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신이라는 작자는 저 성녀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저런 예언까지 해주고 말이야.
"유감이지만 저는 딱히 구원자도 뭣도 아닙니다. 그냥 호기심으로 찾아온 밤손님일 뿐이죠."
"알고 있어요. 그분께서도 당신을 설득하는것은 오로지 제 역량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이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저를 어떻게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품에서 꺼낸 연초를 태우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신전 안에서 연초를 태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쓸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지독한 연초의 향을 음미하던 도중 성녀가 눈을 떴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가진게 아무것도 없어요. 어릴때부터 신전 안에서 생활하며 성녀로서의 교육만을 받아 당신을 설득할 방법도 잘 모르겠고요.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듣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드릴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그녀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어설픈 거짓말로 나를 속이려 했다면 나는 몹시 실망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말하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만 봐도 성녀의 인품을 알 수 있었다.
성녀라고 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추종받아 왔을텐데도 자존심을 굽히며 도움을 청하고, 허황된 소리나 한순간의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성녀님이 전처럼 성녀의 지위를 되찾게되면 나중에 제가 부탁할 때 단 한 번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정말 그 정도로 충분한가요?"
성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성녀라는 지위의 영향력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아, 하지만 아마 제가 부탁할 일은 당신이 믿는 신의 교리나 당신의 신념에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녀에게 힘을 빌릴 때는 아이린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족을 배척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교회의 입장에서 아이린을 도와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알겠어요. 제 성녀로서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릴게요. 대신, 당신도 한 가지를 약속해주세요."
"어떤 걸 말씀이십니까?"
"이 신전에 있는 사제님들도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크라타 대신전에서 도망쳐온 것은 저 뿐이니 이 곳의 사제분들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요. 설령 제가 죽더라도 이곳의 사제분들만큼은 꼭 지켜주세요. 그리고... 무리가 가지 않는다면 적들을 생포해주실 수 있을까요?"
성녀답다고 할까, 무척이나 자기희생적인 말이었다.
적에게 마저 자비를 베푸는 마음가짐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여러가지 의미로 말이다.
바보 같이 착해빠진 소리였다. 만약 내가 모험가로 활동할 때 파티에 저런 소리를 하는 놈이 있었다면 당장 면상을 걷어찼으리라.
성녀의 인품은 신이 보증한다고 하던데,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를 부르실 때는 루디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계속 나를 당신이라 부르던 성녀에게 이름을 알려주니 성녀는 몇 번인가 중얼거리며 내 이름을 곱씹었다.
"루디...알았어요. 루디 씨. 제 이름은 마리안이에요.
"알겠습니다. 마리안 성녀님. 그럼,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복도를 걸어 나가는 것도 귀찮아 방의 창문을 살짝 열고 창틀에 발을 얹었다. 뛰어내리기 직전 마리안이 나를 막아세웠다.
"잠깐만요! 교단의 성기사단은 강해요. 차라리 당신도 이 신전에서 지내면서 경비를 하는게..."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성녀님 파벌의 성기사단이 구하러 올거란 말씀이십니까?"
마리안의 말을 자르며 그렇게 말하자 마리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하긴, 마리안은 오늘 나를 처음 알았으니 이럴 수 있었다.
만약 델론즈가 이 광경을 봤다면 박장대소하며 마리안에게 '아가씨, 누가 누굴 걱정하는거야?'라고 비웃었겠지.
"걱정마십시오. 마리안 성녀님. 당신이 모르는게 두 가지 있으니까요."
"모르는 것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말을 흐렸다. 마리안의 두 시선은 내게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 자랑할만한 과거는 아닌데, 그래도 저렇게 궁금해하니 말해주는게 맞겠지.
"한 때 이런놈들 찾아서 조지는게 제 일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대로 창틀을 내딛고 뛰어내렸다.
현상금 사냥꾼. 신입 모험가들은 물론 닳을대로 닳은 용병들도 질색하는 일이었다.
대개 인생의 밑바닥을 구를대로 구른 놈들만이 이런 일을 받았다.
대형 상단과 정부에서 막대한 현상금을 걸어놓은 범죄자들, 혹은 범죄 조직의 보스의 목을 따거나 생포해 오는 일이었다.
마탑에서 뛰쳐나왔을 때,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고, 제대로 된 장비를 맞추려면 돈이 필요했기에 현상금 사냥꾼 일에 뛰어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에 대한 자비와 애정은 마탑에서 빌어먹을 할망구한테 마법을 배우며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였고, 살인에 대한 거부감도 한참 전에 사라졌기에 한동안 현상금 사냥꾼 일로 돈을 잔뜩 벌어들였다.
생각해보면 그 때 범죄자 놈들 싹을 말려 버리는 바람에 몇 년 동안은 제대로 된 범죄조직은 생기지도 못했다. 끽해야 델론즈의 도적 길드 정도일까.
딱히 그 일을 하면서 별 일이 있지는 않았다.
혜성처럼 나타난 루키였던 내게 적당히 하라고 경고했던 인간들은 대부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거물을 잡아 한 탕 해보려 하다가 그날 이후로 길드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이었다.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하는 놈은 두 부류였다.
실력이 좋은데 인성이 파탄난 놈이거나, 실력도 후진데 인성까지 파탄난 놈이거나.
운 좋게도 나는 전자에 속했다.
어린 놈들한테 마약을 중독시키고는 비싼 값에 팔아치워 재산을 모으던 마약 밀수업자, 영주의 눈을 피해 산적짓을 하는 도적 놈들, 갓난아기를 흑마술의 제물로 사용하던 미친 흑마법사.
그런 놈들이 내 주요'고객'에 속했다.
내가 할 일은 고객의 머리를 깔끔하게 포장해 길드에 갖다주는 일이었고, 길드는 그 대가로 어지간한 용병들의 몇 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했다.
제대로 모험가로 활동하게 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현상금 사냥꾼 일로 막대한 부를 비축한 다음에는 온 대륙을 누비면서 돌아다녔다.
내가 사람을 보고 분석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현상금 사냥꾼 일과 여행을 하면서였다.
손짓 하나, 얼굴 표정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를 알 수 있었다.
도시 안에 들어와 있을 성기사단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옛날에 했던 일을 하려니 향수가 느껴졌다.
모처럼 받은 의뢰니 똑바로 해야겠지.
성물을 처리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몸에 마나를 휘감아 육체를 강화시켰다. 흘러넘치는 마나가 감각을 증폭시켰다. 수백 미터 밖의 물건이 또렷하게 보이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들려왔다.
"...작전은... 실행..."
"강행......사살....도주."
"증거......"
조금 떨어진 거리의 뒷골목에서 남자 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겠지.
오늘쯤에 행동에 나설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여유부리지 않고 바로 마리안을 찾아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목표인 성녀를 놓쳤는데 반대 파벌이 미쳤다고 손 놓고 보고 있겠는가.
곧바로 성녀를 암살한 성기사들을 파견했을텐데, 성녀가 이곳에 온지 보름이나 됐는데 아무 일도 없을리가 없지.
"운이 좋단 말이지."
소리가 들려오는 거리의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네 명의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뒷골목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의심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뭐야, 취객인가?"
"우리 대화를 엿들은건 아니겠지?"
"이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험한 꼴 보기 싫으면...크억!"
앞으로 걸어나오며 내게 경고하는 놈의 배를 걷어찼다. 사내새끼가 뭔 놈의 혓바닥이 그리 길어.
"이 새끼가!"
"케르디 파벌의 놈이다! 죽여!"
곧바로 화를 내며 달려드는 놈들의 로브 안에 받쳐 입고 있는 갑옷이 드러났다.
일반적인 갑옷과 달리 성기사단 고유의 순백의 갑옷이었다.
성기사도 성녀처럼 인품 보고 뽑으면 좀 좋아.
방금 전에 내게 걷어차인 놈이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 놈의 팔을 왼손으로 잡고 놈의 턱을 주먹으로 갈겼다.
깔끔한 어퍼컷이었다.
"너희는 운 좋은 줄 알아라. 원래는 네 놈 다 목을 베어야겠지만, 성녀님의 부탁도 있고 하니 모두 숨은 붙여놔주마."굳이 무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마나로 강화된 주먹을 휘두르기만 해도 놈들의 뼈가 부러지거나 갑옷이 우그러들었다.
달려드는놈의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낸 다음 무릎을 걷어찼다.
무릎을 덮고 있던 강철이 우그러들자 놈의 입에서 고통이 터져나왔다. 놈의 주먹을 받아내고 있던 왼손에 힘을 줘서 뼈를 완전히 박살냈다.
끔찍한 비명이 뒷골목에 울려퍼졌다.
"걱정할 거 없어. 혹시 몰라 방음마법까지 쳐 뒀거든. 그러니까 안심하고 비명 질러도 돼.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또 어딨냐."
예전에 했던 짓을 하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옛날 성격이 튀어나왔다. 지금이야 나이를 먹고 늘 진중하고 묵직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젊을 때의 나는 이런 놈이었다.
사람을 웃으며 패는, 그런 미친놈 말이다.
첫 번째 놈이 완전히 다운되자 이번에는 두 놈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이 놈들은 방금 전 놈이 그대로 뻗은 것을 보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여차하면 나를 죽이겠다는 생각이겠지.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살의에 몸이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