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60)

놈은 양쪽에서 나를 노리며 거의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각각 내 왼팔과 오른다리를 노리며 휘어지는 검의 궤적을 본 나는 몸을 던져 왼쪽으로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팔을 노리는 검의 궤적을 피한 다음 빈틈을 보인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커억...!"

목뼈를 으스러뜨릴 듯이 강하게 움켜쥐자 놈이 꺽꺽대며 내 팔을 양손으로 잡고 어떻게든 떨쳐내려 했지만 내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입에 거품을 물며 기절한 놈이 바닥에 떨어뜨린 검을 줍고 옆에 쓰러져 있던 놈 위에 던졌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나란히 쓰레기처럼 늘어진 놈들을 뒤로 한 채 여전히 검을 들고 내 빈틈을 엿보는 놈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놈에게서 빼앗은 검을 들었다. 성기사들이 쓰는 검답게 마법들이 부여되어 있었다.

경량화 마법에 절삭 마법, 신성 마법까지. 성기사들 중에서도 꽤나 실력을 인정받은 놈인지 고급 마법 여러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검을 한 손으로 쥐고는 가볍게 휘둘렀다. 내 검의 궤적을 읽은 녀석도 검을 휘둘러 맞받아치려 했지만 내 검과 녀석의 검이 맞닿는 순간 나는 검에 마나를 강하게 불어넣었다.

마나를 받아들인 검이 푸른 색으로 찬란한 빛을 뿜어내자 상대도 황급히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마나의 양이 터무니 없이 차이났다.

간신히 희미하게 빛을 머금을 정도로 마나가 부여된 검은 내가 검을 한 번 더 맞부딪치자 산산조각나며 깨져버렸다.

망연자실한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는 괴물보듯이 나를 쳐다보는 놈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크헉!"

이걸로 당분간은 못 움직이겠지.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이 어디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진작에 도망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세 놈을 적당히 구석에 밀어놓은 다음 다시 감각을 증폭시켰다.

헐레벌떡 뛰며 쉬는 거친 숨소리, 다급한 발소리.

놈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쭉 가면 홍등가가 나온다. 젠장. 귀찮게 하는구만.

놈이 홍등가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이 복잡해진다. 홍등가는 다른 거리와 달리 지금이 한창 활발할 때니까. 그런 곳에서 놈과 추격전을 벌였다가는 이목이 쏠릴 터였다.

게다가 홍등가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일은 더욱 귀찮아진다. 아무리 감각을 증폭시켰다고 한들 소란스러운 홍등가에서 기척을 숨긴 놈을 찾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

이대로 달려가서는 놈이 홍등가에 진입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강화한 몸으로 건물 벽면을 타고 올라갔다. 건물 옥상을 밟고, 옆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넘었다.

건물 간의 거리가 꽤나 멀었지만 아슬아슬하게 건물 옥상을 뛰어다니며 홍등가를 향했다.

결국 놈이 홍등가가 있는 거리의 뒷골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낚아챌 수 있었다. 거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놈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홍등가 입구에 서 있던 몇몇 놈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홍등가에서는 일상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일이었다.

놈을 끌고 거리 구석으로 빠져 나왔다. 어떻게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그런 놈의 옆구리를 한 번 걷어차니 금세 잠잠해졌다.

놈을 질질 끌고 방금 전의 뒷골목으로 돌아왔다. 반쯤 죽여놓은 놈들은 사이좋게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유일하게 정신이 들어 있는 마지막으로 잡아온 놈의 머리를 한 번 후려쳤다.

"크윽!"

"이제 상황파악도 대충 됐을거고, 빠르고, 정확하게 가자고. 성녀를 죽이러 온 놈들 맞지? 여기 네 명이 전부냐?"

"...큭큭..."

실성이라도 한 것인지 놈은 대답하지 않고 웃어대더니 내 발치에 침을 뱉었다. 흠. 매가 부족했나.

생각해보면 다른 놈들은 기절할 때까지 후드려 팼는데 이놈만이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확실히 차별대우는 좋지 않지.

나는 침을 뱉은 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바닥에 내려찍었다. 놈의 얼굴이 바닥의 벽돌에 짓뭉개지듯이 쳐박혔다.

빡. 빡. 빡. 세 번 정도 바닥에 얼굴을 쳐박았더니 놈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바닥의 벽돌도 으스러져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자, 다시 한 번 묻지. 여기 있는 네 명이 전부냐?"

내 말에 놈의 입이 움찔거렸다. 뭐라고 웅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얼굴이 뭉개지며 턱도 박살났는지 제대로 된 단어를 내뱉지 못했다.

"젠장. 귀찮네."

결국 그런 놈을 걷어차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마법을 사용해 기절해 있던 놈들에게 물을 들이부었다. 허공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놈들의 얼굴을 적시자 그제서야 쿨럭거리며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놈들은 옆에 얼굴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뭉개져 있는 동료를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너네가 아는 걸 전부 다 말해라. 옆에 있는 놈 꼴 나기 싫으면."

놈들은 서로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말은 하고 싶지만, 먼저 말하기에는 눈치 보이는 것일까.

성녀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자비로운 나였기에 나는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등을 조금 밀어주기로 했다. 허리 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제일 왼쪽에 서 있던 놈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심장에 빗나가게 맞췄기 때문에 당장 죽지는 않는다. 조금 있다가 치유 마법을 걸어주면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지.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드나?"

""말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놈들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놈들에게 들은 정보는 이랬다. 자신들은 성기사단 중에서도 말단이며, 성녀의 흔적을 쫓아온 정찰대에 지나지 않는다.

바스티안 영지를 조사해본 결과, 성녀는 신전 안에 있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고 판단.

자신들의 파벌에 증원을 요청했고, 곧 다른 성기사들이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 놈들이 찾아오는 시간은?"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구체적인 연락 내용은 대장만이 알고 있는데..."

말을 흐리며 바닥에 엎어져 있는 놈을 쳐다봤다. 방금 전에 내게 얼굴이 완전히 뭉개진 놈이었다. 이 놈이 대장이었나. 방금 전 놈의 태도로 봤을 때 쉽사리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진득하게 고문을 하려고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이걸 써야 하나. 고작해야 이깟 놈한테 쓰기에는 너무 비싼 재료들로 만든 약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품에서 하급 포션을 꺼내 놈의 뭉개진 얼굴에 부렸다. 포션이 스며들며 어긋난 턱과 박살난 광대가 천천히 복구되기 시작했다.

포션 네 병을 붓고 나서야 간신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 부은 포션병들을 옆으로 치워놓고 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유리 병에 담겨 있는 액체는 방금 전의 포션과 달리 검붉은 핏빛을 띠고 있었다.

고작해야 한 모금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양이었기에 조심스레 놈의 입을 벌려 천천히 흘려넣었다.

포션의 효과 덕분인지 정신을 차린 놈이 눈을 떴다.

"크으윽...여긴..."

"네 부하들한테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네가 대장이라며?"

"이놈들......."

그는 눈을 찌푸리며 내 뒤에 서 있는 두 명을 노려보았다. 아, 그리고보니 칼 맞은 놈한테 치유 마법을 아직 안 걸어줬군. 하마터면 사람 하나 잡을 뻔했네.

가슴팍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기사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피를 멎게한 다음 다시 대장에게 돌아왔다.

"크흐. 아무리 나를 협박해도 소용없다. 곧 있으면 도착할 기사들이 네놈의 목숨도 거두어 갈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다시 한 번 묻지. 이 영지에 찾아온 사람은 네 명이 전부냐?"

내 물음에 그는 어이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그런 말에 대답해줄 것 같......"

그렇게 말하던 놈의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걸걸한 목소리로 나를 비웃고 있던 놈의 입꼬리가 내려가고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흐릿해진 초점이 허공을 응시하고 입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영지에 찾아온 인원은 이곳에 있는 네 명이 전부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또박또박 대답하는 대장에게 뒤에 있는 두 기사가 놀라워하는게 느껴졌다.

자백제. 다만 평범한 자백제가 아니라 최면 마법과 정신 파괴 마법을 동시에 부여한 강력한 자백제였다.

저 한 모금을 만드는데 들어간 돈만 해도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이었다.

처음에는 정신 계열 마법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사제에게 받은 축복 때문인지 마법 저항력이 쓸데없이 좋았다.

"증원은 언제쯤 출발했지?"

"방금 전에 포트리아 영지에 도착했고, 내일 밤 몰래 영지 안에 잠입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포트리아라면 바스티안 백작가와 가장 가까운 남작가의 영지였다.

일반인도 걸어서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의 거리니 숙련된 성기사들이라면 몇 시간만에 넘어올 수 있겠지.

"기사들의 수는?"

"제3 성기사단의 전원입니다. 기사단장을 제외하고 스무 명의 성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기사단장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요즘엔 개나 소나 소드마스터지. 그것보다 스무 명인가."

그 정도 인원이라면 잠입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준비한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아무리 조용히 처리하려고 해도 신전에서 칼부림을 하면 당연히 이야기가 새어나갈 수 밖에 없을텐데 그 말은 바스티안 백작가와의 전쟁도 염두해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죽일 가치가 있다는거겠지.'

오히려 내게는 호재였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 나중에 사용할 내 '패'가 그만큼 가치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바스티안 백작가의 신전에는 성기사가 한 명도 없다. 신전은 사람들에게 '성역'과도 같기 때문에 이런 습격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번에 잠입하는 기사단의 인원중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신전 안에서는 대학살극이 일어나겠지.

허나 그렇다고 성녀 곁에 달라붙어 호위만 하는 것 역시 악수(惡手)다.

성기사단이 언제까지 영지에 머무를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놈들이 영지 내에서 사고를 쳤다간 일이 커지게 된다.

결국 놈들이 영지로 잠입하기 전에 모두 잡아내야했다.

"간단해서 좋구만."

결국 한 놈도 놓치지 않고 싹 다 잡으면 될 일이다. 예전에 도적놈들을 산에서 끝까지 추격해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목을 베었던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그마치 소드마스터께서도 오신다고 하니 손맛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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