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260)

문득 예전에 빌어먹을 할망구가 내 가슴팍을 더듬으며 했던 설명이 떠올랐다.

'알겠냐. 애송아. 사람이 가진 마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심장이다. 그래서 등과 가슴을 반드시 눌러주며 마나를 보듬어줘야하는게야.'

말투는 완전히 할망구인데 쓸데없이 외모만 20대의 미녀라서 더욱 소름돋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무튼 그 때 할망구가 내 등과 가슴팍을 더듬을 때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는데, 아이린도 똑같이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일단 설명은 해줘야겠지.'

아이린은 일단 반쯤 마족이니 혹시 다른 곳에 마나의 중심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심장 부근에 마나가 고여있는게 보였다.

"아이린. 지금부터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을건데, 사람들의 마나가 가장 많이 흐르는 곳이 심장이라 그런 것이란다.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심호흡하렴."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양 손을 아이린의 가슴팍 위에 올렸다.

아직 열세 살인데도 야트막한 봉우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 손이 가슴팍에 닿자 아이린의 마나가 예상대로 살짝 출렁거렸지만 의외로 방금 전처럼 극적인 반응은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분홍빛 마나가 금세 수그러들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그렇게 가슴팍에 손을 갖다댄 채 아이린의 명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린의 가슴을 덮고 있는 손바닥에 살짝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오돌토돌한 콩알 두 개가 각각 양 손에 닿는듯한 감각에 멍하니 있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아냐. 자연스런 신체 반응이겠지.

정성스레 가슴을 애무한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손이 닿은 것일 뿐인데 그걸로 흥분했을리가 없다.

그냥 아이린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몸의 반응일 뿐이리라.

그렇게 도피를 하려는 순간 아이린이 서큐버스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뇌리를 스쳤다.

몽마(夢魔)이자 음마(淫魔).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유녀의 가슴을 주물거리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아이린도 이미 흥분했을지도 모른다는 배덕감이 교차했다.

입 안의 침이 바싹 말랐다.

아이린의 표정을 확인해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아이린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 후로는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약효가 다 됐는지 아이린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마나의 기운은 모두 사라져 있었고, 명상을 끝낸 아이린과 내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만이 맴돌 뿐이었다.

아이린도 나도 얼굴이 무척 붉어져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아이린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무척 잘 했고, 앞으로는 저녁 식사 후에 매일 연습하도록하자."

이 짓을 매일 한다고 생각하자 당장이라도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나를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내 칭찬이 기뻤는지 아이린은 평소처럼 내게 다가와서는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분명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인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손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다행히 그 다음날에는 비가 그쳤다.

하지만 아이린과 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이린은 나를 배려하는 것인지 최대한 아무것도 모른 척 내게 달라붙었지만 나는 아이린이 그럴 때마다 자꾸만 머릿속으로 어제의 해프닝이 떠올랐다.

이때까지는 아이린을 그저 딸처럼 생각했었는데, 어제 있었던 일 이후로 자꾸만 묘한 생각이 들어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제 밤잠 역시도 설치고 말았다.

물론 지금도 아이린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평소에 아이린이 보이는 모습은 또래 애들보다 훨씬 조숙한 편인데다 그녀의 종족이 종족인만큼 그런 쪽으로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딸이 사실 발랑까진 치녀라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기분이었다.

'하아...'

결국 이렇다할 대답도 얻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했다. 평소에는 직접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린을 흔들어 깨웠지만 오늘은 방 밖에서 아이린을 불러 깨웠다.

평소에는 몇 번이나 흔들어야 몽롱한 눈을 뜨던 아이린이었지만 오늘은 내가 부르자마자 방에서 나왔다.

내 눈치를 보는 아이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나로서도 지금 아이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나.

창 밖의 거리에는 지독한 폭우로 생겨난 물웅덩이들이 잔뜩 있었다.

아까 환기를 시키며 문을 열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강가의 물이 잔뜩 불어나 재해를 입은 집도 꽤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아침식사를 하고, 여유롭게 가게의 빈 재고를 채웠다. 그렇게 재고를 모두 채워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아이린에게는 창고에 넣어뒀던 마법서 몇 권을 건네주고는 방에서 읽게 했다.

마법의 근원과 마나를 다루는 법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마법사들의 지침서 같은 책이었다.

중간중간 전설이나 신화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있으니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연초를 연신 태우며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틀이나 일을 공친 많은 모험가들이 포션을 사러왔다. 매대의 포션이 거의 다 팔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창고에 쌓아둔 재고를 다시 매대에  채워넣고 있던 도중, 창 밖에 서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창 밖에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나는 재고를 채워넣는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로 찾아왔니?"

여자애 두 명에 남자애 세 명으로 이뤄진 그룹이었다.

"아이린이랑 놀려고 찾아왔어요!"

내 물음에 답한 남자아이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누군가 했더니 지난번에 마리안과 함께 신전을 둘러볼 때 나를 알아본 아이였다.

"어제까지 비가 와서 오늘은 놀만한 곳이 없을텐데. 어디가려고?"

내 물음에 녀석은 우물쭈물거리면서 옆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속닥거렸다. 한참을 속닥거리던 남자 아이는 결국 자신의 입가에 검지를 갖다대며 작게 속삭였다.

"다른 어른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해요? 어제 비가 엄청 와서 지금 강물이 잔뜩 불어나 있는데, 지금 거기 물고기들이 엄청 많거든요. 애들이랑 같이가서 다 잡아서 구워먹을거에요!"

확실히 어른들이 들으면 좋아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불어난 강물은 위험하다. 까딱했다간 어린아이 정도는 단숨에 집어삼킬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을 말려야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좋아. 대신 내가 너희들의 보호자로 따라가마. 물론 다른 어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내 말에 남자아이는 다른 애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대신 약속은 지켜주셔야해요?"

"그야 물론이지."

어차피 지금부터는 포션을 사려고 오는 손님도 없을테고, 아이린은 다른 애들과 놀 때 어떻게 노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이린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아이린이 나를 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이린. 친구들이 찾아왔더구나. 오늘 강가에 함께 놀러가자고 하던데, 나도 거기 보호자로 따라가기로 했단다."

평소 같았으면 애들도 플로라를 찾아갔겠지만 플로라는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 말이다. 강물이 불어난 위험한 곳에 가는 것을 반대했겠지.

그렇게 아이린을 포함해 어린아이 여섯 명과 함께 강에 가기로 했다. 어린애 여섯명과 내가 함께 다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도 몰라 나는 조금 떨어져서 걷기로 했다.

예상대로 아이린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자애들은 계속 아이린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봤고, 여자애들도 아이린의 양 옆에 서서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조금 의외인 점이 있었다면 저 또래의 여자애들이라면 아이린의 외모를 질투하기 시기할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사이가 좋았다. 여자애들이 말을 하면 아이린은 중간중간 맞장구쳤다.

어째 내가 여자들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대화법과 비슷했다.

그렇게 여자애들과 대화를 나누던 아이린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아이린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금새 옆의 아이들과 떠들며 본래의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말이지..."

두런두런 떠들어대는 여자애들과 앞에서 묵묵히 걷는척하며 여자애들을 훔쳐보는 남자애들. 저것도 나름 청춘이라면 청춘이었다.

평소에 걷는 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좀 더 걸어가니 강변가에 도착했다. 이미 강가에서 그물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강가 아랫쪽에는 폭우에 침수된 집도 몇 채 보였다.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집이라 그런지 부서진 틈 사이로 스며든 물 때문에 판자가 썩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어른들의 사정은 전혀 모르는 어린애들에게는 그저 신날 뿐이었다. 녀석들은 도착하자마자 강가로 달려갔다.

평소라면 종아리까지밖에 닿지 않는 강물은 허리춤까지 불어나 있었다.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한 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물 속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남자애들은 나름 요령좋게 자리를 잡고는 그물을 던졌다.

불어난 강물에는 애들이 말했던대로 고기반 물반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물고기가 많았다.

남자애들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물고기 수를 세며 누가 더 많이 잡았나 자랑하기 시작했고, 아이린과 여자애 두 명은 강가에 발목까지만 담근 채 남자애들이 물고기 잡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강변가 위쪽에서 아이들이 다치지는 않는지 살피며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이쪽 동네로 오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가 침수된 집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그제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 아르웬에게 인사했다.

"어머. 루디 씨.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애들이 강가에 놀러간다고 하길래 보호자로 왔습니다. 아르웬 씨는요?"

아르웬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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