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60)

결국 마리안과 욕실 안에서 한 판 더 하고 나서야 제대로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씻어주며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럼 루디 씨는 드래곤을 실제로 본 적이 있으신건가요?"

"본 것 뿐만 아니라 직접 겨뤄보기까지 했습니다만 결국 잡지는 못했습니다. 조금 싸우다가 날개를 펴고 도망가버렸거든요."

하필이면 마력을 모두 쓴 상태라 쫓아갈 수도 없었다. 만약 내가 조인족이었다면 어떻게든 따라붙었을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동화속에서나 들을법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는 루디 씨도 대단하네요."

그렇게 키득거리는 마리안의 가슴을 장난스럽게 주물렀다. 내 손길에 마리안이 귀여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꺄앗! 어딜 만지시는거에요!"

마리안이 몸을 틀자 욕조에 차 있던 물이 흘러넘쳤다. 욕조에서 빠져나온 물이 욕실 바닥을 두들겼다. 촤악! 하는 소리가 왠지 듣기 좋아 좀 더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어느새 새벽녘이었다. 씻고 나온 마리안은 옷장에서 속옷을 꺼내 입으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정말이지. 제 방이 아니었으면 속옷도 없이 돌아다닐 뻔 했잖아요."

방금 전 흥분한 내가 찢어버린 마리안의 팬티는 내 마법으로 태워버렸다. 방을 청소하는 사제가 혹시라도 찢어진 마리안의 팬티를 발견했다간 무슨 의심을 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처음 찾아올 때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금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셔츠의 감촉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셔츠를 여미고 바지를 입었다.

겉옷 위로 로브를 걸치고나니 어느새 마리안은 평소 입고 다니던 성녀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다소곳이 침대 위에 앉아 나를 응시하는 마리안에게 키스했다.

가볍게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키스가 끝나자 작별인사를 했다. 마리안은 여전히 아쉬워했지만 나중에 또 찾아오겠다며 그녀를 달랬다.

창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새벽 어스름을 뒤로 한 채 신전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신전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리안은 바스티안 영지에서 머무를 것이다. 마리안이 이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은 시간이 되는대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히 가게 안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빨아야 하는 옷을 통에 넣어놓고, 욕실에 가서 다시 한 번 몸을 씻었다.

씻으면서 한동안 깎지 않아 까칠해진 수염과 덥수룩해진 머리카락을 짧게 짤랐다. 거울에 비친 멀끔하게 수염을 민 턱과 차분하게 정돈된 머리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꾸미는 짓은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남들의 눈에 평범해 보일 정도로는 스스로를 관리해야 했다.

지금은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더욱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나니 어느새 아침의 햇살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밤을 새서 마리안과 몸을 겹쳤음에도 몸이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체력을 소모했으면 당연히 피곤해서 곯아떨어져야 했지만 졸음조차 몰려오지 않았다.

이것도 마리안의 몸에 부여된 신의 가호 덕분인가.

진지하게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믿기 시작해야하나 고민할 때 즈음, 첫 손님이 찾아왔다.

덜컹거리는 문을 열고 온 사람은 안젤리카와 제시카 자매였다.

안젤리카는 이전과 달라진 백색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고, 제시카는 마나가 서린 것으로 보이는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그래도 가장 달라진 점을 꼽자면 제시카가 입고 있는 옷이리라. 전처럼 몸의 넓은 면적이 드러나는 옷이 아닌 긴 셔츠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물론 늘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타고난 몸매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치녀라고 생각될 정도로 천연적인 옷차림은 더 이상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두 사람을 보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지난번 던전 사건 이후로 안젤리카가 포션의 남은 대금을 치르기 위해 한 번 찾아온 것을 제외하고는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내가 인사를 건네자 안젤리카는 특유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옆에 있는 제시카 역시도 말이 하고 싶은지 입이 근질거려 보였지만 얌전히 언니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지난번에 던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한동안은 모험가 의뢰를 받지 못하고 요양중이었거든요."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래도 안젤리카와 제시카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적어도 오우거의 뱃속으로 들어가거나, 몸 어디 한군데를 날려먹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광분한 오우거에게 쫓겨 다니는 경험은 그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장 모험가를 그만뒀겠지만, 지금의 옷차림을 보니 그녀들은 어떻게든 극복해낸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잘 극복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후후. 고마워요. 그나마 백작가에서 보수를 본래 약속했던 것보다 두둑하게 지급해준 덕분에 푹 쉬고, 괜찮은 장비도 맞출 수 있었답니다."

그러고보니 앨리스도 용병단과 모험가들이 완전히 몰살당해버리는 바람에 본래의 보수보다도 많은 돈을 추가 지급했다고 들었다.

완전히 박살난 용병단의 유가족들에게도 전원 위로비를 지급해 재정이 휘청거렸을 때, 교회에서 준 금화를 내가 필요없다고하자 화색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이리라.

안젤리카가 손을 뻗자 흰색의 마법진이 그려지며 마법진 안에서 나무 지팡이가 하나 튀어나왔다.

공간 마법이 부여된 지팡이인가.

슬쩍 훑어보니 지팡이 안에는 내 검지만한 마나석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괜찮은 지팡이를 구하셨군요."

예전에는 지팡이 위에 드러나는 곳에 큰 마나석을 박아 부를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력 좋은 도둑이나 도적이 지팡이 위에 박힌 마나석만 훔쳐가는 일이 자주 일어나니 결국 지팡이 안에 마나석을 감추는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안젤리카의 지팡이 안에 박힌 마나석은 지금 그녀가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과 비슷했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좋은 지팡이였다.

괜히 자신의 분수에도 안 맞는 값비싼 지팡이를 사서 제대로 사용조차 할 수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보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내 질문에 이때까지 대답하던 안젤리카 대신 제시카가 튀어나왔다.

"이때까지 쉬었으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모험가 활동을 하기 위해서 포션도 좀 사두려고요."

제시카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칭찬해달라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 가까운 내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쉽게 기뻐한다.

"어떤 포션을 찾으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안젤리카였다.

"하급 포션 다섯 개, 간이 해독제 두 개 주세요."

"알겠습니다."

내 뒤에 있는 매대에서 핑크빛 포션 다섯 병과 옅은 녹색 병 두 개를 꺼냈다. 안젤리카가 내민 가죽 주머니에 포션 병들이 깨지지 않도록 넣었다.

"하급 포션 다섯 병에 은화 스물 다섯 닢, 간이 해독제 두 병에 은화 여덟 닢, 총 서른 세 닢이지만 그냥 서른 닢만 주십시오."

본래 몬스터들이 다루는 독은 종류가 다양해 그 독을 파악하기 전에는 제대로 된 해독제를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의 효과를 늦추거나 멈추는 간이 해독제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해독제를 바르거나 먹기 전까지 버틸 수 있게 하는 역할이었다.

지난번에 안젤리카가 독에 중독된 채 한 번 실려온 후부터는 독에 대한 대비를 착실히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지난번에 그녀들이 찾아왔던게 내가 아니라 다른 포션 상점이었다면 아마 안젤리카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안젤리카가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에서 은화를 한 닢씩 꺼내 총 서른 닢을 올려놓았다.

은화를 받아 서랍 안에 넣은 나는 살짝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일단은 가게의 주인이니 형식적으로나마 인사를 했다. 그런 내 행동에 안젤리카는 쿡쿡 웃었고 제시카는 벌써 가는게 싫은지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축객령에 가까운 배웅에 결국은 포션병들이 담긴 주머니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모험가 활동을 다시 하는건가. 그녀들로서는 나름대로 용기를 냈다고 생각한다.

동료가 오우거에게 산채로 잡아먹히고, 피냄새를 맡고 광란하는 오우거들로부터 도망가는 경험을 하고도 모험가를 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 시골에 내려가 평생을 농사만 짓고 산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그리고 앞으로도 가끔씩은 악몽에 나올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다.

하지만 저 자매는 그걸 극복해냈다.

'자매라 그럴 수 있었던거겠지.'

혼자라면 공포에 떨었겠지만 어릴때부터 함께였던 두 사람이었기에 한 번 더 용기를 내볼 수 있었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죽었더라도 나머지 하나가 그런 생각을 할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찌됐든 안젤리카와 제시카 둘 다 살아남았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모험가를 하기로 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금방 성장하겠구만.'

생명의 위기를 넘긴 모험가들 중,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부류는 그 위기를 기점으로 급격한 성장을 거듭한다.

지난번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 순간의 감각은 앞으로 그녀들에게 스스로의 위기를 자각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를 알아보고, 스스로의 위기를 자각하는 것.

베테랑 모험가의 필수 덕목이었다.

뭐. 오늘은 버릇이 나빠지면 안 되니 빨리 쫓아냈지만, 다음에 오면 그 때는 차라도 한 잔 대접해줄까. 계속 가게만 보면 심심하기도 하니 말이다.

제시카와 안젤리카가 거리를 걷는 뒷모습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다 품에 들어있던 연초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마법으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아이린이 옆에 있을 때는 잘 태우지 않지만 아이린은 지금 욕실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니 괜찮았다.

폐 깊숙히까지 빨아들인 연기를 코로 내뿜었다. 지독한 냄새였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연초를 마저 태웠다. 연초를 모두 태운 직후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늘 가게를 찾아오는 단골 모험가였다. 그는 나를 보고는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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