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260)

어제 가게를 봤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오늘 하루 아이린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아이린은 내 일을 돕겠다고 했지만 내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더니 시무룩한 채로 방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던 아이린을 데리러 온 것은 플로라였다.

지난번에 강가에 놀러갔을 때 아이린이 애들과 잘 어울린 이후로 자주 놀곤했다.

강이나 숲은 애들만 가는게 위험할 수도 있기에 플로라가 애들이 놀러가는 곳의 보호자로 따라가곤 했다.

일일이 따라가는게 귀찮지 않냐고 물었더니 귀여운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고 하며 웃어보인 플로라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저도 다녀올게요. 루디 씨."

배꼽인사를 하며 배시시 웃는 아이린과 오른손을 흔드는 플로라에게 잘 갔다 오라고 배웅해주었다. 아이린과 플로라가 떠나고 잠시 후, 나는 서랍에 넣어뒀던 성물을 품에 넣었다.

팻말을 '외출 중'으로 바꾸고 가게 문을 닫고 내가 찾아간 곳은 뒷골목에 있는 '도적 길드'였다. 가게 안에 들어가자 탁자에 앉아 있던 두어 명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 그들을 보고 피식 웃은 나는 안쪽 바에서 접시를 닦고있던 지부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길드 마스터랑 다시 한 번 연락하고 싶은데."

"들어가십시오."

지난번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기에 지부장은 굳이 나를 안내하지 않았다.

바닥의 판자를 뜯어내고 지하실로 내려가 지난번에 갔던 방에 들어가 수정구를 꺼냈다.

반짝이는 수정구의 회로를 다시 손보고 마나를 불어넣으니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정구에 델론즈의 얼굴이 비쳤다.

"후암...뭐야. 루디잖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귀찮은지 하품을 하며 입을 쩍 벌리는 델론즈에게 품에 넣어둔 성물을 꺼내 보여주니 갑자기 델론즈가 입을 콱 다물었다.

"......뭐야. 그거."

성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못하는 델론즈에게 물었다.

"고물상에서 주운 물건."

"어이, 농담하지 말라구. 대체 어느 고물상에서 성물을 취급하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내가 찾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거든?"

내 말에 델론즈가 어이없다는 듯이 조소했다.

"정말로 그걸 고물상에서 주웠다는 소리야?"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나도 이걸 처음 봤을 때는 내 눈을 의심했을 정도다. 여러 장물을 취급하는 델론즈는 단번에 이게 성물이란 것을 알아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적인 성물들은 대신전의 성기사단의 경비 아래 엄중히 보관된다.

평민들은 성물을 구경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제국에 있는 모든 성물을 통틀어도 열 개가 채 안 되는만큼 성물은 하나하나가 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신의 은총을 직접적으로 받은 물건. 몸에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노화가 늦춰지고,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이 바로 성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게 어느 대신전의 성물인지 알 수 있겠냐?"

십자가가 걸린 목걸이를 수정구에 가까이 갖다대자 델론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쉽지. 십자가가 걸린 목걸이. 크라타 공작가의 대신전에 있는 성물이야. '신뢰의 목걸이'라고 불리는 성물이지."

크라타 공작가라.

바스티안 백작가에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작가였다.

"이건 비밀인데, 며칠 전에 크라타 공작가의 대신전에 있던 성녀가 사라졌다고 하더군."

사라진 성녀와 고물상에 굴러다니는 성물이라.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역시, 교회 놈들은 변한게 하나도 없구만."

"속 시꺼먼 걸로 따지면 그놈들이 우리보다 더하지."

도적 길드 마스터라는 놈이 하는 소리였다.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델론즈와 함께 교회를 비웃었다.

어느 조직이든 윗대가리가 가장 썩은 법이었다. 그 점은 교회도 다를 바 없었다.

전에 모험가로 활동할 때, '비밀 의뢰'라는 것을 몇 번인가 받은적이 있었다.

의뢰를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 모험가는 자신이 들은 그 의뢰의 내용에 대해 함구해야 하는 의뢰를 비밀 의뢰라고 부른다.

그 때 받은 의뢰중 하나가 '성녀 암살'. 자신과는 다른 파벌의 성녀를 암살해 그쪽 파벌의 명예를 추락시키려는 의도였다.

돈은 썩어나는지 보수가 어지간한 영지 하나를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컸지만 후환이 두려워 의뢰를 수락하지는 않았다.

'아마 이번 일도 그런거겠지.'

오늘 하루만 사는 용병이나 모험가가 성녀를 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교회야 그런 치부를 숨기기 위해 사실을 은폐하려 들었을테고.

확실한 것은 분명 사라진 성녀와 이 성물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델론즈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게로 돌아왔다.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탁자 위로 올렸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십자가를 보며 불을 붙인 연초를 입에 물었다.

이미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놓은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선택 뿐이었다.

이 사건에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방관할 것인가.

사실 나는 교회와 아무런 연관도 없다. 내가 성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델론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른다.

굳이 이번 사건에 개입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내 평온한 일상을 깨뜨릴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인지 저울질했다.

성물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치있는 물건이지만, 내게는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번 일에 개입하는 것이 '재미'를 줄 수 있느냐.

내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며 '권태'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중요했다.

아이린과 함께 하며 많이 줄어들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과 몬스터들을 썰어대고, 박살내며 10년을 살아왔다. 그런 내가 갑자기 이런 평범한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니 필연적인 일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지나치게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에서 재키와 싸우러 갈 때,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속으로 즐거웠다.

오랜만에 쌓여 있던 파괴 욕구를 마음껏 쏟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되는 전투의 손맛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교회의 일에 깊숙히 관여하는 것은 역시 귀찮은 일에 엮일 가능성이 높았다. 저울이 관여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려 하는 순간, 반대쪽 추에 한 가지 존재가 올라갔다.

'성녀'

나쁘게 말하면 교회의 앞잡이. 좋게 말하면 민중의 구원자.

교회의 다른 사제들과는 달리 성녀는 '신'에게 선택받은 존재다.

교회의 늙은 윗대가리들이 유일하게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이 성녀였다.

성녀라는 존재는 신의 신탁을 통해서만 발탁되기에 이때까지의 성녀들은 올바른 신념과 인성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교회의 세부적인 일에 간섭할 수는 없지만, 성녀가 민중에게, 그리고 교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사제들에게는 상징적인 존재인만큼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성녀'라는 존재가 저울에 올라가자 균형이 비로소 맞춰졌다.

군침이 도는 패다. 성녀로 발탁될 정도의 인품이라면 빚을 한 번 지워두는 것만으로도 쓸 곳이 있겠지.

게다가 성녀는 '부활'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물론 수십 년 전에 죽은 인간에게 사용할 수 있는게 아닌,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이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지만 말이다.

부활 마법의 혜택을 본 사람은 몇 명 없다.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대상인, 독극물에 피살된 왕족 정도였다.

인과를 비트는 마법인만큼 실제로 사용된 사례는 몹시 적었다.

태우고 있던 연초의 재가 바닥에 떨어졌다. 빛이 사그라들고, 타는 냄새와 함께 완전히 잿더미가 된 잔재를 발로 밟았다.

"상황을 두고볼까."

성녀는 분명 바스티안 백작가의 신전 안에 있다.

모든 정보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 한 달 전쯤 의문의 도적들에게 습격당한 성녀. 크라타 공작가에서 바스티안 백작가의 거리는 대략 마차로 사흘 정도 걸린다.

습격을 당한 성녀가 마차까지 타며 요란하게 왔을리는 없을테니 분명 걸어서왔겠지. 도보로 대략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마침 신전이 저렇게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도 보름쯤 전이었다.

틀림없이 성녀는 신전 안에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것인지였다. 단순히 내가 가진 성물만을 주고 빠질 것인가. 조금 더 깊숙히 관여해서 더 큰 빚을 지울 것이냐.

'원래라면 성물 정도로만 해도 충분하겠지만.'

만약 신전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잃어버린 성물을 갖다주는 것만으로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빚을 지워 두려는 상대는 성녀였다.

당장 목숨이 날아가기 직전인 성녀에게 성물을 갖다준다 하더라도 빚이라고 생각할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성물을 받은 성녀가 죽어버렸다가는 내가 지운 빚을 돌려받을 상대가 사라져 버린다.

빚을 지울 것이라면 확실하게.

절대 갚지 못할 거대한 빚으로 상대에게 목줄로 채운다.

"...재밌겠네."

앨리스의 경우와는 다르다. 재미도 없는 귀족 가문의 싸움에 끼어드는게 아니라, 내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용병과 모험가 놈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문득 재키가 떠올랐다. 놈은 나와 동류였다. 끝없이 전투를 추구하고, 전투에서 느껴지는 희열을 밑바탕으로 살아가는 부류였다.

발할라라.

나도 그런 곳에 갈 수 있을까.

그런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모두 태운 연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결국에는 연초가 치지직 거리며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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