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60)

적어도 이런 허접한 놈들처럼 금방 나자빠지지는 않겠지.

그것말고도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나는 놈들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절시킨 다음 모두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신전의 정원에 몰래 새겨놨던 마법진과 이어지는 텔레포트 마법을 발동시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밧줄로 묶어 놓은 놈들과 나는 신전의 정원에 있었다.

마침 정원에는 잠에 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성녀도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한 번 놀라고, 내 뒤에 쓰러져 있는 밧줄로 묶여 있는 이들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이 사람들은..."

"적대 파벌의 정찰병입니다. 정보를 캐내봤는데 성기사단 전체가 이곳으로 온다고 하더군요."

방금 전 알아낸 정보들을 마리안에게 알려주자 마리안은 더욱 침울해졌다.

"결국 제가 죽어야만 끝나는 걸까요..."

마리안의 중얼거림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당신이 죽어야만 끝나는게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가 멸종되야 끝나는 겁니다. 당신이 죽는다면 또 다른 성녀가 그 자리를 채우겠죠. 이번과 같은 일은 반복될테고요."

다소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마리안은 이해했는지 수긍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마리안이었지만 지금 그녀를 부드럽게 달래줄 시간은 없었다.

"이들을 가둬둘 곳은 있습니까?"

"신전 뒤의 안 쓰는 창고가 있다고 들었어요. 며칠 정도는 몰래 가둬놔도 모를거에요."

"그럼 잠시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놈들을 묶어놓은 밧줄을 질질끌며 신전 뒤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창고 안의 기둥에 놈들의 손목을 묶어두었다.

방금 전 내게 칼을 맞었던 놈의 가슴팍에도 포션 두 병을 흘려주니 상처가 완전히 멎었다.

창고 문을 닫고 나오니 마리안이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제게 다른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루디 씨가 목숨을 걸고 이렇게 노력해주시는데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원래는 성기사단장에게만 허락되는 축복의 가호지만... 지금 그들은 제 적이니 루디 씨에게 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마리안은 영창을 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마리안의 몸을 빛냈다.

다음 순간, 마리안에 발꿈치를 들어올려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내 이마에 닿는 순간 온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분명 지금 마나로 육체를 강화한 것도 아닌데 주먹을 휘두르면 벽을 부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녀의 축복이 일반 사제와는 궤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상상 이상이었다.

마리안은 이마에 입맞춘 것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오겠습니다."

"몸 조심하세요."

마리안이 손을 흔들어주며 배웅하는 것을 뒤로한 채 신전을 빠져나왔다. 오늘 밤까지는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은 가게를 열어놓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다른 작업을 했다. 창고에 넣어뒀던 강철 와이어를 사용하기 좋은 길이로 잘랐다.

뿐만 아니라 손 한 뼘 길이의 단검들도 몇 개를 잘 닦아놓았다.

서늘한 날에 내 얼굴이 선명하게 비치는 것을 확인하고는 옆으로 치웠다.

아이린은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런걸 챙기시는거에요?"

"이제 나한테는 필요없는 물건이라, 다른 사람에게 선물해주려고 그런단다."

딱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검을 몸으로 받아낼 사람들은 내가 아닌 성기사단이었으니까.

그렇게 낮이 지나고 밤이 되자 장부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린을 먼저 방에 들어가 자게하고는 낮에 챙겨둔 무기들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평소에 사용하는 가죽주머니가 아닌 '아공간 주머니'였다. 날카로운 칼과 와이어를 그냥 가죽 주머니에 넣을 수는 없었기에 창고에 있던 것을 꺼냈다.

준비를 끝내고는 가게를 나와 마법을 발동시켰다.

"비열한 뱀은 당신의 눈을 사로 잡으니, 다른 그 무엇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는다."

기사단이 넘어오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기에 조금 일찍 나와서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거리를 지나 동쪽 성문으로 향했다. 포트리아 영지와 이어진 길은 동쪽 숲 옆의 대로 밖에 없었다. 바스티안 백작가의 유일하게 다른 영지와 이어진 길이 동쪽이었다.

다른 방향은 산맥이 가로 막고 있거나 끝을 알 수 없는 숲으로 덮혀 있었다. 때문에 그런 숲 속에 대한 괴담도 꽤나 많이 떠돌아 다녔다.

숲을 여행하던 모험가가 거대한 저택의 환각을 봤다거나, 길을 잃어 헤매고 있다가 어린아이를 만나 숲 밖까지 안내를 받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아이가 사라져 있었다는 부류의 괴담이었다.

어느 쪽이든 실제로 확인된 것은 없었기에 단순한 괴담에 불과했다.

동쪽 문에는 다른 문들과 달리 성벽 아래에서 경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이 따로 있었다.

포트리아 영지를 지나 바스티안 백작가로 들어오는 상단이나 여행객들의 신분 확인을 위해 있는 병사들이었다.

물론 매일 보던 상단과 사람들이었기에 간단한 신분 확인만을 하고 통과시켰다.

저녁이 늦은 시간이 되자 병사들도 근무가 끝났는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벽 위에 세워진 횃불들 사이로 병사들이 간간히 순찰을 돌았다.

그들의 곁을 지나 성벽에서 뛰어내려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성녀의 축복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웠다.

성벽에서 대로까지는 뛰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양 옆으로 숲이 무성한 대로는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손가락으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을 다 그리자 옅은 황토빛으로 빛난 마법진에서 흙덩어리 몇 개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냥 흙덩어리가 아닌 눈과 입이 달려 있는 흙의 정령인 노움이었다.

비록 하급 정령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검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는 귀여운 노움들에게 마나로 내 의사를 전달하자 정령들은 땅을 파서 얕은 구덩이를 파 놓기 시작했다.

늦은 밤에 대로를 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기사단이라면 발 밑을 의식하며 걸을리가 없다.

노움들이 땅을 파 놓는 동안 나는 대로의 너비를 계산하고는 와이어를 잘라 대로 왼쪽의 나무와 대로 오른쪽의 나무 사이에 걸어놓았다.

한 번이 아니라 각각 높이가 다른 와이어를 여러개 나무에 묶어 설치해두었다.

묵빛을 띠는 강철 와이어는 어지간히 밤눈이 좋지 않고서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대충 판을 만들어 놓은 나는 숲 속에서 몸을 숨긴 채 기사단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기사단이 도착한 것은 두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연초를 다섯 대 정도 태우고 있으니 그제서야 기사단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의 그놈들과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로브가 휘날리며 보이는 안쪽에는 흰색 중장갑을 갖춰 입고 있었다.

사제의 축복을 둘렀는지 무척 빠른 속도로 달려가던 기사단에게 이변이 생긴 것은 노움이 파 놓은 구덩이에 기사들이 빠진 것 부터였다.

"으악!"

"크윽!"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야밤이었다. 그나마 축복과 마나를 몸에 둘러 간신히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보니 발 밑에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기사단이 일순 정지했다. 가장 앞장 서서 뛰어가던 기사가 손을 들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동안 나는 조용히 숲에서 빠져 나가 기사단의 뒤를 잡았다.

구덩이에 빠진 기사들이 빠져나오는 것을 돕고, 인원 수를 파악하려는 순간 제일 후미에 있던 기사 두 명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투구를 뒤집어 쓰지는 않았기에 수도만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갑옷을 입은 두 명이 쓰러지는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기사단원들이 뒤를 돌아 나를 응시했다.

"습격이다!"

한 기사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 위치한 열 명 남짓의 기사들은 나를 무시하고 바스티안 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는 걸 보아하니 습격을 받았을 때 이렇게 하기로 약속된 모양이었다.

"쳐라!"

내 앞에 남은 기사들은 나를 향해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훈련을 잘 받았다고 생각한다.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도, 판단도 수준급이었다. 박수를 쳐 줘도 될 정도로 괜찮은 기사들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메뉴얼'적이다.

저 뒤편에서 나를 무시하고 영지로 향하던 기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크윽!"

"으아악!"

강철 와이어를 몇 겹으로 쳐 두었다.

가뜩이나 나를 피해 도망가며 빠르게 달려갔는데, 그 상태로 강화 마법까지 부여된 강철 와이어에 몸이 부딪치는 순간 이미 끝났다.

몸이 두 동강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이 몇 토막으로 분리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할 수 밖에 없는 함정이었다.

중장갑을 입은 채로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데 몸을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분명 뒤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동료들의 비명이 들려오자 눈 앞의 기사들은 초조한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내게 다가왔다.

밤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죽어라! 이놈!"

"적은 한 명 밖에 없다! 두려워 하지말고 싸워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앞의 기사들은 전력 이탈이라 봐도 무방했다. 조금 있으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비열한 뱀은 당신의 눈을 사로잡고, 눈을 감고, 눈을 빼앗는다."

영창이 끝나는 순간 내 기척이 완전히 지워졌다.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어뒀던 단검을 꺼내 옆에 있던 기사에게 접근했다.

나름 실력은 있는지 가까이 접근하자 마나를 이용해 내 기척을 감지하고는 몸을 돌려 반응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단검이 기사의 발목을 그었다. 마나를 불어넣은 단검은 쉽게 접히는 관절부의 갑옷 정도는 쉽게 썰어냈다. 갑옷이 우그러들며 기사의 힘줄이 끊어졌다.

허물어지는 기사의 몸을 본 동료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