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260)

남아서 문을 지키고 있던 다른 병사는 어느새 창을 거두고는 내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번에 새로 1급 시민이 되신 분이셨군요.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뇨. 그야 처음 보는 사람이면 경계하는게 당연하죠."

딱히 할 만한 대화도 없었기에 잠깐 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앨리스 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병사의 안내를 받아 영지 안으로 들어가니 잘 관리된 넓은 정원이 보였다. 화사한 꽃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을 보며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시녀장님께서 안내해 주실겁니다."

병사의 말대로 서 있던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웃으며 응접실까지 안내해 주었다.

저택의 복도에는 가문의 조상들로 보이는 이들의 초상화와 꽃이나 검을 그려놓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평범한 귀족의 저택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값비싼 명화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식품들이 없다는 것 정도.

기사단 출신의 영주라 그런 것인지 검소하면서도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하고 있는 저택이었다.

"아가씨는 이 안에 계시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런 소파와 목조 가구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응접실의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앨리스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방금 막 갖다놓은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앨리스는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답을 내놓았다.

"제 제안을 수락하실 생각이 드신 건가요?"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대신, 조금 더 괜찮은 방법을 들고 왔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지요."

내 말에 앨리스는 불안해하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스 공작을 제외한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나는 품 안에 넣어뒀던 서류철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 서류들은 제가 알아낸 그레이스 공작가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서류들입니다. 이걸 가지고 공작가와 협상을 하신다면 약혼 요구쯤이야 간단히 파기하실 수 있겠지요."

오는 길에 몇 개를 훑어봤지만 '고작' 이런 일에 쓸 만한 서류들이 아니었다.

저걸 다 터뜨린다면 제국의 다섯 기둥 중 하나인 그레이스 공작가를 뿌리 뽑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정보들도 몇 개 있었다.

지금 가주인 그레이스 공작이 자신의 형을 독살했다는 증거를 비롯해서 그레이스 가문이 이때까지 행해왔던 반역 바로 아랫단계 정도는 되는 중범죄들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공작가라도 이런 증명 서류가 있는 이상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고작 백작가의 영지 하나를 집어먹겠다고 무리했다가는 자기 가문 자체가 파멸할 수도 있었다.

"이런건 어떻게 구하셨나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아뇨.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출처는 중요하지 않죠."

그래도 말귀를 빨리 알아들어서 다행이었다. 앨리스는 귀족 치고는 나름대로 융퉁성이 있고, 생각도 있는 편이었다.

"아무 대가 없이 이런 정보를 주실리는 없을테고, 뭘 원하시나요?"

"간단합니다. '바스티안 드 앨리스'라는 존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겨주십시오."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것은 사실상 노예 계약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굳이 앨리스라는 존재를 한정해서 요구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 쪽이 그녀 입장에서도 더욱 쉽게 납득할 수 있을테니까.'

어찌됐든 그녀는 공작가에 영지를 넘겨주지 않게 된다. 또한 자신의 아버지나 식솔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만 희생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 더 다루기 쉬운 것이다.

앨리스는 영주의 딸이다. 그리고 영주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구하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의사를 초대하고, 회복약을 구하러 다닐 정도로 팔불출이었다.

그런 소중한 딸인 앨리스에 대한 권리를 넘겨받는 것만으로도 나는 백작가를 통째로 가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하자면 '인질'인 셈이다.

나와 아이린의 평화로운 생활을 위한 인질 말이다.

앨리스는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몸을 떨었다.

"...정말, 저 하나로 되는거죠?"

"물론입니다. 이래봬도 저는 꽤나 자비로운 편이라 일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그 대가를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루디 씨의 말대로 저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죠."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푸른 빛의 마나들이 형태를 이루며 글자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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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스티안 드 앨리스는 루디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

2. 루디는 그 대가로 바스티안 드 앨리스에게 '그레이스 공작가'의 치명적인 약점이 적혀 있는 서류를 제공한다.

3. 바스티안 드 앨리스는 루디에게 해가 되는 일체의 행동을 할 수 없다.

4. 바스티안 드 앨리스의 목숨은 루디가 사망하는 순간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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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계약서였다. 조금 엉성하고 허술한 부분도 있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계약의 내용이 아니라 '마나 계약'이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었으니까.

"아래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마나로 만들어낸 푸른 펜을 앨리스에게 건네주자 앨리스는 계약서의 제일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이름을 모두 새겨넣자 밝게 빛나던 계약서는 빛으로 흩어지며 나와 앨리스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걸로 계약은 완료되었습니다. 계약의 강제성이 작용해서 할 수도 없겠지만, 만약 계약을 어기려는 행동을 할 경우 앨리스 양의 마나가 폭주해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죽음에 이르게 될 겁니다."

"...알겠어요.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는 탁자 위에 있는 서류를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야 귀족들이 더러운 짓을 많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앨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루, 루디 씨.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믿을만한 정보통에게 입수한 것들입니다. 허튼 정보를 적어뒀을리는 없지요."

자그마치 도적 길드 마스터가 준 정보였다.

델론즈가 멍청하긴 했지만 맡은 의뢰는 반드시 수행하는 녀석이었다. 이런 걸로 장난질을 칠 리는 없다.

앨리스는 서류를 잡고 있는 손을 덜덜 떨며 한 장씩 넘겨갔다. 그리고 마침내 앨리스가 모든 서류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그레이스 공작가의 약혼을 파기할 수 있겠지요?"

"이건... 그 정도가 아니잖아요."

"어차피 그 정보를 터뜨리면 바스티안 백작가 역시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그냥 얌전히 손에 쥐고 약혼을 파기하는 정도로 만족하십시오."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제국의 다섯 기둥 중 하나였다. 그레이스 공작이 마음만 먹으면 바스티안 영지를 밀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알겠어요."

납득한 앨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걸로 확실하게 계약은 이행되었다.

나는 앨리스에게 약혼을 파기할 수 있는 확실한 서류를 넘겨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앨리스에게 대가를 요구할 차례였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앨리스의 가슴골로 향했다. 앨리스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편한 복장이었다. 가슴골이 파여있는 새하얀 원피스 드레스를 보니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대로 무참하게 범해서 정신을 망가뜨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겠지만 앨리스는 앞으로도 나를 위해서 봉사해 줘야 할 존재였다. 느긋하게 교육시키는게 좋겠지.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 할 때, 나는 여성 편력이 난잡한 편이었다. 내가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는게 아니었다.

그저 하룻밤 상대로 만난 여모험가나 주점의 여급들은 그 이후로도 나를 쫓아다녔다.

델론즈 녀석은 기만하는거냐!라고 외쳐댔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앨리스는 새하얀 원피스에 반투명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요염하게 느껴졌다.

나는 차오르는 욕구를 억누르며 병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붉은 빛의 포션병에서는 희미하게 로즈마리 향기가 풍겨왔다.

"이 포션을 먹어라."

자연스레 말이 짧아졌다.

이미 마나 계약으로 주종관계가 성립된 이상 그녀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아이린의 경우와는 달랐다.

앨리스는 내게 진 빚이 많았다.

포션으로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지 보전을 위한 서류까지 준비해주었다.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정상적인 성취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틀린 욕망으로 앨리스를 고문하거나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앨리스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진득한 쾌락의 늪에서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앨리스는 갑작스레 달라진 내 태도에 당황했지만 토를 달지 않고 포션 뚜껑을 열고는 꼴깍꼴깍 마셨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신 것을 확인한 나는 빈 포션 병을 챙겼다.

"내일 점심 때쯤 나를 찾아와라."

"...네. 알겠습니다."

앨리스의 대답을 듣고 나는 어느새 차갑게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컵을 내려놓은 다음 응접실을 나왔다.

저택의 출구로 가다가 접시를 들고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시녀장을 만났다.

"이야기는 모두 나누셨나요?"

"네. 덕분에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차의 향이 무척 좋더군요."

"어머, 취향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저희 아가씨를 잘 부탁드려요. 계속 병 때문에 침대 위에 누워 계신 분이거든요."

잘 부탁드린다는 말에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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