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60)

"오늘은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내 말에 앨리스가 작게 투덜거렸다.

"내일은 불러내기 전에 말이라도 해주세요. 갑자기 불러내서 놀랐잖아요."

"어차피 공작가의 눈을 피해서 하루 종일 저택의 방 안에 있는 걸 아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레이스 공작가와 협상할 수 있는 카드는 쥐고 있지만 굳이 먼저 공작가에 싸움을 걸 필요는 없었기에 앨리스는 저택 밖으로 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에 나를 찾아온 것과, 내가 앨리스를 불러낸 것이 그녀가 한 외출의 전부였다.

앨리스는 내 대답에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부르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하는구만.

정말로 싫다면 부르지 말라고 하면 될텐데 불러내기 전에 말이라도 해달라는 것은 자신을 좀 더 배려해달라는 투정으로 밖에 안 느껴졌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쾌락에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찾아오는게 싫은 척 하지만, 속으로는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안녕히가십시오."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어깨에 새겨져 있던 작은 마법진이 빛나며 그녀를 다시 백작가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이동시켰다. 슬슬 조교도 마무리 되어갔다.

오늘 앨리스의 반응을 보니 이미 스스로 쾌감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며칠 동안 억눌러왔던 욕구를 내일 모두 폭발시킬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일. 나는 앨리스의 몸을 완전히 취할 것이다.

구석구석, 한 군데도 빠뜨리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중얼거리며 내일은 어떤식으로 조교를 할지 생각했다.

플로라와 아이린이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아이린은 물고기가 들어있는 나무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식용으로 쓰기에는 크기가 애매한 작은 물고기들 뿐이었지만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상자를 들고온 아이린은 무척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린이 마을 애들이랑 같이 강가에서 잡은 물고기에요."

플로라의 설명에 아이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이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상자를 꼬옥 끌어안는 아이린을 보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즐겁게 논 것 같아 다행이구나."

"네! 엄청 즐거웠어요!"

방방 뛰며 좋아하는 아이린은 또래 애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플로라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이린을 돌봐줘서 고맙다."

"뭘요. 제가 해주고 싶어서 하는건데."

플로라는 손을 흔들며 아이린과 작별인사를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린도 웃으며 작별인사를 해주는 것을 보니 둘도 꽤나 친해진 모양이었다.

"아이린, 너는 이 물고기들을 어떻게 하고 싶니?"

내가 묻자 아이린은 잠시 망설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전부 주인님의 것이에요. 주인님이 원하시는대로 하시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아이린의 대답에 나는 주먹을 쥐고 아이린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살살한다고 했는데도 꽤나 아팠는지 아이린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꿀밤을 맞은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쥐었다.

"으으..."

울먹거리는 아이린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이건 확실히 말해둬야했다.

나는 분명 아이린이 하고 싶은 것을 물었는데, 아이린은 내가 원하는대로 하면된다고 대답했다.

이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노예였다면 저게 맞는 대답이라는 점이 더욱 화났다.

"너한테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굳이 내 눈치를 볼 필요는 하나도 없단다. 네 몸은 내 것이지만, 네 생각까지 내 것은 아니니까."

사람의 몸은 구속구로 제어할 수 있지만 생각까지는 제어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이 노예가 혹시라도 자신의 뒤통수 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정신 파괴'를 한 노예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신 파괴를 당한 노예들은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인형같은 존재가 된다.

내 단호한 말에 아이린이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스스로의 생각을 말했다.

"저...이 물고기들을 키우고 싶어요!"

눈을 질끈 감은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린에게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허락했다.

"네가 원하는대로 하렴. 대신, 밥이나 물은 네가 갈아줘야한다?"

"네!!"

힘차게 대답하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물고기들이 든 나무 상자를 찬장의 빈 자리로 옮겼다.

해맑게 웃음짓던 아이린이 욕실로 간 사이에 나무 상자 안에 공기 정화 마법과 치유 마법을 부여했다.

원래 강가에 살던 물고기를 저런 작은 상자 안에 가둬 놓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금세 죽거나 숨을 쉬지 못해 죽는 경우가 잦았다.

아이린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싶지 않았기에 미리 마법을 걸어두었다.

애완동물이라. 나쁘지 않지.

문득 어제 앨리스에게 목줄을 채우고 거리를 돌아다닌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아이린을 깨웠다. 함께 아침을 먹고, 나는 준비해놓은 포션들에 대한 설명과 가격을 아이린에게 알려주었다.

아이린은 며칠 동안 가게에서 나와 함께 있으며 단골들과도 얼굴을 익혔고, 머리가 워낙 좋아 물건 값 역시도 능숙하게 계산하고 장부도 기록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나가서 할 일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시청에 가서 아이린의 시민권을 발급받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찾아가 시민권 서류를 작성했지만 어제에서야 시민권 발급이 완료됐다는 전보가 왔다.

그래서 오늘 직접 찾아가 시민권을 받아와야 했다.

두 번째는 지나가는 길에 신전의 상황을 확인하는 것. 지난번 골동품점에서 얻었던 성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고 있는 정보가 없었다.

지난번 제시카가 말했던 것처럼 신전에서 환자를 거부했다는 것 역시 의심스러웠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신전은 나름대로 평민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장소였다.

모험가들을 차별하지 않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가 신전이었다. 조금 돈을 받기는 하지만 축복이나 치료 주문을 걸어주기도 하고, 언데드 퇴치와 같은 일에는 사제를 파견시키기도 한다.

신을 섬기는 자로서 섭리를 거스르는 언데드와 같은 존재들은 신전 입장에서도 골칫덩어리니 말이다. 어쩌면 신전이 폐쇄적으로 변한 이유가 내가 가진 성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세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앨리스였다. 스스로 쾌락을 갈구하게 된 앨리스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취할 생각이었다.

지난번에 목줄을 채워 거리를 돌아다니는 플레이를 했을 때 반응이 좋았던 것 같은데, 오늘도 야외에서 소환을 해볼까 고민이 됐다.

물론 앨리스가 여기 있었다면 첫 경험을 어떻게 야외에서 할 수 있냐고 화를 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어차피 아침 일찍도 아니고 대낮에 포션을 사러 오는 손님은 거의 없으니 아이린 혼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린에게 가게를 맡기고 시청에 도착한 나는 아르웬을 찾았다. 아르웬은 제일 왼쪽 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왔다.

"어머, 루디 씨! 아이린 양의 시민권 때문에 찾아오신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자 아르웬은 접수처 안쪽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방 안에 있던 사무관은 아르웬과 함께 들어온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이거, 루디 씨가 아닌가. 아이린 양의 시민권이라면 이쪽에 만들어놨네."

탁자 오른쪽에 쌓여있던 시민패들 중 혼자서 은빛으로 빛나는 패가 있었다.

"2급 시민임을 증명하는 패라네. 처음에는 공짜로 발급되지만 잃어버리면 돈을 주고 다시 만들어야하니 주의하게나."

"감사합니다."

아이린에 대한 간단한 정보들이 등록되어 있는 은패를 챙겨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보니 요즘에는 잘 찾아오지 않는 것 같던데. 아르웬 양이 겉으로 보기에는 이래도 참한 여자..."

"이상한 소리 좀 하지마세요. 사무관님! 저랑 루디 씨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제가 겉으로 보이는게 뭐가 어때서요!"

아르웬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며 화를 냈지만 오히려 사무관은 의아한 듯이 나와 얼굴이 붉어진 아르웬을 번갈아봤다.

"응? 하지만 지난번에는 분명..."

"아아! 정말이지! 루디 씨, 어서 나가요."

사무관의 말을 끊은 아르웬은 얼굴을 붉히며 내 등을 떠밀어 방에서 나가게 했다.

결국 사무관이 있는 방에서 나온 아르웬은 부끄러운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저기, 사무관님은 늘 저런 소리를 하시니까 저 분이 하시는 말은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분이신 것 같던데요."

"좋기는요. 제 아버지랑 똑같은 소리만 매일 늘어놓는데요. 그보다 루디 씨는 이제 가게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뇨. 들를 곳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아이린 양은 가게에 혼자 남아있는 건가요?"

"머리가 영특해 금방 글자와 계산을 배워 잠깐 혼자 가게를 보게 했습니다."

어제 했던 말 덕분인지 아이린은 내가 나갔다 온다고 해도 조금 아쉬워 할 뿐이었다. 그저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라고 앙증맞게 묻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어제 잡아 온 물고기들이 상자 안에서 헤엄치는 것을 웃으며 지켜 보고 있었으니 마냥 심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르웬 씨도 가끔씩은 가게에 찾아와 주십시오. 최근에 새로운 차가 들어왔으니 찾아오시면 대접하겠습니다."

내 말에 아르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르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런식의 대화는 이미 몇 번이나 한 어른이었다.

지난번에 관계를 맺었음에도 다시 초대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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