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야트막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슴, 평소에는 셔츠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던 아찔한 쇄골, 새하얀 허벅지와 종아리, 거기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윤기흐르는 보랏빛 머리카락까지.
특히 어깻죽지 부분에 달려 있는 날개가 묘한 배덕감을 풍기고 있었다.
아이린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인 잠옷을 들었다.
허리를 숙이며 수건이 살짝 흘러내리며 핑크빛의 무언가가 노출됐다. 가슴도 없는 어린애였지만 몸을 숙이며 머리카락이 찰랑이는 장면이 쓸데없이 요염했다.
금세 자세를 되돌리며 수건이 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보였던 장면은 쉽사리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간 아이린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처음 욕실에 들어갈 때 입고 있던 물기에 젖은 옷을 빨래통에 넣은 아이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옷을 벗고 속옷을 입겠지.
꿀꺽.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기름이 튀었다.
손가락에 닿는 뜨거운 감각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튀김을 건져냈지만 닭튀김은 이미 타버린 후였다. 황급히 불을 끄고 이미 타버린 튀김들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시 재료를 준비하기 전에 슬쩍 바지를 당겨 내 아랫도리를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아랫도리는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딸처럼 생각하던 아직 어린 여자애에게 음심을 품었다면 당장 오늘 갔던 강가에 머리를 쳐박을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내 아랫도리의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결국에는 창고에서 새로 닭고기를 꺼내와서 다시 튀겨야했다.
어찌어찌 튀김을 튀기고, 샐러드와 빵과 함께 상을 차렸다. 아이린과 화해한 것이 기분좋기도 해서 상을 가득채웠다.
어제 마셨던 오크통의 맥주를 다시 잔에 가득 채우고는 튀김을 베어물었다.
바삭바삭한 튀김 껍질을 씹으며 흘러나오는 고기의 육즙을 맛봤다. 그렇게 튀김을 우물거리며 한 손으로 든 맥주잔을 입가에 갖다댔다.
꿀꺽. 꿀꺽. 식도를 타고 흐르는 맥주의 시원한 청량감에 나도 모르게 '크으'하고 소리를 냈다. 아이린을 보니 아이린은 바게트 빵을 먼저 우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지난번에 내가 잘 먹는 아이가 좋다고 한 이후로 아이린은 식사를 할 때 내 눈치를 보거나 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도 스스로 예의를 지키며 전처럼 입 안 가득 음식을 넣는 행동같은건 하지 않게 되었다. 한 번 말하면 다시는 그 일로 입 아프게 하지 않았다.
너무 완벽한 건 아닐까 싶어 가끔씩은 아이린이 실수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이린은 집안일을 할 때도 완벽했다.
설거지하며 그릇 하나 깨뜨리지 않고 빨래도 얼룩 하나 없이 완벽하게 해낸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아이린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싶은 입장으로서는 조금 아쉽기도 한게 사실이다.
"맛은 어떠니?"
"엄청 맛있어요. 주인님."
입 안에 우물거리던 빵을 삼키고는 웃으며 대답하는 아이린의 미소에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다.
저런 딸이라면 몇 명이든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튀김과 함께 맥주를 해치우다 보니 오랜만에 취기가 올라왔다.
어제처럼 한 잔만 마시는게 아니라 잔이 빌 때마다 오크통에 가득 담긴 맥주로 잔을 채웠다.
점점 취기가 올라오자 몸이 나른해졌다.
이렇게 기분좋게 취한게 얼마만인지.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서 술을 마시던 때와 달리 적당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오는게 기분이 무척 좋았다.
다만 시야가 흐릿해지고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광경에는 탁자 위의 식기들을 정리하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정리 해야...하는데..."
머릿속의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오는걸 보니 취하긴 한 모양이다.
아이린을 도와 접시와 냄비를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서 비틀거렸다.
몸이 기울어지는 감각과 함께 흔들리는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오는 아이린이었다.
그리고 시야가 암전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온 몸이 욱씬거리는 고통에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 속에 몸이 잠긴 채 머리만 내놓고 둥둥 떠있는듯한 기분이었다.
몸 안의 마나를 일으켜 숙취를 밀어내려 했지만 몸 하나를 가누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기에 제대로 몸 안의 마나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두통을 억누르며 끊어진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어제의 일어난 일을 천천히 더듬었다.
'그러니까 분명...'
낮에 아이린을 찾아온 아이들과 함께 강가에 놀러갔고, 거기서 아르웬을 만났다.
아이린이 잡아준 물고기를 맛있게 먹고, 광장에서 아이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아이린과 손을 잡은 채 가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야에 어제 아이린이 샤워하고 나왔을 때의 섹시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분명히 아이린과 함께 저녁을 먹은 다음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럼 여기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안간힘을 써서 살짝 떴다. 창가로 들어온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몸에 감각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품에 누군가가 안겨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 이 상황에 내 품에 안겨있을 사람은...
"...으응...주인니임..."
그렇게 웅얼거리는 아이린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자세를 보니 나는 아이린을 끌어안은 채 잠든 모양이었다.
가끔씩 카르멘과 술을 마실 때도 나중에 아침에 일어나보면 그녀를 끌어안은 채 일어나있곤 했는데, 아무래도 내 잠버릇 때문인 듯 했다.
아이린은 기분좋게 쌕쌕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있는 왼팔을 빼면 틀림없이 깨고 말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일어나기를 그만두고 조금 자세를 고쳐 누웠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린의 숨결이 내 목덜미에 자꾸만 닿았다.
슬쩍 보니 어째서인지 아이린의 잠옷차림도 풀어헤쳐져 있었다.
가슴팍의 단추도 두어 개 뜯어져 있어 가슴골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아이린이 입고 있던 바지 역시 허벅지까지 흘러내려 흰색 팬티가 일부분 노출되어 있었다.
설마 싶지만, 내가 잠결에 평소 카르멘에게 하던 이상한 짓을 아이린에게도 한 것은 아닐까 싶어 침대를 살펴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사의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술김에 아이린을 덮치거나 했다면 정말로 변명할 여지 없이 범죄 확정이었다.
아이린의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특별히 관리를 받는 것도 아닌데 아이린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기는 커녕 늘 윤기가 흘러넘쳤다.
대륙에서 보랏빛 머리카락은 흔치 않았다. 흑발이나 갈색, 혹은 주홍빛 머리카락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도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린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다시 일어나 있을 때는 두통이 완전히 사라져 있기를 바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몸이 무척 가벼웠다.
숙취로 인한 두통도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고, 뻐근한 허리와 어깨도 풀렸다.
그리고 아까는 잠들어 있던 아이린도 부끄러운 표정으로 내 품에 안긴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젠장.
"저기... 주인님?"
심지어 지금의 아이린은 나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잠결에 다시 한 번 아이린을 끌어안은 모양이었다. 이놈의 잠버릇을 고치던가 해야지.
"미안하다. 내가 어제 취해 추태를 보인 모양이구나."
아이린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빼서 풀어주자 아이린은 황급히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 아니에요! 주인님은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그냥 자다가 조금 더워서..."
밤새도록 끌어안고 있었던만큼 몸에 열이나서 단추를 풀어헤쳤다고 아이린은 설명했다.
바지가 왜 흘러내려가 있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건 묻지 않기로 했다.
"혹시 내가 술김에 이상한 소리 하지는 않았니?"
"아뇨. 자리에서 일어나셨을 때 비틀거리시길래 제가 부축하러 달려가니 그대로 쓰러지셨어요. 일단은 침대에 눕혀드렸는데...그 때 주인님이 제 팔을 잡아당기셔서..."
그렇게 한 침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건가. 스스로의 잠버릇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이린은 여전히 부끄러운지 양 손을 배배 꼬며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동공이 흔들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런 반응을 보면 정말 아무 짓 안 한 게 맞나 의심이 들었지만 재차 아이린에게 물어봐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일관된 대답을 들려주었다.
물론 나도 눈을 떴을 때 코앞에서 아이린의 얼굴이 있는걸 보고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뭐, 본인이 그렇다고 하면 정말로 별 일 없었던거겠지.'
아이린이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딱히 없고 말이다.