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260)

"이번 폭우로 집 몇 채가 파손됐는데 성녀님이 교회에서 구호활동을 하겠다고 하셔서 사전 조사를 하고 있었어요."

"고생이시군요."

"그래도 저희 시청 입장에서는 감사드릴 일이죠. 교회에서 영지민을 위해 힘을 써주는거니까요. 역시 성녀님은 뭐가 달라도 다른걸까요?"

내가 성녀와 바로 며칠 전에 몸을 섞었다는 말을 들으면 발작하겠군.

"음료수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정말요? 고마워요. 루디 씨."

나는 아르웬을 데리고 가까운 상점가에 들어가 사과 주스 한 잔과 포도 주스를 한 잔 시켰다. 그렇게 주스를 한 잔 비우는 동안 최근 영지 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아르웬의 입장에서야 투정 섞인 푸념이었지만 내게는 훌륭한 정보들이었다.

평소 모험가들에게서는 듣지 못한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정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이 그렇지만 자신이 한 일은 업적이나 영웅담마냥 부풀려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한 번 걸러듣곤 했다.

아르웬에게 들은 정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스티안 백작가의 가주인 제이크가 영지를 떠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녀에 대한 일을 허투루 처리할 수도 없으니 직접 수도의 교회까지 걸음을 한 것 같다.

물론 중간에 마탑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몇 번 사용하겠지만 그래도 한 달 가까이 저택을 비운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어째 앨리스가 안 찾아온다 싶었는데 가주인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니 더욱 바빠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지금쯤이면 슬슬 애널도 꽤나 풀어져 있으려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줄 겸 나중에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

주스를 모두 마신 다음에는 함께 강변의 들판에 앉아 아이들이 강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까는 강가에 앉아있던 아이린과 여자애들도 지금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맨손으로 강 안을 헤집고 다녔다. 물론 그물도 없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여자애 둘이 허탕을 치는 동안 아이린은 꽤나 큼지막한 생선을 손으로 낚아채는데 성공했다.

아르웬은 플로라와 비슷한 성격인지 아이린이 물고기 잡고는 방방 뛰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일단은 공무원인만큼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데려오시면 안 돼요!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조금만 잘못해도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네에. 잘 알겠습니다."

아르웬의 훈계에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들고온 양동이가 가득찰 정도로 생선을 많이 잡았다.

아이린을 비롯한 여자애들은 손뼉을 치며 남자애들을 칭찬했고, 남자애들은 우쭐거리며 콧대를 높혔다.

그리고 리더격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어냈고 물고기를 나뭇가지로 꿰뚫어 장작 위에 매달았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생선 냄새가 강변에 가득찼다. 그러고보니 슬슬 점심때인가.

아르웬에게 점심 식사를 권하려고 한 순간 아이린과 양 옆의 여자애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기, 괜찮으시면 함께 드실래요?"

"생선도 엄청 많이 남았으니까 괜찮아요!"

아이린의 양 옆에 선 여자애들이 예의바르게 식사를 권하자 나는 아르웬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르웬은 아이들의 권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제안을 수락하려 할 때 애원하듯이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함께 먹어주실거죠?"

결국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젠장. 저런 표정은 반칙이잖아.

나와 함께 아이린의 표정을 봤던 아르웬은 내 반응을 보고는 팔불출이라며 키득거렸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생선을 한 마리 받아 살짝 깨물었더니 바삭바삭한 식감과 함께 꽉 찬 부드러운 생선살의 맛이 느껴졌다.

약간 싱겁긴 했지만 바싹 익혀 먹으니 바삭바삭한 식감덕에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잡은 생선의 종류도 다양해 여러 생선을 잔뜩 맛봤다.

어차피 양동이 안에는 아직 생선이 잔뜩 남아 있었기에 느긋하게 생선을 발라 먹는데 어느새 옆에 다가온 아이린이 내게 방금 자신이 잡은 생선을 내밀었다.

양 손이 가득 찰 정도로 큼지막한 생선이었다.

생선을 받자 아이린은 곧바로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그걸 지켜보던 아르웬은 엄마 미소를 지은 채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이린이 루디 씨를 무척 좋아하나 봐요. "

"...그러게요."

아이린이 준 생선은 이때까지 내가 먹은 그 어떤 생선보다도 맛있었다.

점심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아이들이 강가에서 수영하며 물장구 치는걸 구경했다.

"그러고보니 시청으로 돌아가지 않으셔도 되는겁니까?"

"오늘은 사무관님이 조사 끝나면 바로 퇴근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괜찮아요."

공무원치고는 꽤나 자유로운 외근 허가였다. 하긴. 사무관이랑 아르웬은 꽤나 친근한 분위기였으니 그런걸지도.

강가 구석에서 생선껍질과 잿가루가 묻은 손을 씻었다. 물이 어찌나 깨끗한지 강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나중에 주말에 시간이 난다면 아이린과 함께 도시락이라도 챙겨서 오면 좋을 것 같았다.

낚시도 하고, 물장구도 치다가 근처의 상점가에 들어가 저녁을 먹으면 완벽한 휴일이겠지.

아이린과 단 둘이 오면 아이린이 놀 상대가 없을지도 모르니 플로라나 앨리스를 데려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마리안과도 함께 오고싶지만 마리안은 단번에 아이린이 서큐버스인 것을 알아볼테니 무리.

대신 마리안과 단 둘이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어릴때부터 성녀로서의 마음가짐을 교육받아온 마리안이라면 거리를 홀로 돌아본 경험도 없을 것 같다. 나중에 한 번 물어볼까.

내 옆에서 손을 씻은 아르웬에게 품 안에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고마워요."

내가 준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깨끗하게 닦은 아르웬은 다시 곱게 접어서 돌려주었다. 나는 접혀 있는 손수건으로 적당히 손을 닦고는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슬쩍 강가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여전히 즐겁게 수영하며 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아르웬과 잡담을 나누던 도중 나는 아이린의 셔츠가 물에 젖어 속살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도 멀리서 볼 때 살짝 비치는 수준이었지만 까딱 잠수라도 한 번 했다간 옷이 몸에 달라붙으며 안에 입은 속옷이 그대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르웬은 그런 나를 보며 '어휴, 진짜 팔불출이라니까.'라고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척 하기로 했다.

마침 곧 있으면 저녁 때라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기에도 적당했다.

"애들아. 좀 있으면 해도 저물텐데 슬슬 돌아가야지."

내 말에 놀고있던 아이들은 그제서야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보고는 하나 둘씩 강에서 나왔다. 남자애들은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서는 물로 흠뻑 젖은 옷을 쥐어짜냈다.

옷에서 흘러나온 물이 들판 바닥을 적셨다.

아이린과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처럼 잠수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덜 젖었지만 그래도 바지와 셔츠 아랫부분이 젖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축축해진 옷이 마르며 아이린의 몸에 달라붙었다. 조금만 집중해서 보면 아이린의 속옷 색이 비칠 정도였다. 결국 내가 입고 있던 외투를 아이린에게 벗어주었다.

아이린에게는 조금 크긴 했지만 속옷이 비치는걸 보이는 것 보다는 낫겠지. 어찌보면 아이린이 젖은 것은 내 탓도 조금 있었으니 말이다.

다른 여자애들은 물 깊숙히까지 들어가지 않아 바지와 셔츠 아랫부분만 젖었지만 아이린은 방금 전 내게 줄 물고기를 잡는다고 흠뻑 젖었으니 말이다.

아이린은 내가 외투를 걸쳐주자 잠시 당황하다가 젖어서 속살이 조금씩 비치는 자신의 셔츠를 보고는 외투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팍을 가렸다.

이번에는 어제와 다른 의미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반면 아르웬과 아이린의 옆에 있던 여자애 두 명은 연신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와 아이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대충 알겠지만 딱히 그런 거 아니야.

열세 살짜리 꼬맹이한테 무슨 감정을 품겠냐고.

내 성취향은 지극히 정상적이란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보호욕구를 자극하는 아이린이 나쁘다.

자신의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아이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어른은 어떤가 싶지만 세 명의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아이린이 외투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한 짓을 한게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다만 돌아가는 길 내내 아르웬은 내가 엄청난 팔불출이라 놀려댔고, 여자애 두 명도 아이린 옆에 붙어서는 계속 아이린을 놀려댔다.

애들의 놀림에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린이 여자애들의 놀림에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부정해봤자 오히려 더욱 놀리고 싶다는 것을 나중에 말해줘야겠다.

결국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광장에서 아이들은 해산했다. 아르웬도 여기서부터는 길이 갈라졌기 때문에 광장에서부터 집까지는 아이린과 단 둘이 걸어 돌아오게 됐다.

광장에서 헤어지고 걷던 도중 아이린이 내게 조금씩 가까워졌다. 다가온 아이린의 손을 힐끔거리던 나는 침을 삼키고 손을 뻗어 아이린의 손을 맞잡았다.

아이린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꽁꽁 얼어있던 어색한 분위기는 금세 녹아내렸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손을 꼬옥 쥐는 아이린과 함께 돌아왔다.

"찝찝할 텐데 먼저 씻으렴. 갈아입을 옷은 밖에 꺼내놓으마."

그렇게 말하고는 나는 아이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 채워놨던 옷들 중 잠옷을 한 번 꺼냈다. 그리고는 아래쪽에 있는 서랍을 보고 망설였다.

갈아입을 속옷도 내가 꺼내줘야 하는가에 대해 잠시 고뇌하던 나는 결국 서랍을 열지 못하고 잠옷 셔츠와 바지만을 욕실 앞에 두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절대 아이린의 속옷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그런게 아니다. 그저 아이린 입장에서 서른 살 먹은 아저씨가 자신의 속옷을 꺼내줬다는게 싫을까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머릿속에서는 속옷만 입은 아이린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섹시한 속옷을 입은 아이린의 모습이 지난번에 내 꿈에서 나왔던 또 다른 아이린과 오버랩됐다.

아냐.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성취향을 가진 남자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소녀에게 욕정하는 짓 따위 하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며 저녁 찬거리를 준비 하기 위해 창고에서 샐러드와 냉동 보관된 닭고기를 꺼내왔다.

냄비 안에 기름을 붓고 마법으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닭을 경쾌한 리듬으로 칼로 내려치며 심호흡했다. 본격적으로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방금 전까지 들었던 이상한 생각들이 점점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먹기 좋게 썰어낸 닭고기에 밀가루와 물을 섞은 반죽에 묻혔다.

꼼꼼하게 튀김옷을 입힌 다음 타이밍 좋게 지글지글 끓기 시작한 기름 안에 넣었다.

그렇게 닭튀김의 튀김옷이 되기를 기다리며 사용한 부엌의 도구를 정리하는데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반쯤 열고 나온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린은 수건을 자신의 허리에 감은 채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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