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260)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루디 씨가 그런 표정 짓는건 처음 봤어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던 모양이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님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요. 꽤나 재밌는 일이 있었거든요."

예전에는 잘 짓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그 날은 무척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마침 손님들이 뜸할 점심 때라 아이린과 함께 식사를 끝낸 다음 차를 끓였다.

비록 마리안이 준 향기로운 명차만큼은 아니지만 달짝지근한 향기를 품기는 차를 아이린과 함께 홀짝였다. 아이린은 다행스럽게도 차와 음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잘 마셨다.

뜨거운 찻잔을 양 손으로 들고는 호호 불어 차를 마시는 아이린의 모습을 보며 쏟아지는 창 밖의 빗줄기를 감상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가게 창문을 두들겼다.

창문에 가득 맺힌 물방울들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차를 비운 아이린의 찻잔을 다시 채워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린도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내게 몸을 붙였다.

지난번 비가 왔을 때, 아이린이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오는 날의 쓸쓸함, 고독, 그리고 내려치는 천둥소리를 특히나 무서워했다.

그래서 그 날은 결국 하루 종일 내 곁에 달라붙어 있었다. 천둥 소리가 칠 때마다 무척 몸을 움츠렸다.

빈민가에서 지내던 시절, 가림막 하나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다보니 이렇게 된게 아닐까 생각할 뿐이었다.

번개가 치고, 그에 뒤따른 천둥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린은 눈을 감은 채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이린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아이린과 반대로 나는 비가 오는 날을 꽤나 좋아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들려오는 빗소리와 차가워진 공기의 감각이 좋았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고요한 분위기를 맛보고 있는데, 빗줄기를 뚫고 찾아온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크였다.

"어우. 엄청나게 쏟아지네. 오랜만이에요. 루디 형."

바크는 쓰고 온 우산을 접어 벽에 기대어놓고 옷에 묻은 빗물을 가게 문 밖으로 털어냈다.

"하필 찾아와도 이런 날에 찾아왔냐."

그렇게 인사를 받아주며 나는 욕실에서 수건을 한 장 들고왔다.

우산을 썼지만 쏟아지는 폭우에 옷이 잔뜩 젖은 바크에게 수건을 건네주자 바크는 감사 인사를 하며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았다.

"에이. 오늘도 폭우 때문에 일이 멈춰서 간신히 시간 내서 온거에요."

"그래. 바빠서 좋겠다. 임마."

키득거리는 바크의 외투를 받아 물기를 한 번 털어냈다.

아이린은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인 바크를 보며 경계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크도 그런 아이린을 발견하고는 내게 물었다.

"아. 저 애가 루디 씨가 말했던 친척이에요?"

"그래. 이름은 아이린이다. 너보다 서너 살 정도 어릴걸."

아이린은 처음 데려왔을 때와는 달리 조금 살이 붙어 살짝 마른 미소녀 정도로 보였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가 딱 보기 좋다고 생각한다.

분명 아이린이 먹는 양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쪄야할텐데, 신기하게도 아이린은 이 상태에서 체중이 멈춰 있었다.

키도 또래 여자애들 보다 약간 큰 편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열세살 남짓인 여자인데도 묘한 색기와 성숙미를 품고 있었다.

지난번에 플로라가 찾아왔을 때도 아이린이 애들이랑 노는걸 보면 언니가 철없는 동생들이랑 놀아주는 것 같다고 했으니.

바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나는 브리튼 상단의 바크라고 해. 편하게 바크 오빠라고 부르렴."

"...네. 바크 오빠."

바크 정도의 미소년이 저렇게 먼저 다가가면 대부분의 여자애들은 뻑 가는 편인데 아이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한 번 악수를 하고는 손을 떼자마자 바로 내 등 뒤로 숨어버렸다.

"미안.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라서."

그럴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바크가 무례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봐 사과했다.

하지만 바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뭘요. 저도 저 때는 어른들한테 인사다닐 때 늘 저랬는데."

역시 괜찮은 녀석이란 말이지. 플로라는 대체 이런 녀석의 뭐가 아쉬워서 찼는지 모르겠다.

"차라도 한 잔 줄테니 앉아있어."

내 말에 바크는 의자에 앉아 가게 안의 상품들을 둘러봤다.

아이린도 자리에 앉아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 부엌까지 따라와서는 내가 차를 끓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정도로 바크와 함께 있는게 싫은걸까. 바크는 괜찮은 놈이라고 설명해주려다가 그만뒀다.

굳이 내 입으로 아이린에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아이린이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빠를 것이다.

새로 차를 끓여 돌아가자 바크는 포션병 하나를 들고는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 루디 형. 이거 상급 포션 아니에요?!"

손에 들고 있던 포션병을 내밀며 그렇게 묻길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맞아. 재료가 모자라서 한 병 밖에 없지만."

"그 말은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는 소리잖아요! 형이 실력이 좋은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상급 포션까지 만들 수 있었을줄이야."

바크는 어딘가 나를 동경하는 듯한 반짝이는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겸양을 떨었지만 바크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 정도 레시피는 연금술 조금만 배워도 누구나 알 수 있어."

"에이. 아는 거랑 만드는 거랑 같나요. 게다가 이런 포션 만들려면 마법적인 재능도 있어야 하잖아요."

하급 포션이야 대충 트롤의 피와 프라미아 꽃을 섞어주면 만들 수 있지만 중급 포션과 상급 포션은 마법적인 처리를 해야하는 재료가 몇 개씩 있었다.

때문에 중급 이상의 포션들의 경우에는 마법사를 은퇴하고 연금술을 익히거나, 마법과 연금을 동시에 배우는 자들이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포션이나 마도구에 대해서 취급하는 상단을 운영하다보니 바크는 이런쪽에 빠삭한 것 같았다.

여전히 감탄사를 늘어놓는 바크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한 바크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제가 너무 흥분했죠. 죄송해요. 형."

"뭘. 상인이라면 당연한거겠지. 그래도 나는 그런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 기대하지 마라."

몇 번이나 말했지만 돈을 벌려면 이런 시골 영지까지 내려오지도 않았다.

바크도 내 속내를 읽었는지 더 이상은 별말 하지 않고 차를 홀짝이며 화제를 돌렸다.

"차 향이 무척 좋네요. 어디서 구하신거에요?"

"예전에 모험 다니면서 구한 찻잎이야. 몸에 좋으니까 많이 마셔라."

비록 마리안이 대접한 차만큼은 아니었지만 내가 끓인 차도 어지간한 최상급 차와 비견될 정도로 좋은 차였다.

'애초에 신성력을 매일같이 주입해서 키운 찻잎을 어떻게 이겨.'

나중에 마리안에게 차의 비밀에 대해 들었는데, 매일같이 사제들이 찻잎에 신성력을 주입해서 키운다고 한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열 몇명이 붙어서 신성력을 주입해야하기 때문에 재배되는 양도 무척 적다고.

그렇게 바크는 나와 함께 차를 즐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요즘 마을에 돌아다니는 소문이나 누가 누구와 눈 맞았다는 연애담까지.

영지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기 때문에 나 역시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었다.

아이린은 바크와 내가 대화하는걸 지켜보다가 먼저 방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루디 형. 성녀님이랑 친분이 있으세요?"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냐?"

"저희 가게에서 일꾼으로 일하는 애들 몇 명이 신전 안에서 성녀님과 함께 있는 루디 형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지난번에 마리안과 함께 아이들을 만났을 때인가. 그 정도로 많은 애들 앞에서 함께 있었으니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냥 예전에 한 두 번 만난 적이 있는 정도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

"그래도 성녀님이랑 아는 사이라는건 엄청난 일이라고요. 역시 형은..."

"그렇게 띄워봤자 아무것도 안 해줄거다."

바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교회와 관계를 맺어놓고 싶을 것이다.

때마침 영지에 있는 성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마리안에게 사적인 부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앨리스였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부탁을 빙자한 명령을 했겠지만, 마리안처럼 순수한 여자에게는 그런 부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 것 같다.

가뜩이나 마리안은 착해빠진 성격 때문에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이용해먹는 짓은 내 쪽에서 사절이었다.

"에이. 저도 염치없게 형한테 그런걸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 그냥 루디 형은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만약 상인으로서의 감으로 꿰뚫어 본 것이라면 바크는 상인으로 대성할 것이다.

앨리스처럼 마나의 흔적을 보는 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리안처럼 신의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닌데 내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포션가게 주인에 불과한 나를 왜 저렇게까지 평가하는지는 몰라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바크는 올 때 썼던 우산을 다시 펴고는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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