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260)

신기한 일이었다. 예전에 모험가로 활동 할 때, 몇 년 동안 같은 파티였던 사람보다 알게 된 지 반년 정도 밖에 안 되는 바크와 대화하는게 더 자연스러웠다.

대화를 해도 어긋남이 없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이 즐겁게 느껴진다.

홀로 있는 것을 즐기던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바크가 돌아가고 슬슬 저녁 때가 되어 가게 영업을 종료했다. 오랜만에 구운 닭고기와 샐러를 볶아서 닭볶음을 만들었다. 살짝 매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술이 땡겼다. 창고에 넣어뒀던 맥주가 떠올라 한참을 찾다가 간신히 오크통에 가득 담긴 맥주를 큰 컵으로 한 잔 떠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시원한 청량감이 목을 적셨고, 톡 쏘는 짜릿함이 혀를 관통했다.

식탁을 모두 차리고 아이린을 데리러 갔다.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는 아이린을 깨웠다.

몽롱한 눈으로 비틀거리던 아이린을 품에 안아 부엌까지 데려와 의자에 앉혀주었다.

고기 냄새를 맡고는 그제서야 눈의 초점이 돌아온 아이린은 내가 접시에 담아준 고기를 열심이 먹기 시작했다.

잔에 가득 담긴 황금빛 맥주를 꼴깍거리며 아이린이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입 안 가득 고기를 넣고 우물거리는 아이린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푹 숙이더니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조신하게 고기를 드문드문 한 점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부끄럼타고 있는 것일까.

나도 맥주를 마시며 간간히 고기를 집어먹었다. 적당히 매콤하고 짭잘하게 간이 잘 되어 있었다.

내가 고기를 집어먹는걸 힐끔거리던 아이린은 여전히 젓가락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굳이 내 앞에서까지 저렇게 내숭을 떨 필요는 없는데.

어린애들은 잘 먹고 잘 노는게 중요하다는게 내 지론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필요하겠지만 아이린은 자기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어른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고기 볶음을 샐러드에 싸서 아이린에게 내밀었다. 내 행동을 이해했는지 아이린은 자그마한 입을 벌렸고, 나는 그런 아이린의 입 안에 쌈을 밀어넣었다.

고기가 듬뿍 들어있는 쌈을 우물거리는 아이린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담 갖지 말고 양껏 먹으렴. 나는 잘 먹는 아이를 좋아하니까."

그제서야 조금 표정이 밝아진 아이린은 고기와 함께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귀여운 아이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친 줄 알았던 폭우는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어제보다 더욱 짙어진 비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래도 거리에 사람들이 좀 돌아다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훨씬 거세진 빗줄기와 연신 떨어지는 천둥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울렸다. 게걸스러운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고, 아이린은 그런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때 아닌 장마였다.

오늘같은 날 모험을 갈 모험가들은 없으니 오늘 장사는 공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침 이런 시간이 필요했으니 어찌보면 호재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내 옆에서 내가 장부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린."

"네? 주인님?"

아이린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내 명령 때문에 삼촌이라고 불렀지만 둘이서 있거나 앨리스와 함께 있을 때는 나를 계속 주인님이라 불렀다.

"너도 대충 짐작했겠지만 나는 사실 마법사란다."

내 말에 아이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너도 마법을 배우고 싶니?"

내 질문에 아이린은 잠시 고민하더니 질문했다.

"마법을 배우면... 좀 더 주인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나요?"

"물론이지. 집안일도 쉽게 해치울 수 있고, 내가 포션 만드는 걸 도울 수도 있단다."

"그럼 배울래요!"

해맑게 웃으며 즉답하는 아이린이었다. 하다못해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의외인 반응에 내가 오히려 되물었다.

"정말 괜찮겠니? 마법을 배우는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란다."

"괜찮아요. 주인님이 저한테 주신 것만 해도 이미 저는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걸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아이고. 이 사랑스러운 것. 내가 이래서 아이린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이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니 아이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헤헤...주인님..."

어린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아이린을 꼭 끌어안으며 나는 그런 아이린을 꼭 훌륭한 마법사로 키워내겠다고 다짐했다.

마침 폭우로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날이니 마법 교육을 하기에도 적당했다. 나는 서랍에 넣어놨던 약병 하나를 챙겼다.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약병이었지만, 이 약 한 병으로 몇십 골드를 호가할 정도로 값비싼 약이었다.

"모두 마시렴."

약의 마개를 따서 아이린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린은 잠시 약병을 쳐다보더니 입 안에 모두 털어넣었다.

별 다른 맛이 나지 않았는지 아이린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텅 빈 약병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이린에게 약병을 돌려받고는 탁자 구석에 치워놓았다. 지금부터는 집중해야 할 때였다.

아이린의 등 뒤에 서서 어깨를 잡았다. 갑작스런 접촉에 아이린은 조금 당황했지만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아이린도 정자세로 섰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심호흡하렴."

방금 전 아이린이 마신 약은 '마나 감응도'를 급격히 올려주는 약이었다. 본래 이 마나라는 것은 몸 안에 쌓여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느껴야만 했다.

검사들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 소드 오러(Sword Aura)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물론 검사는 어느 정도 검술이 밑받침이 되어줘야 소드오러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런 약을 복용하지 않지만 마법사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마탑에서는 재능이 유망한 마법사들에게 이 약을 먹여 마나를 느끼기 쉽게 하고는 그 감각을 익숙하게 하는 연습을 반복한다.

일종의 편법인 셈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이린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란 것 정도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약의 효과는 정상적으로 일어난 것 같았다.

아이린의 속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일렁이며 몸 밖으로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린도 생소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나는 그런 아이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채 그녀의 마나를 천천히 갈무리 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흘러넘칠듯이 출렁거리는 마나의 기운을 그녀의 주변에 고정시켜 그녀가 좀 더 선명하게 마나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왔다.

"눈을 감고, 주변에 흐르는 마나를 느끼려고 해보렴."

추상적인 말이었지만 아이린은 내 말을 의심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물론 나도 아이린이 단 번에 마나를 느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이 짓을 세 번이나 하고 나서야 간신히 마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별 기대 없이 아이린에게 물었다.

"어때, 주변의 기운이 느껴지니?"

"...네."

......?

아니. 잠깐만. 뭐라고?

당황한 나는 혹시 아이린이 착각한 것은 아닌지 좀 더 자세히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느껴지니?"

"몸이 붕 뜬 것 같고...흐릿하게 일렁이는 물방울... 같은 것들이랑... 새하얀 연기...같은 것도 보여요..."

반쯤 암시 상태에 들어갔는지 아이린은 띄엄띄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들을 설명했다. 내가 처음 마나를 느꼈을 때와 흡사한 설명이었기에 나는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머리만 좋은게 아니라 마나를 느끼는 것마저 우등생이었다.

'타고난건가?'

아이린이 서큐버스라 마족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번에 마나를 느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의 감각을 잘 기억해두렴. 앞으로 네가 계속 느끼게 될 감각이란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이 마나를 처음 느꼈을 때와 마법을 처음 사용할 때다.

마나를 처음 느꼈을 때의 그 몸이 부유하는 듯한 감각에 구역질을 하거나 마나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마법을 처음 사용했을 때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탈력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마나를 쉽게 느낄 수 있다고는 해도, 마법사가 되는 과정을 완전히 생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린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양 손으로 아이린의 등을 짚으며 아이린의 마나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묶어놓았다.

아이린은 계속해서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중얼거렸고, 나는 그런 아이린을 칭찬하며 그 감각을 최대한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충고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손을 아이린의 양 옆구리로 옮겼다.

그런데 손을 옮기다가 실수로 아이린의 날개 부분에 손이 닿자 아이린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읏."

어린애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다소 색정적인 목소리였다. 위에서 슬쩍 보니 아이린도 자신이 신음을 흘렸다는 자각은 있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와 더불어 아이린의 마나가 강하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평정을 잃고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이 새어나오는 마나를 집중해서 틀어막았다.

아이린은 서큐버스라는 종족 특성 때문인지 또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마나량을 품고 있었다. 나름 실력 있는 마법사인 안젤리카의 두 배 정도 되는 마나량이었다.

아이린의 마나가 띠는 색은 흔치 않은 분홍색이었다. 왠지 모르게 서큐버스답다는 생각을 하며 마나 한 톨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이린의 마나를 정돈했다.

다행히 점점 평정을 되찾았는지 출렁이던 마나도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슬슬 마지막 위치로 손을 옮기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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