있다거나, 얼굴에 길게 찢어진 흉터가 남아있는 딱 봐도 싸구려 인생 같아 보이는 놈들 말이다.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놈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대한 경계일까. 놈들은 눈알을 굴리며 나를 훑어봤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안쪽에 서 있는 바텐더였다.
"이거, 포션 가게를 하시는 루디 씨 아니십니까. 이런 외진 술집에는 어쩐 일로?"
다른 놈들과 달리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 알고 왔으니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오만한 내 말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 새끼가......"
내게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성미 급한 놈이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것을 보니 싸움깨나 해본 놈이었다.
하지만 재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느리고, 약했다. 마치 어린애가 재롱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런 놈의 팔을 낚아채 그대로 꺾었다. 뿌드득. 하는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놈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다른 놈들이 자리에 일어섰다. 팔이꺾인 놈은 몸을 덜덜 떨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놈은 내가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움직여도 영영 팔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팔을 손에서 놓고 주저앉은 놈의 배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커억!"
침과 함께 방금 전까지 마시고 있던 술을 토해내는 놈의 모습은 무척 보기 흉했다. 쿨럭거리며 구역질을 해대는 놈을 강하게 걷어차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눈치를 보던 놈들 쪽으로 날려보냈다.
갑작스레 날아오는 동료를 놈들은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금방이라도 죽일듯이 노려보는 놈들의 시선을 비웃으며 넘긴 나는 바텐더에게 다가갔다.
"이 술집은 손님 대우가 영 별로구만. 안 그런가. 지부장 양반?"
내 말에 씰룩거리던 바텐더의 입꼬리가 굳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 거리던 놈들도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고 오셨군요. 누구의 소개로 오셨습니까?"
"그걸 내가 말해줘야 하나?"
도적 길드. 모험가 길드와 달리 공식적으로 정부에 등록되지 않은 '범죄 길드'다. 도둑이나 범죄 조직에 가입한 놈들이 들락거리며 의뢰를 받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물론, 지금의 나처럼 '의뢰'를 하기 위해 찾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그저, 루디 씨 같은 분이 저희에게 의뢰할 일이 있다는게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원하시는 의뢰의 종류는 무엇입니까? 살인, 절도, 여자. 모두 다 가능합니다."
바텐더의 말에 내 뒤에 있는 놈들이 몸을 씰룩거리는게 느껴졌다. 이런 작은 영지에서는 도둑질할 것이나 괜찮은 의뢰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으니 자신이 맡고 싶겠지.
게다가 영주가 기사단 출신이라 뇌물이나 범죄에 대해 칼같이 대응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미안하지만 셋 다 아니야."
"셋 다 아니라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예전에 '놈'이 말하길 자기 길드의 지부들에는 자신의 명령을 바로 전달 할 수 있도록 수정구를 줬다고 했으니 말이다.
"너네 길드장이랑 직통으로 연결되는 수정구 있지?"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시는지는 몰라도, 길드장께서 일방적으로 저희에게 연락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정구 입니다. 외부인인 당신이 신경쓸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바텐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와인잔을 들어 다시 닦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바텐더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작게 속삭였다.
"새벽의 이슬을 밟고, 밤의 어둠을 틈타 길을 걷는다."
".......당신이 어떻게 그걸."
내 등 뒤에 있는 양아치들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바텐더로 위장 중인 지부장은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수도에 있을 때 암시장에서 몇 번 써먹은 구절인데, 아직도 안 바꼈구만.
도적 길드의 간부들 간의 '암어'였다.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간부급 이상에게만 알려진 문자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텐데. 암어가 유출됐든, 내가 '귀한 손님'이든 안쪽으로 안내해야하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결국 닦고 있던 병을 내려놓은 바텐가 바닥의 판자를 뜯어내자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앞장서서 걸어들어가는 바텐더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한참 동안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 통로 옆에 쌓아놓은 상자들이 보였다. 상자 안에는 술병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도적 길드가 밀주를 만들어 판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역시 당신은 저희 길드 소속이 아니었군요."
지부장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걱정 마.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손에 쥐고 있는 독침 놓는게 좋을걸.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나도 모르게 네 손을 아작낼지도 몰라."
내 장난스런 말에 지부장이 움직임을 멈췄다.
"......젠장. 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냥 너네 대장이랑 잘 아는 사이 정도로만 알아둬. 미리 말해두지만 위에 있는 애들한테도 내가 여기 찾아왔다는 소리 못하게 입단속 잘 시키고."
내 말에 지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지하실 가장 안쪽 방에 들어오니 침대 하나와 구석에 놓인 작은 상자들이 보였다.
하지만 지부장은 상자가 아닌 침대 밑으로 들어가더니 침대에 나 있는 작은 구멍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수정구를 빼냈다.
"지독하구만. 보통 그렇게까지 숨겨두나?"
"당신이 아는 길드장님과 제가 아는 길드장님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 정도로도 모자라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길드장님이 저희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실 때 쓰이는 수정구입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할거니까 신경 끄고."
지부장의 손에 쥐어진 수정구를 낚아채고는 수정구에 부여되어 있는 마법을 가볍게 손봤다. 마술 술식이 단순해서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았다.
마나를 불어넣자 수정구가 투명해지며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델론즈. 그리운 이름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게 2년 전이었던가.
내가 막 모험가가 됐을 때 우연히 녀석과 파티를 이룬 적이 있었는데, 나름 죽이 잘 맞아서 한동안 함께 모험을 다녔다.
대략 5년 동안 모험을 함께하다가, 녀석은 자기만의 길드를 만들겠다는 말을 하며 모험을 그만뒀다. 물론 그 날 이후로도 간간이 연락을 하긴 했다.
설마하니 도둑과 범죄 조직을 묶은 '뒷골목 길드'를 만들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델론즈의 실력이라면 그런 놈들을 지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내가 아는 델론즈가 길드장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파티에서 도적 포지션을 맡고 있던 델론즈는 실력은 좋지만 여자를 밝혀서 늘 다른 파티 여자모험가들에게 찝적대다가 얻어맞고, 차이고, 까이는 놈이었다.
그런 한심한 놈이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뒷세계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범죄조직을 제어하는 대형 길드를 만들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빛이 나던 수정구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희미하던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지며 작게나마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 이건 바스티안 영지 지부장과 연결된 건데, 이게 왜 빛나지?"
틀림없는 델론즈의 목소리였다.
"이봐! 수정구에 뭔 짓을 한거야!"
완전히 선명해진 델론즈의 모습이 수정구에 비쳤다.
델론즈의 고함소리에 내 옆에 서 있던 지부장이 몸을 덜덜 떨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델론즈 님!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델론즈님과 아는 사이라고 해서..."
"응? 날 아는 사람?"
델론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뭐야, 루디?! 네가 왜 거기 있냐?"
"얼빠진 태도로 보니 델론즈 맞구만. 당신은 나가봐. 델론즈랑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내 말에 델론즈도 고개를 끄덕였고, 델론즈의 눈치를 보던 지부장은 얌전히 방을 나갔다.
"이것 참. 한동안 연락이 없다 싶었더니 바스티안 영지로 갔던거냐?"
델론즈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러는 너는 꽤나 잘 지내는 걸로 보이네."
"아아, 요즘 귀족 나리들께서 파벌 싸움이 한창이라 우리한테 의뢰도 많이 들어온단 말이지. 덕분에 금화로 목욕을 해도 될 정도로 돈을 벌어댄다고. 뭐. 내 근황은 이 정도로 하고, 이렇게 연락할 정도면 급한 일이 있는 거 아냐?"
여전히 쓸데없는데서 눈치가 빠른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