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60)

"그래. 혹시 바스티안 백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거 있냐?"

"영애가 원인 모를 병에서 나았다는 거? 혹시 그거 네가 한거냐?"

"그런 셈이지. 것보다 네가 알고 있다는건 조만간 공작의 귀에도 들어가겠군."

앨리스는 자신이 병에서 나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외출을 자제했다고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델론즈가 알고 있다면 수도에 있는 공작의 귀에도 조만간 들어가겠지.

"그레이스 공작을 말하는거냐? 마침 오늘 그 정보를 그레이스 가문에서 찾아온 시종이 사갔는데."

"네가 팔아치운 거냐!"

"도둑과 창녀만큼 귀가 밝은 직업도 별로 없지. 정보도 우리가 잘 다루는 것들 중 하나일 뿐이야."

자랑스레 떠벌이는 놈의 면상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공작에게 정보가 들어가는 걸 막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역으로 팔아먹다니.

벨론즈는 내 반응을 보고 그제서야 상황이 이해 됐는지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뭐야, 너 혹시 영애랑 눈이라도 맞았냐?"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고. 그렇게 정보를 잘 다룬다면 공작가에 대한 정보도 많겠네?"

"그야 그렇지. 무슨 정보든 값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제공하는게 우리 길드의 모토라 말이야."

누가 도둑놈 출신 아니랄까봐 돈 밝히는건 여전했다.

"그럼 그레이스 공작가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정보들도 알고 있겠을테고."

여유롭게 웃으며 분위기 잡고 있던 델론즈는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야, 루디. 공작가의 그런 정보를 팔았다가는 아무리 우리라도 위험하다고? 그 정도의 정보를 취급하는 건 우리밖에 없는데, 그걸 팔았다간 우리가 공작가를 배신했다는걸 모를리가 없잖아."

"델론즈, 네가 파티를 탈퇴하면서 나중에 성공하면 백 배로 갚겠다고 나한테 200골드 빌려갔던거 기억하냐?"

델론즈가 길드를 만들겠다며 파티를 탈퇴할 때, 녀석은 나중에 반드시 갚겠다며 내게 돈을 빌려갔다.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라 까먹고 있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기억났다.

".......그레이스 공작가에 대한 정보를 싹싹 긁어 보내주는거면 될까?"

"그게 20000골드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뭐, 어느 정도는 탕감해줄게."

한참 고민하던 델론즈는 결국 머리를 벅벅 긁으며 수락했다.

"...젠장. 알았다고. 내일 점심까지 정리해서 그쪽 지부장한테 보내줄게. 당분간 수도에 있기는 글렀군."

"정 싫으면 그레이스 공작한테 내가 이런 정보를 사려고 했다고 일러바쳐도 돼. 그 때는 공작가가 아니라 나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만."

"됐거든. 내가 너랑 하루 이틀 보는 줄 아냐. 공작가랑 같이 우리 길드까지 전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델론즈의 말에 나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켰네."

그 후로는 델론즈와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년쯤 전에 모험가를 그만두고 방황하다가 반년 쯤 전에 바스티안 영지에 정착했다고 하니 델론즈는 놀라워했다.

"네가 한 군데에 붙어있다는 건 좀 놀랍긴하네. 난 네가 죽을 때까지 대륙을 싸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너 같이 허접한 놈이 정말로 길드를 만들 줄은 몰랐거든."

델론즈는 유쾌하고 털털한 성격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델론즈는 그랬다.

하지만 델론즈가 말하길 길드를 운영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철권제재를 가했다고 한다.

다른 조직들이 길드에 찝적거리면 그대로 몰살시키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위험을 느낀 다른 조직들이 힘을 합쳐서 덤벼오면 그것조차 분쇄시켰다.

멍청한 델론즈다운 행동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통한 지속적인 통치는 어렵지만 단기적인 통치는 쉬웠다.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공포로 부하들을 휘어잡은 다음이었다.

녀석은 모험가로 활동하며 쌓았던 인맥을 이용해서 사업처와 거래 루트를 뚫었고, 귀족이나 상인들에게 천천히 '해결사'와 같은 일에 대해 정보를 넘기기 시작했다.

직접 손을 쓰기 어려운 암살이나 절도 의뢰를 받아 자신이나 믿을 수 있는 수하를 시켜 의뢰를 성공시켜 더욱 신뢰를 쌓았다.

"그렇게, 결국에는 지금의 길드가 탄생했다는 말이지. 자그마치 내 피같은 5년을 바쳐서 만들어낸 길드라고."

"결국 하는 짓은 안 변했지만 말이야. 이 도둑놈 새끼야. 네가 클라스틴 후작가 가보 훔쳐와서 우리 파티가 단체로 추적당했던 거 기억 안 나냐?"

"뭐, 아무튼 결과가 좋으면 됐지. 나중에 수도에 오면 연락해라. 죽여주는 밤을 선사해주마. 온갖 고급 창녀들을 불러서 질펀하게 놀아보자고."

그런 음담패설을 끝으로 수정구의 연락을 끊었다.

오랜만의 동료와 연락을 했더니 감회가 새로웠다. 델론즈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내 마음 한 구석을 안심하게 했다.

델론즈에게 돈 빌려줬던 것도 까먹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델론즈 녀석을 몇 번 더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불이 완전히 꺼진 수정구의 마법회로를 고쳐서 델론즈 쪽에서 일방적인 연락만 가능한 수정구로 돌려놓았다. 수정구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오자 문 바로 옆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지부장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내일쯤에 너네 대장이 서류 보내줄테니까 내가 찾아왔을 때 주면 돼. 아까 말했던 것처럼 위에 있는 놈들 입단속도 해두고. 알겠냐?"

"물론입니다!"

이제 막 부대에 배치받은 신병처럼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는 지부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나는 유유히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술집 안에는 여전히 양아치 놈들이 남아 있었지만 내 뒤로 몸을 움츠린 채 올라오는 지부장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내일 보자고."

"안녕히 가십시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지부장이 배웅하자 눈치를 보던 놈들도 하나 둘씩 자리에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나를 배웅하는 놈들을 뒤로하고 홍등가를 빠져나오니 어느새 밤은 완전히 깊어져 있었다.

붉은 등이 유난히 선명해 보이는 밤이었다.

술에 완전히 취한채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놈들. 결국은 다 같은 놈들이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귀족이든 평민이든 다를 바가 없었다.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보다 많은 힘을 가진 다른 파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에 필요한 것은 힘이었다.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도태되고 잊혀져간다. 그게 현실이었다.

가게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몸을 씻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돌아오며 한 생각 때문인지 오랜만에 옛날 일을 꿈으로 꾸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꿈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고, 기분 나쁜 꿈 때문에 정신도 피폐해져 있었다.

어디선가 환청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인 서랍 문을 열었다.

손에 잡힌 물약의 색을 확인하고 입 안에 털어넣었다. 쓴 물약을 모두 삼키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두통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후유증으로 하루 이틀은 마나를 제어하는게 힘들지만 당분간은 마법을 사용할 일도 없으니 괜찮았다. 잠든 아이린을 깨워 식사를 했다.

나른한 몸으로 의자에 멍하니 앉아 포션을 사러 온 모험가들에게 하급 포션을 몇 개 팔아치우니 점심때였다.

크루거의 가게에서 산 빵과 구운 돼지고기로 아이린 몫의 점심을 차려주었다.

"점심시간 동안 잠시 외출할텐데, 가게 좀 보고 있겠니?"

"힝...금방 오실거죠?"

함께 밥을 먹고 싶었는지 조금 아쉬워 하는 아이린이었지만 점심 시간 중으로 돌아온다고 약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걸려 있던 팻말을 '외출 중'으로 뒤집어 놓고 가게를 나왔다.

어제 찾아갔던 홍등가 안쪽의 주점에 들어갔다. 낮이라 그런지 술집은 바 안에서 와인잔을 닦고 있던 지부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주점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본 지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안쪽 서랍에 넣어둔 서류철을 꺼내 올려놓았다.

쌓여있는 서류철은 생각보다 훨씬 두꺼웠다.

대체 얼마나 더러운 짓거리들을 많이 한 거냐.

"이 정도면 충분하십니까? 우선 가장 중요한 정보만 따로 추려놓은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다른 정보도 더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정중하게 묻는 지부장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이 정도면 됐어. 너희 대장한테도 수고했다고 전해줘."

"알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지부장에게서 건네받은 서류철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거리를 걸어 시청 쪽으로 향했다. 시청 앞을 지나가다 점심시간이라 막 식사를 하러 나온 아르웬과 마주쳤다.

아르웬의 곁에는 동료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여자가 두 명 더 있었다.

"안녕하세요. 루디 씨. 혹시 시청에 찾아오신 거에요? 죄송하지만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업무를 안 보는데요."

"아뇨. 그냥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지나친 것 뿐입니다. 그럼 즐겁게 식사 하십시오."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등 뒤에서 아르웬에게 나와 무슨 사이냐고 캐묻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청을 지나니 영주의 저택이 나왔다.

앨리스는 나를 찾아올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한 적이 없다고 했으니 분명 지금도 저택 안에 있을 것이다.

영주의 저택 앞에서 문을 지키던 병사 두 명이 정문으로 다가오는 나를 보고는 들고 있던 창을 겨누었다.

"누구냐. 오늘 영주님과 접견 약속을 잡은 사람은 없을텐데."

"며칠 전에 1급 시민으로 승격된 루디라고 합니다. 앨리스 님에게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 이름을 전해주시면 분명 만나 주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 넣어뒀던 1급 시민 증명서를 건네주었다. 증명서가 위조인지 확인하던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증명서를 들고 있던 한 명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 증명서가 없었다면 앨리스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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