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260)

"성녀님이 먼저 저한테 루디 씨를 아냐고 물었거든요. 그래서 안다고 했더니 혹시 루디 씨가 어디 계신지 알 수 있겠냐고 하시길래 가게 위치를 알려드렸어요."

"도대체... 성녀가 홀몸도 아니고 호위까지 데리고 제 가게를 찾아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게 뻔하잖습니까. 차라리 제가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앨리스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리안과 관련된 일로 처리할 서류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최근 영지에 활기가 넘쳐서 그런지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올바른 귀족으로서의 귀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는 성녀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마을 시장에 나가도 성녀에 이야기. 포션을 사러 온 모험가들도 성녀 이야기. 심지어는 아이린을 데리러 온 플로라조차도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댔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성녀의 인품에 대한 칭찬이었다.

빈민가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고아와 빈민들을 구원했고, 부모님 없이 쓸쓸하게 지내고 있던 아이들을 보육원에서 직접 돌봤다.

뿐만 아니라 무상으로 환자나 병자를 치료 하는 등의 선행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닌 일부의 이야기는 성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늘 새하얀 백색 로브를 입고 있어 제대로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잘록한 허리와 순산형의 엉덩이, 그리고 귀여운 외모까지.

모험가들 중에는 별로 다치지 않았는데도 성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신전을 찾아가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까지 들려오자 나도 슬슬 신전에 찾아가볼까 싶었다. 처음에는 아이린도 데려가려 했지만 신전 안에 아이린을 데려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결국은 홀로 가게를 보게 했다.

대신 돌아올 때 맛있는 간식을 사오겠다고 약속하고는 신전까지 걸어갔다. 거리의 사람들은 전보다 활기차고 즐거워 보였다. 이것도 성녀의 영향일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신전의 문은 전보다 더욱 크게 개축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던 정원에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단이 나를 제지했지만 1급 시민증을 보여주니 곧바로 길을 비켰다.

정원을 지나 신전 안쪽 건물로 들어가니 입구에 서 있던 사제가 내게 다가왔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고보니 성녀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생각을 안했군. 전과는 달리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내고 있을텐데.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 있자 나를 보는 사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의심받고 있는건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싶어 머리를 긁적이던 도중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디 씨?"

양 옆에 성기사를 대동한 채 방에서 나온 마리안은 곧바로 내게 다가오고는 양 손을 잡았다.

"드디어 찾아오셨군요! 앨리스 양에게 전해듣고 찾아오는걸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구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내 앞에 있던 사제는 내가 성녀와 아는 사이라는게 놀라웠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과 아는 사이셨군요... 무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내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자 사제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럼 루디 씨, 제 방에 가서 차라도 한 잔해요. 지난번에 말했던대로 교회에 부탁해서 상등품의 찻잎을 받았거든요!"

앞장서서 걸어가는 마리안의 뒤를 따르는 성기사들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무시할 줄 알았는데 성녀의 손님이라 그런지 예를 갖췄다.

마리안의 뒤를 따라 지난번에 한 번 찾아왔던 그 방에 도착했다. 마리안은 방에 도착하자 성기사들을 물렸다.

"이 분은 제 손님이에요.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성기사들은 마리안의 말에 반발하지 않고 몸을 돌려 문 앞에 올곧게 섰다. 마리안은 내가 방에 들어오자 문을 닫고는 배시시 웃었다.

"후후, 저도 조금 거추장스럽지만 당분간은 어쩔 수 없어요. 아직 파벌 싸움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거든요."

이미 한 번 실패한 이상 반대 파벌이 다시 습격을 감행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궁지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마리안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내렸다. 좋은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마리안이 말했던대로 좋은 찻잎을 쓴 것 같다.

"향이 무척 좋군요."

"물론이죠. 오늘을 위해서 제가 교회에 얼마나...가 아니라. 교회에서 좋은 차를 보내줬더라고요. 호호."

중간까지 본심이 튀어나왔다가 황급히 말을 주워담는 마리안이었다.

마리안은 조심스레 찻주전자를 기울여 잔에 차를 담았다.

그녀가 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 동작 하나하나가 무척 우아하게 보였다.

마리안은 자신과 내 잔에 차를 가득 채웠다.

차를 권하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차를 입에 머금었다.

차를 한 입 마시는 순간 따스한 온기가 입 안에 가득 스며들었다. 고작 한 모금 하셨을 뿐인데 온 몸의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차가 아니었다. 보물이라 불러도 모자랄 명차(名茶)였다.

"...대체 이런 차를 어디에서 구하신겁니까?"

멈추지 않고 차를 홀짝거리며 묻자 마리안은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새 텅 빈 내 잔을 또다시 가득채워주었다.

"저희 교회에서 특별히 재배한 차에요. 본래는 황궁이나 공작가에만 가끔씩 들어가는 차인데 제가 추기경님께 졸라서 받아냈어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은 꼭 칭찬해주기를 바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역시 귀엽단 말이지.

"이렇게 귀한 차를 제가 대접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차를 대접하겠다는 말은 적당히 한 말인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이 정도로 좋은 차를 대접받을 줄은 몰랐다.

"루디 씨는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걸요. 사실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도 몇 개 있어서 제대로 된 보상을 해드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는 마리안이었다.

아마 그 일들 중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물'도 해당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신뢰의 목걸이는 마리안이 들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려 골동품점까지 굴러들어간 것 같았다.

성녀인 마리안에게 이 성물이 가지는 의미는 특히나 각별하겠지.

"그건 그렇고, 보육원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잘 되어가십니까?"

"네. 크라타 공작가의 신전에서도 이런 일을 자주하곤 했었거든요. 사제 분들과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면 마음이 치유되요."

그렇게 말하는 마리안은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확실히 나도 아이린을 돌보며 마음의 안식을 얻고 있으니 비슷한 감각인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앨리스 양에게 루디 씨도 맡아서 키우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다음에는 그 아이도 데리고 오시는게 어때요?"

"...아이린을 말씀하시는거군요."

"맞아요! 아이린! 앨리스 양이 말하긴 아직 어린데도 어찌나 예쁜지 인형같은 아이라고 하더라고요!"

성녀가 서큐버스를 보고 싶어하는 날이 올 줄이야. 세계 멸망도 얼마 멀지 않았군.

"죄송하지만 그 아이는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같이 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정중한 거절에 마리안이 조금 시무룩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나중에 생각이 바뀐다면 데려와주세요. 꼭 보고 싶으니까요."

"물어는 보겠습니다."

아이린이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리안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보다 앨리스는 아이린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리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건지.

나중에 다시 한 번 진득하게 교육을 시켜줘야할 것 같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앗...벌써 가시게요?"

신난 강아지처럼 떠들어대던 마리안은 돌아가겠다는 내 말에 금세 비를 쫄딱 맞은 생쥐같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사절이었기에 무시하려 했지만 계속되는 시선 공세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럼 간단하게 신전 구경이라도 시켜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방긋방긋 웃는 마리안을 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곤란한 성녀님이었다.

마리안의 방에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 두 명이 다시 성녀의 뒤에 섰다. 마리안은 내 팔을 끌어안으며 성기사들에게 지시했다.

"루디 씨한테 신전 내부를 안내해드릴테니 조금 거리를 두고 뒤에서 따라와주세요."

성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리안은 여전히 내 팔을 자신의 가슴골 사이에 끼운 채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리안의 가슴은 앨리스만큼 크진 않아도 일반인 기준으로는 충분히 큰 편이었다.

가슴골 사이에 끼인 팔에서는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슬쩍 쳐다보니 역시나 마리안의 뺨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 그럼 이쪽부터에요!"

부끄러워하면서도 결코 내 팔을 계곡 사이에서 빼지는 않는 마리안이었다.

마리안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고해성사를 하는 참회관, 주교의 연설을 하거나 예배를 드리는 기도관 등을 둘러봤다.

애초에 나는 무신론자라 별 관심은 없었지만 마리안이 워낙 즐거워하며 다니길래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이미 내 관심은 마리안의 가슴골 사이에 끼여있는 내 팔의 감각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부드러운 가슴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며 내 팔에 닿고 있었다.

마리안이 입고 있는 로브는 새하얀 색이라 내 쪽에서 보면 아슬아슬하게 속옷이 비쳤다. 그러던 도중 마리안이 고개를 돌리다가 자신의 가슴골을 보고 있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마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릴 뿐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더욱 좁히며 찰싹 달라붙었다.

모두에게 고결한 존재인 성녀가 나를 유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눈 옆의 마리안에 대한 음심이 자꾸만 들었다.

지금 마리안이 내게 하는 행동이 정말로 나를 유혹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스스럼 없는 그녀의 성격이라 그런 것인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물론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는 성기사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복도 끝에서 몸을 틀었을 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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