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날 밤, 나는 무척 오랜만에 몽정을 했다.
나이 서른 먹고 몽정이라니.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제 마리안과 있었던 일 때문인지 꿈에서 나온 마리안과 몸을 겹치는 꿈을 꿨다.
축축해진 속옷과 바지를 정화 마법으로 청소했다.
평소 빨래는 아이린이 담당하고 있었지만 몽정한 속옷까지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의 몽정이어서 그랬는지 분명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속옷이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어제 주물렀던 마리안의 가슴 감촉을 회상했다. 손에 착 감기는 적당한 크기의 가슴과 말랑말랑한 살결.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그 뿐만 아니라 마리안에게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모성애'가 있었다. 같이 있는것만으로도 치유받고, 왠지 어리광부리고 싶어지는 그런 매력 말이다.
분명 얼굴이랑 성격만 봤을 때는 귀여운 여동생 같은 이미지인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침을 먹는 도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어제 마리안과 했던 키스가 사라지질 않았다.
"...주인님?"
멍하니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내 손을 잡고 흔드는 아이린이었다.
"...응? 왜 그러니?"
아이린은 볼을 살짝 부풀리며 나를 노려봤다. 노려본다고 했지만 귀여운 아이린이 그래봤자 삐진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 오늘은 숲 속에 다녀오기로 하셨잖아요."
아, 그러고보니 오늘은 아이린을 데리고 숲에 갔다오기로 했었다. 내가 약속을 잊고 있었던게 마음에 안 드는지 내 다리에 작은 주먹을 투닥거리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사과했다.
"그래그래. 까먹어서 미안하구나. 그럼 옷 갈아입고 나오렴."
최근 연달아 포션 가게가 망하는 바람에 결국 영지에 남은 포션가게라고는 내 가게 밖에 없었다.
덕분에 찾아오는 손님은 늘어났지만 지난번 시청에 대량으로 보급을 하는 바람에 꾸준히 재료를 채집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린은 내가 미리 당부했던대로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짧은 반바지에 반팔 셔츠를 입은 아이린은 숲에 곤충을 채집하러 가는 아이같은 모습이었다.
'벌레 퇴치 마법이라도 걸어둘까.'
아이린도 여자애니 벌레가 꼬이는 것은 싫을 것이다. 아이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법을 걸어두고는 숲으로 향했다.
지난번 제시카와 함께 채집을 가는길에 만났던 병사들은 나를 알아보고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숲에 간다는 말에 자신이 호위를 하겠다고 앞으로 나오는 병사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두 병사가 경례를 받아주며 나는 아이린을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 옆에는 지난번에 내가 성기사단을 잡으며 박살난 나무와 움푹 파인 구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최근 처리할 일이 많아 아직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것이리라.
'조금 도와줄까.'
처음 와 보는 숲에 신난 아이린의 시선을 피해 흙의 정령을 소환시켰다.
녀석들에게 파여 있는 땅을 도로 메꾸도록 명령했다. 명령을 다 수행하면 다시 정령계로 돌아갈테니 따로 마나를 회수할 필요도 없었다.
성 안에 있는 작은 나무와 달리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들을 보며 감탄을 터뜨리는 아이린의 손을 잡고 천천히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난번과 달리 신중하게 마나를 땅바닥으로 퍼뜨리며 걸었다. 제시카는 그래도 자기 몫 정도는 할 수 있는 모험가지만 아이린은 고블린 한 마리와 싸워도 지는 연약한 소녀였다.
혹시라도 몬스터나 들짐승이 감지에 잡히는지 확인하며 숲의 식물들을 확인했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오자 지난번에 왔던 쪽과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여러가지 색깔들의 꽃과 풀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채집했다.
중간중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식물들의 이름을 물어보는 아이린에게 식물의 이름과 효능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아이린은 명석한 두뇌로 금세 식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외웠다. 그렇게 숲을 돌아다니며 재료를 담을 가죽 주머니를 가득 채웠을 때, 감지에 기분 나쁜 존재가 잡혔다.
이족 보행이지만 인간은 아니고. 발소리도 고블린보다 크다.
'오크'
"아이린. 잠깐만 여기 있으렴."
놈은 아이린과 내 냄새를 맡았는지 천천히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안 되서 뒤를 잡히게 된다.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는게 낫다.
아이린을 수풀더미 아래에 웅크려 있게 하고는 혹시 몰라 방어 마법도 몇 겹 걸어두었다. 이 주변에 다른 몬스터나 동물의 감각은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가볍게 가시덤불을 뛰어넘고 일직선으로 달리니 가까운 강가 옆의 수풀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오크의 모습이 보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쪽으로 시선이 향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우어어어어!"
육중한 덩치를 앞세워 주먹을 휘두르는 놈의 공격을 뒤로 가볍게 물러나며 피했다. 다음순간,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놈의 팔을 그었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 소리와 함께 놈의 팔이 잘려나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팔을 본 오크가 고통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으어어어억!"
다시 한 번 단검을 휘둘러 이번에는 놈의 다리 부분의 힘줄을 끊어냈다.
오크의 팔과 달리 다리는 단검으로 쉽사리 잘리지 않기 때문에 택한 선택이었다.
한쪽 다리를 쓸 수 없게되자 놈은 결국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쫓아오지는 못하겠지.
움직일 수 없고, 팔 하나가 없는 오크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고블린같은 다른 몬스터에게 사냥당하거나, 쓰러져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거나. 뭐, 그런 사정은 내 알바가 아니었다.
오크를 처리한 나는 단검에 묻은 피를 강각의 물로 깨끗하게 씻어냈다. 그리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린에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귀했다.
아이린은 나와 떨어져 있는 것이 무서웠는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옷에 묻은 피냄새를 지우고 도착하자마자 내게 안겨드는 아이린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결국 아이린은 숲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이것대로 괜찮았지만 말이다.
가게로 돌아와서는 채집해온 식물들을 분류했다. 일반 포션이 사용되는 약초와 마비, 해독에 사용되는 약초들을 따로 분류해서 주머니에 담았다.
아이린이 앙증맞은 손으로 약초를 조심스레 분류해서 담는 귀여운 모습을 수정구에 담아 기록을 남겨두고 싶을 정도였다.
오늘 숲에서 돌아다닌 것만 해도 피곤할 것 같아 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해도 고개를 저으며 결국 식물을 분류하는게 끝날때까지 도왔다.
그런 아이린에게 상으로 오랜만에 트롤 고기를 구웠다. 고기에서 빠져나온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에 아이린이 군침을 삼켰다.
손에 쥔 칼에 마나를 부여하며 트롤 고기를 부드럽게 썰어냈다.
작게 썰어낸 고기를 식혀 아이린의 입 안에 넣어주자 아이린이 입을 우물거리며 방방 뛰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요리하는 보람이 있구만.
그렇게 저녁에는 곁들인 샐러드와 트롤고기로 식사를 마쳤다.
거의 3인분 가까이를 먹어치운 아이린은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행복해했다.
그러고보면 아이린은 참 복스럽게 먹는 편인데도 살이 잘 찌지 않았다.
처음 앙상하게 말랐을 때는 살아 금세 붙어 지금처럼 딱 보기 좋은 몸매가 됐는데, 평소에도 이렇게 많이 먹는데도 이 이상은 절대 살이 찌질 않았다.
다른 여자애들이 들었다간 당장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배불리 먹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아이린은 졸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고개가 흔들리다가 번뜩 눈을 뜨고는 옆에 내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옆에 있는 걸 확인하면 다시 배시시 웃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짓을 몇 번 더 하다가 이 이상뒀다간 아이린의 목이 부러질 것 같아 나는 잠든 아이린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눕혀 주었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피곤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린을 재우고 정리한 재료들이 담긴 주머니를 모두 창고에 옮겼다.
생각지도 않게 발견한 좋은 약초들이 있어서 괜찮은 포션을 몇 개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정리를 다하고 나니 이제 막 돌아왔는지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모험가들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어서 그런지 다른 식당들은 본격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아이린의 방을 슬쩍 쳐다보다가 외투를 하나 걸치고 나왔다.
확실히 거리는 던전 사건 때문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어느새 활발하게 돌아와 있었다. 식당의 손님을 호객하는 점원과 온갖 먹거리를 파는 노점들까지.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신전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신전의 정문에는 성기사 두 명이 서 있었고, 각 벽의 모서리마다 병사들이 한 명씩 더 서있었다.
삼엄한 경계였지만 마법으로 기척까지 완전히 지운 이상 그들이 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가볍게 담을 뛰어 넘자 낮과는 달리 고요한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텅 빈 테라스와 대부분의 방에 불이 꺼져 있는 신전을 확인하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신전 안으로 들어가자 예배가 끝나고 신전 중앙에 있는 기도관에서 나오는 사제들과 성녀의 모습이 보였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사제들과 달리 마리안은 내가 있는 정원쪽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낮에 함께 앉았던 테라스의 의자에 기대어 앉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리안의 뒤로 가서는 슬쩍 마법을 해제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안의 코앞에 내 얼굴을 들이밀자 깜짝 놀란 마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꺅?!"
하지만 마리안이 비명을 지르기 직전 방음 마법을 발동시켜 아슬아슬하게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루, 루디 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혹시라도 내가 다친 곳은 없나 훑어보는 마리안에게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와 함께 마리안의 심장박동이 그대로 전해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